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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70.4717-20170630.0103104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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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71년 1월 5일 / 高宗 8 / 辛未
내 용
출발하여 원창령(原昌嶺)을 넘었는데 재는 마현(馬峴)과 같았으나 조금 험하고 급했다. 재를 내려와 동래점(東萊店)을 지나 골짜기 입구로 나오니 안계가 홀연히 확 트였다. 바로 춘천부(春川府)였다. 들판으로 20리를 가서 춘천읍(春川邑)에 들어갔다. 전부(前阜)에서 쉬며 망망한 사방을 두루 바라보았다. 읍인(邑人)이 이르기를 7~80리가 계속 평평하여 끝이 없다고 했다. 비록 맥국(貊國)이지만 도읍 터는 그래도 여느 땅과는 달랐다. 북으로 3~4리를 가서 산록(山麓)을 도니 바로 강진(江津)이었다. 낮에 해가 들기 전에 빙판을 급급히 건너느라 않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빙판 길은 상탄(上灘)에 이미 녹아 구멍이 뚫려 있었고 음지의 심연(深淵)은 그대로 탄탄하여 위태롭게 간신히 건넜다.
강안으로 나와 돌아보니 북쪽 절벽 암대(巖臺)위에 정자가 날개를 편 것처럼 있었는데 바로 소양정(昭陽亭)임을 알아보았다. 단청(丹靑)이 비추어 빛나고 강물이 누대 아래로 흘러 3~40리를 돌아드니, 대저 상쾌하고 탁 트이는 명승지였다. 정자의 왼쪽 기슭은 누대보다 조금 높았으나 그 앞이 험하게 끊어져 강물을 굽어 임하고 있었다.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었는데 높이는 수 십장이나 바위 앞에는 평평하게 겨우 앉을 만한 곳에 육각의 작은 누각을 지었는데, 바위에 의지하여 처마를 삼고 있었다. 이 또한 동포(東浦)에 탁 트이게 임하고 있어서 넓은 들이 광활하고 또 정자보다 나았다. 멀리 바라보기만 할 뿐 등림할 수 없었다, 이미 위험을 건넌 터라 유람할 마음으로 다시 범할 수는 없었다. 단지 강가를 오르락내리락하다 가니, 명승지를 돌아볼 운수가 없는 것이 몹시 한스러웠다. 15리를 가서 옥산포(玉山浦)에서 점심을 먹었다. 중현(仲賢)이 뒤쳐졌다가 비로소 도착했다. 이 공(公)은 일찍이 소양정이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올라가 한바탕 시원하게 둘러보고 온 것이어서 자랑이 그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지나오면서 누렸던 승경(勝景)이 어찌 무미하게 오르고 내려옴에 그칠 뿐이겠는가라고 조롱했으나 마음은 도리어 부러웠다.
옥산포(玉山浦)에서 7~8리를 가서 작은 현(峴)을 넘었다. 현(峴)의 정상은 바로 산허리의 벼랑길이었는데 아래로 백 장(丈) 가까이 임해 있고 큰 강이 세차게 흘러 두렵고 아찔하여 굽어볼 수 없었다. 벼랑길 또한 진창에 미끄러워 걷기 힘들었다. 지난 달 낙마하여 죽은 자가 있다고 했다. 옥산포에서 들은 것을 직접 지나가니 과연 위험한 땅이었다. 내려와 보통(保通)모둔(茅屯) 땅을 지나 저녁에 모진(毛津)에 이르렀다. 강펄에 말배까지 빠지고, 벼랑길의 비탈이 더욱 심해 간신히 강나루에 도착했다. 얼음길은 평탄하고 견고했는데, 두 산이 하늘에 닿아 서로 끼고 있는 곳이어서 얼음은 가장 견고하게 얼어있었다. 걸어 건너 강안에 있는 점사(店舍)로 들어가 묵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들으니 쇠고기를 팔고 싶어 하는 자가 있다고 하여 중현이 의론을 내어 가지고 오게 하고, 1냥 6전에 샀다. 위아래가 한 바탕 포식을 하려하니 협곡을 걸어오면서 늘 소식(素食)만 했던 한을 풀만 한지 혀를 찰만 했다. 이곳은 춘천 땅이었으나 술을 금하는 것이 매우 엄하여 술이 없는 고기 또한 하나의 부족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주인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수 십리 가까운 곳에 넉넉하게 사는 백성이 있었는데 술을 좋아했으나 관금(官禁)이 있은 후로 마실 수 없었다. 며칠 생병이 날 우려가 있어 그의 며느리가 그것을 두렵고 고민하다가 몰래 3승(升) 가량을 빚어 매일 밤에 짜서 마시게 했다. 이처럼 그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 그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말하기를 ‘이웃집에 아무개 늙은이는 나와 술친구이나 술을 마시고 싶어 죽으려고 하는데, 나만 혼자 마실 수가 없으니 한번 함께 마시자고 청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니 그 며느리가 말하기를 ‘몇 잔을 더 눌러 내야 합니다. 시아버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자, 그 시아버지는 그를 청해 함께 마시고 한 바탕 즐겼다. 그 다음날 그 사람이 관가에 가서 고발하자 교차(校差)가 바람같이 이르러 술항아리를 찾아내고 그 시아버지를 잡아갔다. 그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무슨 죄겠습니까. 술을 빚은 것은 저입니다. 제가 응당 가서 죄를 받겠으니 나의 시아버지를 풀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교리(校吏)가 허락하지 않자 곧바로 시아버지보다 먼저 관아문으로 들어가 스스로 엎드려 죄를 밝히며 그의 고민을 다 말했다. ‘시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못해 여위고 병이 들어 감히 3승(升)가량을 빚은 것은 보양하는 바탕으로 삼은 것이고 시아버지가 이웃 늙은이를 청하여 대접한 이유입니다.’라고 하니 관가에서 그의 효를 가상히 여겨 ‘너는 내가 술을 빚도록 허락하겠다. 명하노니 시아버지를 봉양하는 도로 삼아 삼가 과하게 빚어 이득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그 고변한 이웃 늙은이를 잡아 들여 엄하게 곤장 20대를 치고 칼을 씌워 수십 일을 가두고 내보냈다."고 했다. 세간의 일들 중에 이와 같은 것은 비록 소소한 것이라도 족히 천리가 밝지 않음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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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五日。
發行。踰原昌嶺。嶺與馬峴等。而稍峻急。下嶺。過東萊店。出谷口。眼界忽廣豁。乃春川府。野●行二十里。入春川邑。憩前阜。通望四面茫茫。邑人言。七八十里。連平無垠云。雖貊國。其都墟。猶異於常地。北行三四里。回山麓。乃江津也。急於涉氷之未及午陽。不暇顧望。而氷路已上灘解穿。而陰淵姑堅合。然懍危艱渡。出岸回見。北崖巖臺上。有亭翼然。乃知爲昭陽亭。而丹靑照耀。江流臺下。彎環三四十里。蓋爽豁勝景處。亭之左麓。稍高於臺。而陡斷其前。俯臨江水。有巖虎蹲。高可數十丈。而巖前僅平數席地。作六方小閣。依巖爲广簷。此又有通臨東浦。大野曠豁。又可勝於亭。越望不能登臨。已涉之危。不欲更犯。以遊觀之欲。只上下江渚而去。甚恨其無分於勝區也。行十五里。午站于玉山浦。仲賢落後始到。此公曾已聞知有昭陽亭。故登覽一暢而來。詫誇不已。余强嘲以吾之過去。領取勝景。豈君無味登下而已耶。然心却追羨。自玉山浦。行七八里。踰小峴。自峴項。卽山腰遷路。下臨近百丈。大江激射。凜眩不可俯。遷路又泥滑難步。去月有落馬見斃者云。所聞於玉浦者。而親過。果是危地耳。下過保通茅屯地。暮抵毛津。江泥沒馬腹。陂遷尤甚。艱行到江津。氷路坦堅。兩山摩天相挾之地。氷合最堅。步渡入岸上店舍。止宿。夕後聞有黃肉願賣者。仲賢發論。使持來。以一兩六戔買取。爲上下一飽。可雪歷峽來長素食之恨耶。呵呵。此是春川地。而酒禁甚嚴。無酒之肉。又一欠事。因此聞主人傳誦言。近地數十里。有一饒居之民。好酒。而自官禁之後。不得飮。幾日有生病之慮。其子婦悶恐之。潛釀三數升。每夜間壓飮之。如是不止。一夜其舅。請於其婦曰。隣家某翁。與我爲酒朋。而思酒渴欲死。吾不可獨飮。一請共飮。何如。婦曰。當加壓幾盃。惟舅志是養。其舅乃請之共飮一歡矣。其明日。其人往告官家。校差風至。搜出酒瓮捉去。其舅。其婦曰。舅何罪焉。釀酒者。吾也。吾當往受罪。願寬我舅。校吏不許。乃先於其舅。直走入官門。自見伏罪。俱道其悶。舅不飮瘦病之故。敢釀三數升。爲助補之資。及其舅請饋隣翁之由。則官家嘉其孝。命●(使)汝。則吾許賜酒。令爲養舅之道。愼勿過釀爲見利之計。可也。因捉致其隣翁告變者。嚴棍二十度。枷囚數十日。出逐之云。世間事類如此者。雖小小底。亦足見天理之無不明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