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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70.4717-20170630.0103104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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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70년 11월 2일 / 高宗 7 / 庚午
내 용
나 또한 행장을 꾸려 출발하여 천전(川前) 김순약(金純若)에게 들려 묵었다. 다음날 3일에 김정백(金正伯)을 기다려 임천(臨川)에 함께 나아가 저물녘에 도착하였다. 바람과 추위가 매섭게 닿아 정신을 안정시킬 수 없었고, 묵을 곳이 좁아 편할 수 없었으니 근심스러웠다. 원근(遠近)의 사림 노소가 전송하기 위해 와서 모인 자가 백여 명이었으며, 소유(疏儒)로 온 자는 장구봉(張九鳳), 이집(李{王+集}), 이만협(李晩協), 김양진(金養鎭), 김수락(金秀洛)과 나이고, 김헌락(金獻洛)은 본손(本孫)으로 행렬을 주도하는 자이다. 유곡(酉谷), 해저(海底), 영천(榮川), 예천(醴川), 의성(義城)의 유생들은 상주(尙州)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소수 장(疏首丈)의 행차는 날이 저문 뒤에 왔는데, 기력과 모습이 건강한 젊은이와 다름이 없어 회중에서 모두 축하하며 서로 경사로 여겼다. 이찬도(李贊燾)는 배행(陪行)으로 왔고 사촌 사형(沙村査兄) 또한 행렬을 전별하기 위해 일부러 왔으니 기쁠 만하다.
저녁을 먹은 뒤에 내가 자리 끝에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다만 우리 유림을 위해 후학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일 뿐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달렸으니 어떻게 기필할 수 있으며, 자기의 화복(禍福)이니 어떻게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적이 성균관에 들어간 날에 혹 두려워 풍색(風色)에 동요되는 것에 좌초되는 것을 면치 못할까 염려되니 그렇다면 미리 스스로 정지하여 사림의 부끄러움을 끼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가슴을 베는 것 같은 의는 모두 빼앗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믿고서 사기를 북돋우고 돕는 도움으로 삼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수위 장(首位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또한 축(軸)을 내는 초기에 강론하여 결정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나 또한 앞으로 있을 많은 일의 기미를 헤아려 일부러 임천의 한 가지 일에 이 몸을 들였으니 이외에는 다시 꺼리고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이 없을 따름이다. 제군 또한 힘쓰라."고 하기에 공경히 절하고 물러났다. 각처의 소초(疏草)가 모두 들어왔으니, 소청(疏廳)을 설치한 뒤에 소초를 가려 베껴 행협(行篋)에 넣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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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二日。
余亦裝發。歷宿川前金純若。粤明三日。俟金正伯。同赴臨川。日暮抵到。風寒觸烈。不能定神。而夾舍無可就便。可悶。遠近士林老少。爲餞送來會者百餘員。而疏儒來到者張九鳳李{王+集}李晩協金養鎭金秀洛及余。而金獻洛以本孫主行者也。酉海及榮醴義城儒生。約以經會於尙州地云。疏首丈行次。昏後來臨。氣力神觀。無異强少。會中皆賀相慶。李贊燾以陪行來。沙村査兄亦爲餞行委來。可欣。夕食後基鎬進于席末曰。今日之擧。只爲我儒林後學之所當爲者而已。在天之成否。何可必。自己之禍福。何可計也。竊慮夫入泮之日。或不免爲恐動風色所挫沮。則不如預自停止之爲不貽士林之羞乎。皆曰。非所慮也。今日吾輩。無論去者送者。一箇斷胸之義。俱有所不可奪者。則豈不爲恃而增助士氣之資耶。首位丈曰。此言亦不可無講定於發��之初。然吾亦料度來頭多小事機。委納此身於臨川一事。外更無可顧忌動心之物如是而已。諸君亦勉之。敬拜而退。各處疏草。皆入來。爲設廳後。擇寫入行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