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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70.4717-20170630.0103104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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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70년 12월 28일 / 高宗 7 / 庚午
내 용
추위가 줄곧 풀리지 않아 외축(畏縮)되어 일찍 출발할 수 없었다. 또 원주(原州)이후로 각기 갈림길에 임하기 때문에 한 곳에 모여 머물며 해를 보내고 맞이한 뒤에 서로 헤어지기로 계획했다. 생각건대 영저(營邸)가 넓이 면에서 편할 것 같이 원주에서 멈추는 것으로 약속했다. 늦게 출발하여 가리파령(可里坡嶺)을 넘었다. 여기부터 올라가니 그다지 험준한 길은 아니었고, 또 평탄하여 빙판만 아니라면 말을 타고 재를 넘을 수 있었으나, 겨우 재에 올라 아래를 내려 보니 사방이 막힌 구덩이였다. 등라(藤蘿) 속에서 뿌리를 잡고 갔으나 빙판은 바로 걸린 폭포였다. 인마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간신히 2~3리쯤 내려가서 비로소 계곡 바닥에 도착했으나 산이 둘러싸고 계곡이 겹쳐있어 하늘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길은 혹 평탄하기도 했으나 얼음길에 한 조각의 흙으로 된 밟을 만한 땅이 없어 말을 타고 갈 엄두도 나지 않았고 걸음도 감히 방심할 수 없었다. 발은 조심스러워 주저함이 있는 듯했으나 다른 고을 산천을 가면서 어찌 주람의 의미가 없겠는가. 그러나 발과 눈이 서로 떨어져 바로 엎어지고 자빠지는 가운에 있으니 곧 소위 "눈을 높이 쳐들 수도 없고, 걸음을 크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이러한 일심을 가지고 갈면서 일용할 공부의 바탕으로 삼을 따름이었다.
산에서 내려와 또 눈을 무릅쓰고 10여리를 가서 단구역(丹丘驛) 원주 남쪽 5리 경계를 지나 영저(營邸)로 들어갔다. 머물 곳을 물으니 마방(馬枋)은 단 두 집밖에 없었으나 하나는 가난하여 바칠 것이 없고 하나는 협착하여 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를 꾀어 근근이 머물 곳으로 들어가니 노복의 방뿐이었다. 누추하여 머물만한 곳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노지(露地)보다는 나으니 한탄스러웠다. 대저 소위 영문(營門) 길은 안동부와 비교하여 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성도 없고 울타리도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중현이 판관에게 전갈했는데 바로 단양(端陽) 이연철(李演喆)이었다. 선친의 벗으로 도타웠던 사람이었다. 관(官)에서 교리(校吏)를 내어 머물 곳을 정했다고 하나 결국은 깨끗한 방은 얻을 수 없어 그대로 앉은 곳에서 멈춰 묵었다.
밤이 된 뒤에 주관은 그 아들을 보내와 중현을 만나 수작했는데 사뭇 지각이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어찌 유행(儒行)에 누가 되겠습니까마는 단 수개월 고생을 하게 되었으니 고민될 만 합니다."라고 운운했다. 보기는 젊은 사람이고 또 이색적이었으나 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아름다운 성품이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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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二十八日。
寒事一向不解。畏縮不能早發。且以原州以後。各侍分路。故爲一處會留。餞迓後相散計。則意營邸似便於寬容。約以抵止原州。晩發。踰可里坡嶺。自此上去。則不甚峻路又坦。若非氷滑。則可騎到嶺上。而纔上嶺下視。便四塞坑塹。藤蘿中拚本作行。而氷坂直一懸瀑。人馬不得着足。艱下幾二三里。始到谷底。而山迴谷疊。天外無見。路或坦平。而氷程無一片土可踏之地。騎馬非可生意。而步履亦不敢放心。足踧踖如有循。而行異省山川。豈無周覽之意。而足目相離。便顚沛路中。正所謂高擧目不得。闊擧步不可者。正可將此一心去。做日用地資工耳。自山下又冒雪行十餘里。過丹邱驛原南五里界。入營邸。問館則馬枋只有二家。而一以貧乏。無以供。一以窄狹。不肯納。誘之僅入次。則只有僕奴室。湫陋不堪居者。然猶愈於露地。嘆嘆。蓋所謂營門道。比安東府不及半。而無城無藩。令人發笑。仲賢傳喝于判官。卽丹陽李淵喆。而爲先友深摯者。自官出校吏定館云。而竟不得一淨室。仍於所坐處。止宿。夜後主官。以其子來見仲賢。而酬酢。頗似有知覺。謂言此何●(何)累於儒行。但爲幾月客苦。可悶云云。見是少年子。且異色。而其言如是。可見彝性所同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