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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70.4717-20170630.0103104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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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70년 윤 10월 15일 / 高宗 7 / 庚午
내 용
객일수록(客日隨錄)
경오년 여름에 임천서원(臨川書院)의 복설(復設)을 청하는 유소(儒疏)에 관한 일로 호계(虎溪)에서 의론을 내어 호암(豪巖)에서 향회를 열기로 정하였다. 온 고을의 노성한 자들이 때맞춰 일제히 모여 화부(花府: 안동부)에서 도회를 열기로 정하기 위해 글을 내어 도내에 날짜를 고하였으니 8월 모갑【17일 신해(辛亥)】이었다. 향도(鄕道)의 유림 회원이 자못 엉성하지 않아 숭보당(崇報堂)에 개좌하고 의논하여 가부(可否)를 정하였는데, 일제히 서원이 훼철당한 뒤에 후학이 선현의 아름다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길은 마땅히 부월(斧鉞)의 형벌을 피하지 않고서 죽음을 무릅쓰고 국문(國門)의 밖에서 임금께 아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행히 정성이 천심(天心)을 감동시켜 복설하게 된다면 사문이 끝내 없어지지 않는 경사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항양(桁楊: 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과 발목에 채우는 차꼬)을 차고 영해(嶺海)로 유배를 가는 견책을 당하여 오히려 돌아가 지하의 선현의 얼굴을 뵐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정의 명령이 이미 사액 받지 못한 것으로 한도를 정하고 한가지로 엄중히 처단하여 넣거나 빼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들이 죄인으로 칩복하고 숨죽이고 있으면서 감히 한번 규혼(叫閽) 할 뜻을 내지 못한 것이다. 대개 의거하여 상소를 지어 조정을 회오(回悟) 상량(商量)할 단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임천서원 또한 사액 받지 못하고 훼철되었지만 갑자년에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청하는 일은 비록 들어가 청하지는 못했지만 마땅히 청해야한다는 것은 서울과 지방이 함께 아는 바이고, 비록 아직은 사액 받지 못하고 있지만 사액을 받아야한다는 것은 조정이 잘 아는 바이다. 또 우리 선생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한 몸으로 사선생(四先生)이 되어 아울러 온 나라에 일컬어진 자이다. 사림의 존위(尊衛)와 조정의 숭보(崇報)가 차이나는 것이 없었는데 지금 세 선생의 주원(主院)은 모두 사액서원으로 예전대로 상설하여 절기에 따라 향사를 올리지만 유독 우리 임천서원은 특히 유림의 사력이 미치지 못하고 후학의 성의가 이르지 못하여 당 처마 위에 하나의 편액을 보액(寶額)받지 못하여 오늘날에 혼입(混入)되고 파훼(破毁)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우리 후생들의 죄가 아님이 없다. 그러나 만약 조정의 위로부터 이 같은 사정과 억울함을 굽어 아신다면 또 어찌 잘 알아 헤아려서 조처하는 은전이 없어 보통에서 벗어남이 있겠는가? 또 사액하지 않아야 한다고 여긴 까닭으로 훼철되었다면 마땅히 먼저 청액한 뒤에 복설하는 것이 사체(事體)의 바른 것이 된다. 이에 청액하는 일로 정돈하여 마침내 소임(疏任)을 파정(爬定)하여 인원을 구성하였다. 11월 초3일을 길 떠나는 날로 정해 글을 내어 두루 고하고 우설풍한으로 또한 중지하여 물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서 마치고 돌아왔다.

윤10월 15일에 임천서원(臨川書院)에서 작은 모임이 있었는데 사력(事力) 상 많은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형세가 있어서 기록한 아래의 12인을 뽑아 정하여 노잣돈을 마련해 보내기로 의논하였다. 나 또한 뽑힌 가운데에 들어갔는데, 생각건대 이렇게 병 많은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한겨울 천릿길의 행역은 결코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평소에 정한 뜻에 대개 이 일에 있어 남보다 뒤지고 싶지 않은 뜻이 있었다. 또 서울과 지방 사이에 이따금씩 소문에 저지된다는 논의가 있는 것을 보았다. 만약 또 우리집안 사람으로부터 사양하고 피하는 일이 있다면 진퇴하는 기미에 관계됨이 있을 것이기에 마침에 뜻을 결정하여 따라 갈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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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客日隨錄。
庚午夏。以臨川書院請復儒疏事。自虎溪發論。定鄕會於豪巖。一鄕老成。趁期齊會。爲定道會於花府。發文告日於道內。八月某甲【十七日辛亥】也。鄕道儒會員。頗不零星。開坐于崇報堂。議定可否。一齊以爲書院被毁之後。爲後學報答先賢嘉惠之道。所當不避斧鉞。冒死呼籲於國門之外。幸而誠格天心。蒙使復設。則斯文未欲終喪之慶也。如其不然。蒙被桁楊嶺海之譴。猶爲有歸拜地下先賢之顔。而朝令旣以未額定限。一例嚴斷。無所存拔。故至今日吾輩之罪伏屛息。不敢生一番叫閽之意者。蓋以無所據依措辭。可爲朝家回悟商量之端故也。而今此臨川。則亦以未額見毁。而甲子請額疏擧。雖未得入請。而當請則京鄕之所共知也。雖尙在未額。而當額則朝家之所下燭也。且吾先生一體於厓爺寒旅。爲四先生。幷稱於通國者也。士林之尊衛。朝家之崇報。無所差間。而今乃三先生主院。則皆以額院。象設依舊。薦享隨節。而獨我臨川。特以儒林之事力不逮。後學之誠意未格。不得蒙一板寶額於堂楣之上。以致今日之混入破毁。則莫非吾儕後生之罪。然若自朝廷之上。俯悉此等曲折寃鬱。則又豈無下燭商處之典。有出於尋常者哉。又以爲未額故見撤。則當先請額而後復設。爲事體之正。於是以請額事整頓。遂爬定疏任具員。定發行日於至月初三。而發文徧告。約以雨雪風寒。亦不可停退云云。罷歸。

閏十月
望。
自臨川有小集。議以事力有不可多員上去之勢。抄定錄下十二人。辦送資斧。余亦入抄中。念以若多病不健之身。深冬千里之役。决非可堪。而素定蓋於此事有不欲後人之志。且見京鄕間往往有風聲所沮之論。若又自吾家人有辭免之事。則有係於進退之機。遂决意爲隨行之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