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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70.4717-20170630.0103104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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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70년 11월 18일 / 高宗 7 / 庚午
내 용
저녁에 호상(湖上) 영감이 들어오자 온 자리의 사람이 놀라 엎어지듯 나가 맞으며 "무슨 일입니까?"라고 했다. 자리에 앉으며 "이감(梨甘)에서 떠나오는 날 용산동(龍山洞)에 도착하여, 영남인 중에 판을 불태우라는 관문이 내려가는 것을 본 사람을 만나 관사(關辭)를 자세히 듣고 내려갈 의사가 없어 곧 길을 돌려 올라왔다. 오늘 아침을 먹은 뒤에 곧장 운궁(雲宮)으로 들어가 간절히 아뢨으나 변통은 없었고, 다만 ‘태백산 재판(梓板)은 영원히 없어진 것인가. 비록 내년에 추가하여 간행하더라도 나는 간여하지 않겠다. 이밖에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운운했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놀라 자리에서 물러날 때, 참판 한돈원(韓敦源)이 자리에 있다가 좌중의 한 무관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어제 남문 안에서 영남 유생 수십여 명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들어왔는데, 혹시 무슨 일인지 아는가?"라고 하자 무관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대저 한 참판(韓參判)이 이미 그것을 알고서 떠서 알아보기 위한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이 말하기를 "영남 유생들이 무슨 일로 올라왔는가. 놀랍고 괴이하다."고 했다. 조금 있다가 호상 영감에게 물어 이르기를 "영감은 혹 그것을 아는가? 무엇 때문에 올라온 것인가?"라고 묻자 호상 영감이 "소인은 알고 있습니다. 임천서원 청액하는 일 때문에 복합하여 상소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르기를 "임천서원은 훼철 서원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라고 하자, 답하기를 "훼철서원입니다. 그래서 유생들이 사액을 청원하여 복설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곧 이르기를 "영남의 놈들은 윤기(倫紀)를 모르는 자들이다. 내가 훼철하는 일을 했으나 상감(上監)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우리 부자를 이간질하는 일이니 응당 다리를 분질러놔야 한다."고 운운했다. 호상 영감은 엎드려 그 말을 밝힐 수 없음을 한탄하며 이르기를 "대감이 훼철했기 때문에 고로 상감에게 상호하는 것입니다. 대감과 상감은 한 몸의 처지 아닙니까. 어찌 그 사이를 이간질 할 수 있겠습니까. 인하여 학야(鶴爺: 학봉 김성일)을 모시는 서원으로서의 의리가 없을 수 없고 영남 유생들의 억울한 여정(輿情)을 두루 아뢰었으나 듣고 안 듣고는 차치하더라도 어찌 한 바탕 명쾌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몹시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니 탄식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찍 일어나 소수(疏首)에게 문후를 올렸다. 천릿길을 바람을 무릅쓰고 치달려온 나머지 잠자리와 반찬을 줄이지 않았고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이미 의관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물러나와 여러 사람과 서로 축하하며 공경과 감탄을 그치지 않았다. 소수 이하 사람들이 함께 수위(首位)에 나아가 대략 설청(設廳)하는 일을 품의하니, 하교(下敎)하기를 여정의 피곤함이 풀리고 행차의 소란스러움이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떠한가. 이 일은 안일하게 놀면서 바라만 볼 수 없고, 또 거조를 급히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여러 유생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당합니다."고 했다. 이내 21일에 개좌(開坐)하여 성균관에 통문을 내고, 근실(勤實)을 청하는 것은 소록(疏錄)에 자세히 내걸자는 것으로 의론을 결정하고 소를 쓰기 시작했다. 근실(謹悉)과 득청(得請) 여부를 막론하고 소를 다 쓰는 날에 복합(伏閤)하자는 방도로 삼자고 약속했다. 다시는 바꾸지 못한다고 운운했다.
반중 지구들 중에 보러 온 사람은 승지 강하규(姜夏奎), 참의 이만운(李晩運), 승지 김석보(金錫輔), 이 직장(李直長)【칠곡(漆谷)】과 내 외삼촌뿐이었다. 종형은 소유들과 다름없이 종일 같이 거처했다. 김산(金山) 숙부님은 매일 왕래했는데, 기력이 강하여 더욱 다행이었다.
낮에 외삼촌께 문후를 드리러 갔는데, 김 승지 어른이 마침 자리에 계셨다. 말이 소사(疏事)에 이르자 "끝은 어찌 될지 모를지라도 화가 되고 복이든 간에 이런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고향에 있을 때 들은 것인데, 영감과 같은 여러 공(公) 앞에서 이러한 의론을 들게 될 줄 몰랐습니다. 오늘 세상에 또한 소신 있는 말이 있음을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어르신께서 웃으며 말하기를 "온 세상 모두 시상(時象)에 눌리는 바가 되었을 뿐이라 부득이 지중(持重)한 의론이 되었으나 이 또한 소유들이 올라오지 않은 일 때문이다. 이제 올라온 후이니 누가 요긴하지 않다 하겠는가."라고 했다. 외삼촌이 말하기를 "상소문을 품고 감히 전현(磚峴)을 넘어가지 못할까 염려가 되나 어찌 되어 가는지를 보고 내가 해야 할 바를 닦을 따름이니 좋다."고 했다. 이에 원위(院位)가 호상 영감에게 이르기를 "소유들에게 내려가도록 권하라. 이는 일루어질 수 없는 일이요, 내 생전에 바뀔 수 없는 명령이니, 반드시 내려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호상 영감이 이르기를 "소인은 향촌에 있을 때 소론(疏論)을 같이 했던 사람이나 경성에 이르러서는 시의(時議)와 여론에 향촌에서 생각한 바가 아닌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수가 소인의 재종(再從) 아우이기 때문에 여러 차례 편지를 써서 힘을 다해 금지했으나 사론(士論)이 곧바로 이루어져 이렇게 올라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소인이 내려갈 때 중도에서 서로 만나 그와 함께 돌아가도록 권했으나 시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엄령을 내리셨으니 (어찌) 감히 제유들에게 물러나 전하지 않겠습니까. 의당 하교에 의거하여 소유들에게 명을 널리 알리겠습니다."라고 운운했다. 이에 하직 작별하고 왔다. 실기(實記)의 일도 누락된 것이 없는데 중도에 길을 돌리는 정성이 어디에 있는가? 탄식스럽고 한스럽다.
소유이하는 운궁에서 내려가라는 명을 듣고 모두 이르기를 "본디 예상한 일이다. 복합 이후 처분은 하늘에 달린 일로 본디 사람의 힘을 쓸 곳이 아니다. 그러나 복합 이전은 유생들이 힘과 성의로 할 수 있는 일인데, 상(上)으로부터 반드시 금하는 움직임이 아니니 어찌 한 번의 명이 내려온 것에 좌절되어 역량을 어지럽힐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급급히 설청하자는 의론도 있었는데, 대저 일에 별다른 층층이 생겨 상소문을 써 복합하기도 전에 또 저지되는 실마리가 있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르기를 "일은 느슨하게 할 수 없고, 또 격하게 할 수도 없는데, 하물며 우리들 유림의 일에 더욱 정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날짜가 정해져 설청하고 시행하자는 기약이 있었으나, 이제 밖에서 온 풍문 때문에 급급히 당겨 정하는 것은 일부러 격하게 하는 것 같은 것이 있어서이나 그러나 일을 하는 도리가 아니다. 이처럼 물러날 수도 없고 저처럼 나아갈 수 없으니, 다만 내가 정산한 것으로 나아가고 물러남을 바꾸지 마시오. 이것이 바로 ‘사기(士氣)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오. 첨의가 어떠하든 하지 않는 것은 안 됩니다."라고 했다.
밤에 실기의 일로 회의를 했다. 우리 종형제는 영감이 다시 나아가 죽음을 무릅쓰고 쟁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의론이 모두 하직하여 다시 배알할 체면이 없다고 하여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다방면으로 의론을 판별하여 비로소 내일 다시 나아가는 계획으로 결정했다. 종형제는 이에 객관으로 돌아와 베게에서 얼마간의 일을 의논하며 웃다가 개탄하다가 했다. 결국 경고(更鼓)가 이미 다 쳤으나 그래도 또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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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十八日。
早起。進候於疏首。千里冒風驅馳之餘。寢饍不減。早興洗盥。已整衣冠。退與諸人相賀。欽嘆不已。疏下幷進首位前。略稟設廳事。下敎以稍俟路憊解休及行擾少定。如何。此事。蓋不可玩揭顧望。又不必忙急擧措。諸儒皆曰。至當。乃定議以二十一日開坐發館通。請謹悉出揭疏錄。因始寫疏。無論謹悉得請與否。期以疏寫畢成之日爲伏閤之道。更不移易云云。泮中知舊來見者。姜承旨夏奎李參議晩運金承旨錫輔李直長【漆谷】及吾渭陽而已。從兄。無異疏儒。終日同處。金山叔主。逐日往來。氣力之强。尤可幸耳。午間。往候渭陽。金承旨丈適在坐。語及疏事。末梢雖未知如何。而禍福間。不可無此擧。余曰。在鄕時所聞。則如令監。諸公之前。不料聞此等議論。今知世上亦有所見之言。金丈笑曰。擧世只皆爲時象所壓。不得已爲持重之議。而此亦爲疏儒未上來之事。今此上來之後。則夫孰曰。不緊哉。渭陽曰。但慮抱疏。不敢踰磚峴。然第看下回如何。只修吾當爲者而已。可也。夕時。湖上令監入來。擧坐驚倒出迎曰。何故也。坐定言。自梨甘發去之日。到龍山洞。見嶺人之目見燒板關下去者。詳聞關辭。無意下去。卽爲回程上來。今朝後。直入雲宮。懇告。無變通。只曰。太白山梓板。永無乎。雖明年追刊。吾不干矣。此外更無可煩云云。方竦然退坐之際。韓參判敦源在坐。顧坐中一武官曰。昨日南門內。嶺儒數十餘員。齊馬首入來。或知爲何事耶。武官不知爲答。蓋韓參判已知之。而爲挑探計也。大院君曰。嶺儒有何事而上來。驚怪。小間問湖上令監曰。令或知之否。以何爲而來也。湖令曰。小人知之矣。爲臨川請額事伏閤上疏計也。曰。臨川書院不入毁撤中耶。答曰。毁撤。故儒生等願請蒙額。以爲復設之地也。卽曰。嶺南之漢。不知倫紀者也。吾爲毁撤之事。而訴寃於上監。則是間我父子也。當析鶴膝云云。伏恨湖令●(恨)不能明其言曰。大監毁撤。故上疏於上監者也。大監與上監。其非一體之地乎。豈爲間於其間哉。因歷告鶴爺。不可無主院之義及嶺儒抑鬱之輿情。則聽未姑置。豈不爲一場明快耶。嚴畏不敢言。伏嘆。院位因謂湖令曰。疏儒勸使下去也。是不可成之事也。吾生前不可移易之令也。必爲下送也。湖令曰。小人在鄕時。則同爲疏論之人。而及到京城。時議物論。有非鄕間所料。而所謂疏首。卽小人之再從弟。故累次折簡。極力禁止。而士論直遂。至此上來之境。小人下去時。相遇半途。勸之爲偕歸。而不得施行。今此嚴令之下。敢不退傳。諸儒當依敎宣令於疏儒云云。因下直作別而來。實記事。又無下落。中道回程之誠。何在耶。嘆恨嘆恨。疏首以下。承聞雲宮下去之令。皆曰。固所預料之事。伏閤以後處分。在天之事。固不用人力處。而伏閤以前。乃儒生誠力可爲之事。而又非自上必禁之擧。則豈可挫沮擾量於一令之下哉。於是或有急急設廳之議。蓋恐事機之別般層生。未及寫疏伏閤之前。更有沮止之端也。余謂凡事不可緩。而又不可激。況吾輩儒林之事。尤不可不鄭重。旣定日有設施之期。而今因外來風聞。又急急進定。有若故激者。然非做事之道。不以如是而退。不以如彼而進。只以吾所定算者。勿移易前却。是乃士氣之不可奪者也。如何僉議未爲不可也。夜間。以實記事會議。吾從兄弟。則以意謂。令監不可不更進。冒死爭之。則諸議皆以因下直。無更謁之體面。援止不可。至夜深。多方卞議。始定以明日更進爲計。從兄弟因歸館。枕上論多少事。或笑呵。或慨恨。底至更鼓旣盡。還亦浪費說話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