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 01권 > 1864년 > 7월 > 30일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리스트로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9+KSM-WM.1864.4717-20170630.010310200005
URL
복사
복사하기

상세내용

상세내용 리스트
날 짜 1864년 7월 30일 / 高宗 1 / 甲子
내 용
듣기에 밤과 새벽에 이미 시험장 문으로 들어가 보니 과장(科場)의 반이 이미 가득 찼다고 했다. 늦게 비로소 젊은이들이 들어가 순흥 골천 접(順興骨川接)에 좁은 자리라도 내 줄 것을 간청하여 얻었으니 매우 중요한 자리였고, 또 호평 접(虎坪接)과 이웃하고 있다고 들으니 다행할만했다. 식후에 (듣기에) 반촌(泮村)에서 어제 잡히지 않은 외작(外作)한 자들 모두 염문(廉問)에 걸려 잡혀갔고, …… 위태롭고 두려웠으며, 또 듣기에 염찰하는 자들이 과장 안팎으로 무수히 들어와 시관들이 벌벌 떨며 시험지를 평가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른바 1소를 넘어 온 자들은 모두 손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하니 우스울만했다. 이전에 분주히 다닌 고생은 고사하고 어젯밤 십리 상간의 길을 잠도 못자고 왕래했던 것이 모두 헛된 수고로 돌아갔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잡고 웃게 할 뿐이었다.
평비(平碑)에 또 걸린 글이 있었는데, "(다음달) 2일로 도화서(圖畫署)에서 대회(大會)를 정했으니, 만일 한 사람이라도 불참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나라의 신하가 아니다."는 등 운운했다. 대개 서인(西人)들의 흉악하고 완악함은 비할 데가 없는데, 대원군(大院君)의 위엄이 굳건하지 않아 이번에 다시 일어난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일전에 정배(定配)와 정거(停擧)의 벌을 쉽게 풀어주어 미온하게 보였기 때문일 뿐이니 탄식할만했다.
근래 반중(泮中)에 기이한 호칭이 있었는데, 이휘병(李彙炳)은 ‘정전(井田)에 관한 상소’ 때문에 별명이 ‘이정전(李井田)’이 되었고, 배상현(裵相顯)은 ‘구감도(龜鑑圖)’ 때문에 별명이 ‘배거복(裵居卜)’이 되었으며, 박주운(朴周雲)은 ‘과규(科規)로 서책의 수협(搜挾)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에 관한 상소 때문에 ‘박수협(朴搜挾)’이라 이르면서, 방내외(坊內外)로 전하며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고 했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 취한 것이지만 반중의 풍속 또한 그 경박함을 볼 수 있으니 탄식하고 탄식했다. 식후에 소호(蘇湖) 어른이 보러 왔는데, 어젯밤 1시소(試所)로 들어 온 이후 처음 면대하는 것이다. 크게 무안한 기색이 있었는데, 종숙부께서 간략한 말로 그를 꾸짖자 말이 떨어진 즉시 후회됨을 알고 스스로 망신이라고 했다고 하니, 이것이 부끄러움이 됨을 아는 것 또한 치욕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자랑하는 무리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고 또 노성(老成)한 자 일 뿐이니 우습고 우습다.
저녁을 먹은 뒤 듣기에 형조(刑曹)로 이송된 외작(外作) 죄인들을 아울러 방송(放送)하고 그들을 내일 과장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또한 관대한 은전인지라 다행할만했다. 듣기에 …… 난(亂)으로 매우 위태하여 젊은이들이 들어갔다가 깊은 밤에 나왔다고 하니 염려되어 편히 잘 수 없었다.

이미지

원문

三十日。
聞於晨夜已入門。半場已滿。晩後始聞少輩入去。懇得小地於順興骨川接。甚要地。且隣虎坪接。可幸。食後頖村昨日未及盡捕之外作者。皆入廉問捉去而▣…▣危懍。且聞廉察無數入場內外。試官戰慄。不能考文云。所謂一所越來者。皆束手無爲云。可笑。前此奔走之勞姑舍。昨夜不寐往來於十里間路。皆歸虛勞。令人捧腹耳。平碑又有揭文。以初二日定大會於圖署。若有一人不來參者。非我國之臣子云云。大抵西人之凶頑無比。而大院君之威嚴不能固。今此更起。似是日前輕解配停之爲示弱耳。可嘆。近有頖中奇號。李彙炳以井田疏。而名爲李井田。裵相顯以龜鑑圖。而名爲裵居卜。朴周雲以科規嚴搜挾疏。而謂之朴搜挾。傳笑坊內外云。盖是其輩之自取。然頖風亦可見其輕薄。嘆嘆。食後湖丈來見。昨日夜一所入來後初面。大有無顔之色。從叔父略說責之。言下知悔。自謂亡身云。知此爲愧。亦是不易視冒恥自誇輩。又是老成耳。呵呵。夕後聞移刑曹外作罪人。幷放出。使入明日場中。亦寬典。可幸。聞▣…▣【缺】亂甚危。少輩入去。夜深出來。慮念不可安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