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 01권 > 1864년 > 8월 >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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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4년 8월 15일 / 高宗 1 / 甲子
내 용
새벽에 일어나 산허리에 올라갔다. 길은 왼쪽으로 통했고 서쪽 성 밖을 바라보니 임금이 지나는 큰 길은 등불과 횃불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은 땅 위의 은하수였다. 동쪽이 막 밝아오자 전진(前陳)이 비로소 나오고 대오가 연이어지고 위의(威儀)와 범백(凡百)이 모두 전보다 갑절이나 뛰어나다고 하니 이는 대원군의 호방하고 날카로운 기상의 도움인 것 같았다. 대원군이 평교(平轎)를 타자 위솔(衛率) 삼사백 명이 대오를 이루어 앞에서 갔다. 이재면(李載冕, 1845~1912) 적서(嫡庶) 형제는 군복을 입었는데 중대에 소속되어 갔다. 대전(大殿)은 백립(白笠)과 백의(白衣)를 입고 …… 산 아래에 도착하여 옥교(玉橋, 가마)로 갈아타고 산을 올랐다. 전군(前軍)은 앉은걸음이라 할 만하고, 후군은 높게 메어 균형을 맞추는 것이 마치 그릇에 담긴 물을 조심히 삼가는 모양 같으니 이는 한 걸음을 걷는데 마음이 한 걸음에 있는 것이니 뒤따르는 경재(卿宰)들로 하여금 이 마음을 능히 사용하여 국가(國家)를 부지(扶持)하게 한다면 어떤 험난함에 근심을 하겠는가!
교창(轎窓)이 활짝 열려서 임금의 얼굴이 지척에 있어 우러러 매우 자세하게 보았다. 어린 나이에 옥처럼 아름다운 얼굴은 사랑스럽고 끌어당기고자 하는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것을 억누르기 어려우니 천성은 속이지 않는다는 말을 더욱 믿을 뿐이다. 후진이 모두 떠난 후에 길이 비로소 열렸다. 마침내 동행과 함께 산을 내려갔다. 국과 밥을 사서 요기를 하고 모두 가까운 곳에서 종일 놀다가 다시 환궁하는 위의를 보고자 하였는데, 나는 힘들고 지쳐 감당이 되지 않았고 또한 한번 본 것으로 만족하니 다시 무엇을 볼 것이 있겠는가! 종군(從君)과 함께 먼저 들어왔다.
오후에 종숙부(從叔父)는 행차에서 돌아와 수차례 설사를 하였는데 이는 두 끼를 신도미(新稻米)로 올린 해로움 때문이니 고민되고 염려되었다.
들어와서 왼쪽 길에서 임금의 거둥하는 위의를 보았는데 이때 승교(乘轎, 가마)의 휘장이 아래로 내려와서 임금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 한스러움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군관(軍官) 한 사람을 보았는데 말에서 떨어져 목이 꺾여 짚으로 싼 시체를 길옆에 둔 모양을 보니 참혹하고 측은하여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앉아서 듣는데도 몸에 소름이 돋고자 하였다.
조순가(趙舜歌)[조병훈(趙秉薰)])는 또 격금(擊金)을 하고자 오후에 연조문(延詔門, 서울 서대문 밖에 있던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문) 밖으로 나갔는데 한스러움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그 뒤를 볼 수 있겠는가!
……가 보러 와서 말을 들으니 외종(外從) 임형(林馨)은 향해(鄕解, 향시)를 참방했고, …… 좌방(左榜)은 얻을 길이 없다고 하니 울적하고 탄식함이 그치지 않았다.
임금의 거둥을 구경할 적에 경기감영 문루(門樓) 위를 보니 사방에 쌍희자(雙喜字)가 써진 주렴이 드리워져 있고, 처마 끝에는 흰색포에 푸른색 가선이 그려진 휘장이 걸려있는 것이 마치 푸른 하늘의 교자(轎子)와 같았다.
듣기로 대원군의 부인(大院夫人)과 여러 고부 모녀(姑婦母女)와 연사 내행(緣査內行)이 구경을 하기 위해 나왔다고 하니 발안에서 마음껏 보려는 마음인 것 같으니 그 영화로움과 기쁨을 알만 하였다. 듣기로 궁으로 돌아가 적에 이 누각에서 수라(水羅)를 받았다고 하니, 영화로운 이바지의 뜻이 되는 것 같을 뿐이다.
조득림(趙得林)서자[조관섭(趙寬燮)]가 끝내 옥중에서 죽었는데 모두 죗값이 적합하다고 하였다. 대개 대원군이 국사(國事)를 맡은 뒤로 죽인 자가 이미 수천 명이 넘었는데 모두 대원군의 죄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근래에 평안도(平安道), 전라도(全羅道) 모 읍(邑)의 아전 10여명은 이방의 청탁편지를 얻으려고 한양에 와서 엎드리던 자들로 대원군이 그것을 알고 아울러 옥에 가두고 그들을 죽였다. 이후에 읍의 아전들은 청탁편지의 길이 막혀 감히 한양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또한 이것은 할 만한 정치이나 사람을 죽이는데 너무 어려움이 없고 너무 수가 많으니 미덕이 아니다.
대원군 스스로도 사사로운 행동을 면하지 못하면서 혹 읍재(邑宰)에게 부탁받은 일에 있어서는 다른 길을 막으려는 뜻에 불과하니 어찌 영원히 시폐(時弊)를 개혁하겠는가! 시절을 위해 근심되고 탄식되었다.
경기감사(京畿監司)가 대원군의 내행(內行)에 제공한 것이 이천여 금(金)을 썼다고 하며 또한 아첨하는 습관이라 하였다. 듣기로 병조(兵曹)로부터 떨어져서 죽은 자들 …… 돈 백 량을 주고 그의 아들에게 후한 급료와 군에 차임 …… 그 원통한 죽음에 위로가 할 수 있겠는가!
원일(元一)중현(仲賢)은 날이 저물어도 들어오지 않아 막 염려가 될 즈음 중현은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들어 왔다. 또 원일은 연조문 안에서 잃어버렸으니 이와 같은 불민함으로 어떻게 야금(夜禁, 2경에서 5경까지 도성 내 대소 관민의 통행금지)을 능히 면하겠는가! 근심되고 탄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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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十五日。
曉起。上山腰。路左通望西城外。通街御路。燈炬錯雜。便是地上星海。東方才明。前陳始出。而連續作隊。威儀凡百。皆云比前倍勝。似是大院君豪銳有助耳。大院君乘平轎。衛率三四百作隊前去。李載冕嫡庶兄弟。具軍服。極侈至。在中隊次去。大殿。白笠白衣▣…▣【缺】。到山下。易乘玉橋上山。而前軍可謂坐行。後軍高荷平衡。如盤水小心愼之狀。正是一步。心在一步者。使從後卿宰能用此心。以扶持國家。則何患於艱險耶。轎窓洞開。咫尺天顔。仰瞻甚熟。幼沖玉貌。卽欲愛携之心。油然難禁。益信秉彛之不可誣耳。後陣盡去後。路始通。遂與同行下山。買羹飯饒飢。皆欲盤遊近地終日。更觀還宮威儀。而余則苦困不能堪。且一番瞻仰足矣。更有何觀。與從君先入來。午後從叔父還旆。而患泄數差。以兩時供新稻米之害。悶慮悶慮。入來路左觀擧動威儀。而時値乘轎下帳。未得見天顔。恨悵不已。而又見軍官一人。墜馬項折藁屍。路傍之狀。慘惻不忍云。坐聞亦欲身粟耳。趙舜■(欽)歌又欲擊金。午後出去延詔門外。恨不少遲。余何爲見其後耳。▣…▣【缺】來見。承聞外從林馨參鄕解▣…▣【缺】。而左榜無可得之路。鬱嘆無已。觀擧動時。見畿營門樓上。四垂雙喜字珠廉。簷端揭靑緣白布帳。如轎子靑天。聞是大院夫人諸姑婦母女及緣査內行。爲觀玩次出來云。想其簾內從觀之心。其榮喜可知。聞還宮時。受水羅於此樓云。似爲榮供之意耳。聞趙得林之庶子。竟死於獄中。皆云合罪。盖大院君知國事後。所殺人已過千數。而皆■(皆)無非其罪者。如近來平安全羅某邑吏十餘人。要得吏房請簡。來伏京中者。大院君知之。幷收囚死之。此後。則邑吏請簡路塞。不敢入京云。亦是可爲之政。然殺人太無難太多數。非美德。且自家。則又不免行私。或有付托於邑宰之事。而不過禁塞他門之意。豈能永革時弊耶。爲時悶嘆。京畿監司支供大院君內行。費二千餘金云。亦係求媚之習耳。聞自兵曹賜墜死輩▣…▣錢百兩。給其子厚料軍差▣…▣【缺】。可慰其寃死耶。元一仲賢。至暮不入來。方慮念之際。仲賢夜深後。僅得入來。而又失元一於門內。以若不敏。何能免夜禁耶。慮嘆。

주석

위솔(衛率) : 조선시대 세자익위사에 소속된 종6품 관직. 이재면(李載冕) :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다. 뒤에 이희(李熹)로 개명하였다. 흥선대원군과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의 장남으로, 고종의 형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문루(門樓) : 문 위에 세운 높은 집(다락). 대개 성과 같이 큰 문이 있는 건물에는 일종의 초소에 해당하는 문루가 있어 이곳에서 성 밖을 멀리 관찰하곤 했다. 조득림(趙得林) : 1800∼?. 자는 덕경(德卿), 본관은 양주(楊州), 제만(濟晩)의 아들이다. 1831년 진사로서 식년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837년 부교리를 지냈다. 철종 사후에는 국장도감(國葬都監)에서 표석음기서사관(表石陰記書寫官)을 맡았고, 고종 즉위 후 공조판서·이조판서·한성부판윤·홍문관제학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실록편찬에도 참가하였다. 1866년에는 예문관제학으로 고종이 대사면령을 내렸을 때 반포한 교문을 제술하였고, 이해 형조판서 및 공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조관섭(趙寬燮) : 황해도 옹진 여러 섬에서 중국과 밀무역을 한 김정련 등의 처벌에 대해 묻는 우변포도청의 계 『승정원일기』 고종1년 갑자(1864, 8, 1), 해방(海防)의 금령을 어긴 김순원 등을 엄히 형신하고 원악도에 정배하라는 대왕대비전의 전교 『승정원일기』 고종1년 갑자(1864, 8, 10), 죄인 김순원 등을 엄히 형신한 뒤에 배소를 전라도 강진현 등으로 정하여 압송하겠다는 형조의 계 『승정원일기』 고종1년 갑자(1864, 8, 11)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