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 01권 > 1864년 > 9월 >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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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64.4717-20170630.0103102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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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4년 9월 2일 / 高宗 1 / 甲子
날 씨 맑다.
내 용
날씨가 비가 내린 뒤끝에 추위가 생겨나서 찬물로 세수(洗嗽)하는 것이 매우 좋지 않지만 따뜻한 물을 얻을 길이 없으니 걱정스럽다. 식후에 문약(文若) 어른과 소유(疏儒) 몇 명이 내려왔다. 내가 말하기를 "이러한 일에 공연히 앉아 달을 넘기면서 달리 핵심을 돌리기를 기다리는 데에 분명히 기한이 없을 것입니다. 유생이 가서 만나더라도 절대로 상서(上書)할 수 없고 쟁변(爭辯)하는 것 또한 올바른 사례(事例)가 아니니, 저에게 있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은 태학에 통문을 내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매양 대원군의 뜻을 돌리지 못할까 두려워서 먼저 통문을 내어 격노를 돌리고 후환을 막는 계책으로 삼지만 뜻을 돌리기를 기다리고자 한다면 적당한 사람이 없고 적당한 때가 없으며 또 모든 일은 부딪히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령 격노하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그 어른은 성품이 오래 견디지 못한다고 하니, 혹 돌릴만한 방법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또 끝내 마음을 돌려 요청을 들어줄 방법이 없다면 통문을 하지 않고서 어찌 그 마음을 돌리는 것을 앉아서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마땅히 결백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나가서 망령되이 청탁할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이룬 것 없이 헛되이 돌아가더라도 또한 선생의 서원에 누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운운했다. 여러 사람들이 오직 소수(疏首)의 처결에 달렸다고 말하지만 지금 이렇게 의론이 같지 않으니 누구인들 잘 주관하여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이에 하인을 시켜 모두 소유에게 청하게 하니 모두 이전의 말과 같고, 종숙부는 시종 가벼이 상소를 내는 것에 대해 신중함을 견지하고 있다. 혹시 주선하는 사람이 있어 심처의 생각을 돌이킬 수 있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눈앞에 놓인 도리가 없어서 마침내 그것을 허락하여 이에 통문초(通文草)를 내고 종이를 사와서 모레 모임을 정하여 글을 낼 생각이다.
원일(元一)이 갈 때 며느리를 보는 예로써 소청에 2냥 전을 내어 이날 낮에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공궤했다. 중현(仲賢)이 오 교리(吳校理)를 만나러 나가 접대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못 회(檜), 도(桃) 두 곳보다 좋았으며, 마땅히 틈을 타서 갖추어 고해야 하지만 틈타는 것이 쉽지 않아 날을 정할 수 없었다고 하니 실제 정황인 듯하다. 듣건대 묘당(廟堂)에서 서원제도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사액서원의 가속은 20명이 넘는 곳이 없고 사설서원은 한 명도 허락한 곳이 없으며 재상의 묘노(墓奴)는 한명도 없다고 한다. 대원군의 말에 이르기를 "이와 같다면 사설서원은 훼철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철거할 것이다."라고 운운했다고 한다. 대개 기호(畿湖) 사이에 이른바 서원이라는 것은 축적한 재물 없이 건설할 때에는 본가(本家)에서 돈을 거두어 모으고 혹은 수령이 도와서 이룬다. 서호(西湖)와 같은 경우 봉향하는 도는 다만 가속(假屬) 몇 백 명의 수공전(收貢錢)을 비용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모두 영남 또한 이러한 예를 쓰는 것으로 알았으니 그의 말이 이와 같았다. 가속이 없으면 공전도 없어서 다만 스스로 봉향을 폐하고 스스로 철거할 것이라 여겼으니 도리어 우스울 만하다. 그러나 그 가까운 바와 아는 바의 처지로서는 서원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이 괴이할 것이 없지만 지나치게 경계(懲羹吹薤 : 뜨거운 국을 먹다가 속을 데고 나면 냉채국을 먹을 때도 불어서 먹는다는 뜻)하는 것이니 다만 그 식견이 넓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후에 하양(河陽) 관아의 편지를 보았는데 편안하다는 소식을 받으니 기쁠 만하다. 바삐 몇 자 써서 답을 보냈다. 거창(居昌) 김기수(金基洙)가 누워서 병을 앓은 지 4, 5일이기에 저녁때 가서 병세를 살폈다. 조금 머리는 들었지만 몸과 마음은 겨우 죽음을 면했을 따름이니 보기에 매우 근심스러웠다. 그러나 하향(下鄕)의 뜻있는 선비가 결국 소견은 그 투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개 정과(庭科) 뒤에 그대로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소행(疏行)이 올라오자 매번 와서 좋게 상종했는데, 도기과를 치기 전 10여 일 동안 만나러 오지 않아서 물어보니 우시관(右試官)을 따라 내려갔다고 했다. 결국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또 올라왔는데 걸은 것이 모두 2천리이니 그 어찌 병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리어 가증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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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二日。
晴。日氣雨餘寒生。冷水洗嗽。頗不好。而無路得溫湯。可悶。食後文若丈及疏儒若干員下來。余言此等事。空坐踰月。待他回核。必無期限。儒生往見。斷不可上書。爭辨亦非事例。在我所當爲之事。不過通太學以觀下回之如何。而每恐未回大院君之意。而先發文爲反激杜後之計。然欲俟回意。則無其人無其時。且凡事不激則不成。假使有激怒之事。厥丈聞性不持久云。或不無可回之道。設又終無回聽之道。則雖不通文。何可坐望其回耶。只當白直做去。幸勿妄生干囑之計。則空還無成。亦無所累於先生之院云云。僉曰。惟在疏首處決。今此議論不一。誰其能主判耶。於是使人盡請疏儒。則皆如前言。從叔父終始持重於輕發文諭者。幸或有周旋之人。得回深處之意。然目今無見前道理。遂許之。乃出通草。買來紙本。以再明日定會爲發文計。元一去時。以見婦禮。納二兩錢於疏廳。是午以其錢辦酒餠以供。仲賢出見吳校理。接待酬酌。頗勝檜桃兩處。而言當乘間備告。而乘間未易。不可以定日云。似實情耳。聞自廟堂議定院制。賜額院假屬。無過二十名。私設則無許一名。卿宰墓奴無一名。大院君之言曰。如此則私設院不撤而自撤云云。蓋畿湖間所謂書院。無蓄財建設之時。則收聚本家。或守令助力以成。如西湖而來後奉享之道。只以假屬幾百名收貢錢爲用。故都知嶺南亦用此例。其言如是。謂無假屬。則無貢錢。只自廢享自撤去。還可笑呵。然以其所近所知之地。則無恠其生憎於書院。而懲羹吹薤多見其不廣也。午後見河陽衙書。承安信。可喜。忙修數字以答送。居昌金基洙臥病四五日。夕時往診。稍擧頭。而形神僅免死而已。見甚悶念。然下鄕志士畢竟所見不得出其套。蓋庭科後仍留京。疏行上來。每來見相從甚好。到科前旬餘不見來。問之。則隨右試官下去。竟得初試。又上來。徒步凡二千里。其何能不病耶。還可憎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