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 01권 > 1864년 > 8월 >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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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4년 8월 27일 / 高宗 1 / 甲子
날 씨 맑다.
내 용
중현(仲賢)이 또 어제 만나지 못한 곳으로 나갔다. 대저 근래 여러 유생들이 모두 조바심이 생겨 모두 본손이 직접 심처(深處)에 가보기를 원했다. 소유(疏儒) 모모가 일제히 남촌(南村)으로 나가 조속히 결정하자는 계획으로 약속했다. 나는 나이가 어리고 노성(老成)들의 말을 거부하고 어기고 싶지 않아 두에서 조용히 앉아 들었다. 소수를 모시고 있어 그를 보위해야 했기 때문에 도(道)가 아닌 말을 할 수 없었고 종숙부도 굳세지 않아 엄중히 배척할 수 없었으며, 본손 또한 결정하지 못했다. 여러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하며 언론의 마당에 고아한 가락에 눈을 감고 마음으로 가리키는 것이 대사(大事)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고향 집에서 독서하는 말이지 어찌 올라와서 일을 경영하는 말이 되겠는가. 비록 멋대로 명명하여 공격하지는 못하더라도 숨어 돌아갈 곳이 있는 듯이 하니 두려워할 만한 것을 새삼 알겠다. 여러 유생들이 종일 이와 같이 와서 의논하고 파했다. 그러나 여러 건의 일은 종숙부가 비록 굳건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내 생각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오늘 파하고 돌아가더라도 한 번 더 입에 올릴 수 없는 일임을 분명 알 것이니, 여러 사람의 말은 행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녁에 중현이 들어왔다. 강난형(姜蘭馨)만 보았는데, 강(姜)이 병산서원의 일이 근래 또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있는데, 어찌 또 이러한 일로 격노하게 하는가하며 운운했다고 했다. 대저 다른 사람에게 듣건대, 대원둔은 반드시 서원을 훼철하려고 하나 온 조정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고, 물정(物情)이 매우 흉흉하여 부득이 그만 두기는 했으나 서원이란 글자에 곧바로 격노를 일으키니 하상(河上) 본손이 매일 문안한다고 하더라도 병산서원의 일 때문에 감히 여쭈지 못할 것이데,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근실(謹悉)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먼저 태학에 통분을 보내어 근실(謹悉)을 청하고 동정을 살피면 첨의(僉議)가 분면 대원군의 탐지(探知)하려 할 것이니 향후에 하는 것도 알 수 없을 뿐이나 그러나 일에 있어서 대의(大義)와는 무관한 것은 장자(長者)들의 처결을 따를 뿐입니다. 들으니 의성(義城)의 관마(官馬)가 그 영(令)을 맞이하기 위해 왔다. 회시(會試)를 보았기 때문에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었다. 빈 말을 빌리는 값이 매우 헐했다. 권천경(權天經)이 다병(多病)하여 겨울철보다 힘들었다. 마음은 보낼 것을 권해보려 했으나 본인 생각이 어떻든 간에 거취(去就)를 함께 하였기 때문에 일원(一元)이 그 말을 타고 갈 계획이었다.
어두워진 후에 임천(臨川)의 심부름꾼이 와서 평안하다는 집안 편지를 받았고 겹옷이 올라 왔는데 가을을 지내는 도구로 삼을 만했다. 그러나 거의 반년을 한양에 머무르면서 이러한 나의 모습이 바로 잘못 한양에 들어와 머무는 자들과 동행하며 마음이 다르니 매우 우습고 탄식이 났다.
감시(監試)의 회과(會科)는 처음 들으니 대원군이 분배하며 이르기를 영남에 20인은 너무 과하고 15인은 너무 작은 듯 하다고 하니 바야흐로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일전 거둥 뒤에 대원군이 궐내로 들어가자, 대전이 묻기를 "어제 거둥 때 유사(儒士)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하니, 대원군이 "동당의 유생과 회시(會試)의 유사들 중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라고 했다. 임금이 "그렇다면 관이 헤지고 옷이 더러운 모습들은 모두 분명 멀리 밖에서 온 선비들인가?"라고 하니, 대원군이 그렇다고 했다.
임금이 "그렇다면 동당의 방목은 모두 판관, 참봉 등 관(官)이 있는 사람들인데 어떠한가? 먼 고향에 온 선비들이 모두 들지 못했으니 어찌 가련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대원군이 "고례(古例)로 동당시(東堂試)는 가문과 지역으로 가려 뽑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고 하자 임금이 "그렇다면 진사시(進士試)와 회시(會試)는 모두 멀리서 온 유사(儒士)들에게 주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여 대원군은 부득이 "매우 좋습니다"라고 답하고 나왔다. 비로소 만약 감회(感回: 정성에 감동하여 마음을 돌림)의 뜻이 있다면 공모모의 계획을 쓰려고 했으나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하니 한스러웠다. 대원군으로 하여금 이러한 좋은 실마리를 계기로 그 마음을 개도(開導)하여 제선왕(齊宣王)이 소를 본 것처럼 하게 한다면 그 효과가 어찌 한 마리 생선을 요리하는 것에 그치뿐이겠는가. 통탄할 만 했다.
단성(丹城)의 진사 양주여(梁周汝)란 자가 그 아들을 데리고 들어와 모퉁이 방에 거처했는데, 그 아들은 동몽(童蒙)으로 나이는 겨우 15세였으나 그 모습이 절묘하였다. 그 안상(安詳:성정이 편안하고 자상함)하고 침묵한 것을 보니 참으로 가르칠 만한 아이로 귀여웠다. 또 성취가 빨라 시권(試券)을 능히 혼자 쓸 수 있다고 하니 더욱 기특했다. 이목(吏目)은 집안의 돼지와 개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런 아이들을 매번 만나 볼 수 없을 따름이었다. 충청감사가 물고(物故)를 당해 민치구(閔致九)로 대신 삼았다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신억(辛檍)이 서원(西原) 현감으로 그 임지에 나아가 도백(道伯)을 배알했다고 하는데 대원군의 매부였기 때문이었다. 김병학(金炳學)이 또 이판(吏判)에 제수되었는데, 대저 전동(典洞)이 비록 세도(世道)에는 간여할 수 없었으나 대원군에게 10여년 전부터 돈과 곡식을 안배해 들였는데, 낳아준 공이 있다고 할 만하니 대원군이 평소 전동은 잊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고 김병국(金炳國)은 훈장(訓將)으로 누차 체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한 것은 모두 보덕(報德)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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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二十七日。
晴。仲賢又出去昨日未遇處。大抵近日諸儒皆生躁念。咸欲本孫直往見深處。疏儒某某齊出南村。期於從速決落之計。余不欲以年少折拂老成之言。只從後默坐以聽。所挾者疏首。故私以尊衛之不可非道言之。而從叔父不武。不能嚴斥。本孫亦無定執諸人。似已知之。故言論之際。隱目指意如高調。何用於爲大事。及若然則讀書於鄕家之說。何爲上來營事之言。雖不專名攻之。而似有隱歸處。還覺可畏耳。諸儒終日來議如是而罷。然數件事從叔父雖不武。而必不許。吾見則雖今日罷歸。斷知不可一再上口之事。諸言似不得見售耳。夕時仲賢入來。只見姜蘭馨。姜言屛山事近又有不成之慮。何可更以此事激之耶云云。蓋自他人聞之。則大院君必欲毁撤書院。而滿朝所見。無一合同。物情大忷。故不得已自止。而於書院字。輒生激怒。故雖河上本孫之日問安者。不敢以屛山事仰問。如何云。若然則謹悉似無可得之路。奈何。吾意則爲先發文太學。請謹悉以觀動靜。而僉議必欲探知大院君之意。向後爲之。亦不可知耳。然事之無關於大義者。只從長者處決耳。聞義城官馬爲邀其令來。方觀會試。故有順歸。空馬貰甚歇。權天經多病。難於寒節。念意欲勸送。而自家意欲成否。間同去就。故一元爲乘去其馬計耳。昏後臨川伻來到。得家書平安。袷衣上來。可作過秋之具。然運來幾半歲留京。是某貌樣。直與誤入京留者。同行異情。甚笑嘆。監試會科初聞大院君分排而云。嶺南二十人則太過。十五人則似小。方未知如何矣。日前擧動後。大院君入闕內。自大殿問。昨日擧動時。儒士何其多也。大院君曰。觀東堂儒及會儒留在者也。上曰。然則其冠弊衣垢之狀。皆必是遠外士也。大院君然矣。上曰。然則東堂榜目皆判官參奉有官之人。何也。遐鄕遠來之士皆不入。豈非可憐乎。大院君曰。東堂試自古例以門地取選。故如是矣。上曰。然則進士會試皆給遠儒。如何。大院君不得已仰答甚好而出。始若有感回之意。欲用公■之計。而姑未快決云。可恨。若使大院君因此善端。開導其心。如齊王之見牛。則其效豈止於一鮮治而已耶。可痛可痛。丹城梁進士周汝者率其子。入者來處隅室。而其子童蒙年僅十五。而貌相絶妙。見其安詳沈黙。誠可敎之孺子可愛。且成就早成。試券能自筆云。尤奇。耳目習於家間豚犬。故此等兒每不遇見耳。錦伯物故。代閔致九爲之云。後聞辛檍以西原縣監【卽靑爲降革】卽其地拜道伯。以大院君妹夫故也。金炳學又拜吏判。蓋典洞雖不得干預世道。而於大院君自十餘年前進排錢谷。可謂有生出之功。故大院君恒言典洞則難忘云。而金炳國訓將屢請遞不許。皆是報德云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