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 01권 > 1864년 > 9월 >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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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64.4717-20170630.0103102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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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4년 9월 3일 / 高宗 1 / 甲子
날 씨 맑다.
내 용
아침 전에 사첨 씨(士瞻氏)가 점을 묻기 위해 남관묘(南關廟)에 나갔다. 이에 앞서 동묘(東廟)에 수차례 물었는데, 점사(占辭,)에 이르기를 "모든 일에 분주하게 구하지 말고, 정도(正道)로써 굳게 지킨다면 내년 봄에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른바 점의 징험 …… 인증한 것이 있으니 제남(濟南)의 선비가 관직을 구하는 점을 쳐서 이 괘를 얻었다. "혹 모 재상을 처음 만난다면 모 관직을 얻을 것이니, 그 사람이 …… 지조를 지켜라."고 하였는데 그 다음해에 모 재상이 역모로 죽음을 당해서 그 사람은 저절로 그 관직을 얻었다고 하니 매우 이치가 있는 것 같았다. 족히 경계로 삼을 만하다. 지금의 일에 관해서 점사는 바로 나온 것 같으나 다만 내년 봄이라고 하니 지금 반드시 이룰 수 없는 것을 아니 우습고 탄식스럽다. 이미 두 차례 점을 본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사첨씨(士瞻氏)가 또 동묘 보다 남묘가 신령하다는 말을 듣고 혹 새로운 조짐이 있고 빨리 이룰 방법을 바라며 또 나가니 그 정성과 노력이 탄식할 만 하였다. 기맥(氣脈)이 또한 나무랄 수 없을 듯하니 삼가 우습고 우습다.
이 점은 간혹 묘하게 들어맞는 것이 있는데 몇 해 전 선산(善山) 홍영조(洪永祚)는 출신(出身)하여 도문(到門)해서 몇 달 집에서 밥을 먹다가 면신례(免新禮)를 하기 위해 올라갔다. 남묘에서 점을 치니 곧 괘사(卦辭)에 이르기를 "금의환양(錦衣還鄕)을 하는 대길이다."고 하니 매우 기뻤다. 끝내 객사(客死)를 하니 김좌근(金左根) 상공(相公)이 그의 죽음을 애처롭게 여겨 수백 금전을 내어 비단 옷 싸서 상차를 꾸려 보냈다는 이상한 이야기가 전해지니 또한 괴이할 만하나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관왕(關王)의 충정(忠精)과 영백(英魄)이 돈을 주고 술수를 붇는 것에 이렇게 신령함을 드러낸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곧 관왕(關王)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개탄스러울 뿐이다.
주인(主人)은 새벽에 일어나 언덕 뒤의 소나무 아래에서 기도를 드리고 아침 전에 여러 가지 떡을 올렸다. 한양으로 들어온 뒤에 밥 먹을 돈 없이 밥을 먹다가 오늘 아침에 귀할만한 음식을 보니 입맛이 바뀐 지 오래되어 많이 먹지 못하니 탄식스러웠다.
좌랑(佐郞) 권한성(權翰成)은 예랑(禮郎)의 직함을 띠고 선시(宣諡)한 명을 받들어 바야흐로 지금 경성(鏡城, 북한의 행정구역상 함경북도 경성군)으로 나갔다. 가마를 타고 우산을 세우니 자못 한번 좋은 일을 얻어 스스로 보기에 영광스럽고 다행이라 여겼으나 지나가는 길이 천팔백 리나 된다 하고 노쇠한 나그네가 추운 길을 가게 되니 도리어 염려될 만하였다. 그는 매우 공손하고 후중(厚重)하여 일찍이 사랑스럽게 본 자였다. 고로 마음이 이와 같을 뿐이다. 다만 종숙부(從叔父)는 송별을 하기 위해 몸소 갔으니 후의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중현(仲賢)은 당시 그의 장인과 기미(氣味)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고 여겨 곁에서 웃었을 뿐이다. 사월(沙月) 어르신도 돌아간다고 고하고자 하니 소청(疏廳)의 여러 논의는 매우 긴한 자가 없어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소청의 유생들이 파하고 돌아간다는 설 또한 장차 한번 전파될까 근심되었다. 그야말로 이른바 나도 이로부터 떠날자 일 뿐이니 또한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전에 호(湖) 어르신과 문약(文若) 어르신이 와서 말하기를 "내일 통문 하는 일로 이술(而述) 어르신과 문오(文五) 영감이 함께 말하기를 ‘대원군(大院君)의 뜻을 찾지 않고 갑자기 통문을 내면 반드시 큰 일이 생긴다. 만약 결단코 모레 파하고 돌아간다고 논의하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가벼이 통문 내는 것을 먼저 할 수가 없다.’"고 하니 이 말이 그럴싸하여 다시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종숙부(從叔父)도 매우 그렇다고 여겼다. 내가 말하기를 "문오 영감께서는 스스로 대원에게 말한다고 했습니까?"라고 하니 종숙부가 답하기를 "문오 염감 스스로는 감히 하지 못하지만 장차 모모군에게 전하여 청하는 것이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여름과 가을이 끝나도록 말하는 대로 아직까지 대원군의 마음을 움직일 한 사람이 없으니 다만 다시 기다린다고 말하겠습니까! 이로부터 수일이 지나면 또 칙행(勅行)이 9일에 있고 감회(監會, 과거시험)를 물린 날이 닥쳐 또한 일하는바 없이 보름을 넘기면 통문도 만들 겨를이 없습니다. 어떻게 대원이 반드시 격노할 것임을 알고, 비록 격노를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큰일이 나겠습니까! 그로 하여금 급급하게 통문을 파하게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원의 마음을 돌릴 길이 있다면 곧 저촉하는 말의 단서를 내더라도 또한 선유(善諭)를 내는 방법입니다. 대원의 마음을 돌릴 길이 없으면 비록 겨울이 지나도 통할 수 없고 반드시 진언하는 방법도 없으니 어찌 반드시 기다리겠습니까! 부득이하게 피하고 돌아가면 이내 한번 통하는 것으로써 돌아가는 빌미로 삼는다면 발문해서 그 뜻을 살피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모두 뜻이 없었다. 다만 논의하기를 여러 사람은 보내고 5~6인만 남겨서 시기를 한정하여 일을 하지 말하는 계책을 세웠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종숙질(從叔侄)은 향리(鄕里)에 칩복(蟄伏)하여 규모(規模)가 졸렬한 사람입니다. 비록 현인(賢人)을 위한 일로 연이어 경성에 머문 것이 어느덧 4달에 가까워졌습니다. 내가 비록 말을 하지 않고 지냈지만 마음은 역여(惄如)하여 만족스럽지 않아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지금 각자 편한 계책을 하고자하여 다만 5~6인에게 맡길 뿐입니다."라고 하니 그 사이에 누가 말하길 "소수가 있습니다."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꼬리에 머리도 있습니까?"라고 하니 모두 말이 없었다. 일을 성사시킬 방법이 없고 의논도 일치하지 않으며, 항상 문오 영감과 남촌(南村) 벗이 능히 대원의 뜻을 돌리는데 바람이 있으니 고민되고 고민되었다.
오후에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며 크게 바람 불고 번개가 치면서 무지개가 걸렸는데 소리를 거두는 때이니 길상(吉祥)하지 않은 것이다.
해저 자형(海底姊兄)이 들어온다고 들었는데 비에 막혀서 가서 볼 수 없으니 매우 울적하였다. 사첨씨가 들어 와서 점괘로 시사를 그려냈다. 망령되이 계교(計巧)를 내지 말라 순수하게 옛 견해를 지키라고 경계 했다. 끝내 돌아가는 날이 무료(無聊)하다고 탄식을 하니 잘못 나온 것이 아닌 것 같아 탄식스럽고 이상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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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三日。
晴。朝前。士瞻氏以問卜次。出往南關廟。前此數次問於東廟。則占辭云。凡事無奔走干求。以正道固守。則明春可成。有所謂占驗▣…▣引證。濟南士人求官占得此。而或初見某相。則某官可得。其人▣…▣守操。其明年某相敗死於逆。而其人則自得其官云。甚似有理。足以爲戒。於今日之事。占則若正出。而但明春之云。今日必無成可知矣。笑嘆笑嘆。已兩次所占。皆如是。而士瞻氏又聞南廟靈於東廟。望或有新兆。可速成之道。又此出去。可嘆其誠力。而氣脈又似不可誣。伏笑伏笑。大抵此占或有妙中者。年前善山洪永祚出身到門。家食幾月。以免新次上來。占於南廟則辭云。錦衣還鄕謂大吉。甚喜。竟乃客死。金左根相公憐其死。出數百金錢。裹以錦衣。治喪以送。傳爲異談。亦可恠。不可不信。然豈謂關王之忠精英魄。乃此著靈於投錢問術之事耶。是則誣侮關王者也。爲之慨然耳。主人晨起。祈禱於後崗松木下。朝前進餠數色。入京後無錢之食。■(始)見於今朝可貴。而口味變久。不能多食。可嘆。權佐郞翰成以所帶禮郎。奉宣諡命。方以今日出去鏡城地。乘轎建傘。頗得一番好事。見自爲榮幸。然程道爲一千八百里云。衰客寒程。還爲可念也。其人甚恭遜厚重。曾所愛看者。故不無情念如是耳。但從叔父爲餞躬往。則似過於厚。仲賢謂時有渠聘翁。氣味相與隅笑耳。沙月丈又欲告歸。疏廳僉議無甚緊者不妨許歸。然疏儒罷歸之說。又將一番播傳。可悶。而正所謂吾亦從此逝者耳。又何用嘆恨耶。午前。湖丈及文若丈來言。明日通文事而述丈及文五令皆言。不探大院君意。遽爾發文。必生大事。若斷議再明罷歸則已。不然則斷不可輕先爲之云。此言似然。不得不更俟矣。從叔父亦深以爲然。余曰。文五令能自言於大院位云耶。曰。自家則不敢。而將轉請於某某人云。余曰。此則終夏秋所言。而尙無動得一人。而徒言更俟耶。過此數日。則又以勅行在九日。監會退日又迫。無所事而過一望。則通文亦無可爲之隙矣。何以知大院之必激。雖激又何如出大事。不過使之逐罷通文。若有可回之路。則觸出言端。亦因發善諭之道也。無可回之路。則雖經冬無通。必無進言之術。何可必待。不得已罷歸之時。乃以一通爲資歸之柄。不如發文以觀其意。皆無意。只議罷送諸員。留五六人。爲勿限時做事之計。余曰。此則不可行之事。吾從叔侄蟄伏鄕里。規模拙澁之人。雖爲賢之事。留連京城。已近四朔。吾雖不言以過。而中心之惄如不慊。有難爲喩。況今欲爲各便之計。只任之五六員而已耶。間有曰。疏首在矣。余曰。無尾之首。亦有之乎。皆無言。大抵事無可成之路。而議論不一。而常有幸望於文五令及南村知舊之能回大院之意。苦悶苦悶。午後雷雨大作。風電虹亘。收聲之時。似非吉祥耳。聞海底姊兄入來。滯雨未得往見。甚鬱。士瞻氏入來。而占辭畵出時事。戒勿妄生計巧。順守舊見。末嘆歸日無聊。似非誤出。嘆異嘆異。

주석

홍영조(洪永祚) : 1820~?. 본관은 남양(南陽), 선산(善山)에 살았다. 철종 10년(1859)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였다. 면신례(免新禮) : 조선시대 벼슬을 처음 시작하는 관원이 선배관원들에게 성의를 표시하는 의식 김좌근(金左根) : 1797~186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이다.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그의 누이이다. 1850년(철종 1)에는 우참찬·제학 겸 지실록사를 거쳐 총위영(總衛營)을 총융청(總戎廳)으로 개편, 총융사(總戎使)를 맡고 이어 금위대장 등 무직(武職)의 수뇌부를 관장하여 당시 혼란한 사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그 뒤 예조판서·형조판서·훈련대장·공조판서·호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세 번씩이나 보직되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62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발생한 각지의 민란을 진정해보려는 의도에서 설립된 이정청(釐整廳)의 총재관(總裁官)을 맡기도 하였으나,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권을 장악하자 실직에서 물러나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뒤 영돈녕부사로 1866년 기로사에 들어갔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권한성(權翰成) : 1811~1879. 자는 익보(翼甫), 호는 긍파재(肯播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837년 사마시에 합격, 1850년(철종 1)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봉상시직장·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804년(고종 1) 이조정랑에 제수되고, 1866년 안주(安州) 대동찰방에 임명되었다. 1872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선비의 사기가 모두 꺾이겠다고 탄식하고, 이후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저서로 『긍파재문집』 4권이 있다. 역여(惄如) : 몹시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詩經)』 「여분汝墳」의 “군자를 보지 못한지라, 아침을 굶은 듯 허전하도다.[未見君子 惄如調飢]”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