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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64.4717-20170630.0103102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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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4년 6월 23일 / 高宗 1 / 甲子
날 씨 맑다.
내 용
생원(生員) 정춘엽(鄭春燁)이 문안을 왔다. 조순가(趙舜歌)[조병훈(趙秉薰)]가 와서 말하기를 "조금 전에 이조 판서 김병학(金炳學)의 집에 갔는데, 알현하러온 어떤 무인[武弁]을 보았는데, ‘아침 상간에 대원군의 분부를 가지고 서협문(西夾門) 내 소청(疏廳)으로 가서 전했으니, 도화서(圖畫署)의 모임을 그 곳에서 옮겨 시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원군께서 분부한 내용은 ‘만약 과연 의리(義理) 상 그만둘 수 없다면 어찌 당초에 관작을 회복시켜줄 때 한 마디 말을 내어 막지 않고 십 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런 소동을 일으키는가. 이것은 영은부원군(永隱府院君)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불과하다. 너희들이 스스로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충신(忠臣)이라 생각한다면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마음대로 그렇게 하니 내가 또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었으며 대원군이 또 ‘각 도(道)의 계수주인(界首主人)인에게 분부하기를 만약 소청의 일로 수령에게 돈을 거두는 일이 있으면 너희들을 먼저 형벌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습니다. 저들이(계수주인) 몸 둘 바를 몰라 편리전(便利錢) 5냥을 내여 겨우 급한 빚을 갚았습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순가가 직접 들은 것이니 남은 경계가 없겠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대원군의 은혜를 유림이 감사해야 할 뿐이다. 더위를 견디지 못하여 젊은이와 동료들과 동협문(東夾門)에서 잠시 바람을 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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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二十三日。
晴。鄭生員春燁來問。趙舜歌來言。俄往吏判金炳學家。見有一武弁來謁云。於朝間。以大院君分付。往傳于西夾門內疏廳。盖圖畵署會移設於其處故也。大院君之言曰。若果義理之不可已。則何不於當初復官爵之時。出一言以遏。而今乃於十餘年後。爲此紛騷也。不過以永隱府院君之棄世而然。汝輩自以謂仁顯王后之忠臣。則吾其爲何如人也。任意爲之。吾亦有可爲之道云云。會中可謂戰恐。而大院君又分付各道界首主人。若有疏廳事。收斂守令錢之事。則汝等爲先刑治云云。彼輩不得措手。出便利錢五兩。僅報其急債云。此等舜歌之親聞者。可無餘戒耶。若然則大院君之恩。儒林可感耳。不堪暑。少輩與儕類。暫風于東夾門。

주석

조병훈(趙秉薰) : 1822~1903. 자는 순가(舜可)이다. 영은부원군(永隱府院君) : 김문근(金汶根, 1801~1863). 본관 안동. 자 노부(魯夫). 시호 충순(忠純). 철종의 장인. 1841년(헌종 7) 음보로 가감역(假監役)이 된 뒤 현감을 지냈다. 1851년(철종 2) 딸이 왕비로 책봉되자,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었다. 금위대장 ·총융사 ·훈련대장 등의 요직을 맡아 제2차 안동김씨 세도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돈령부영사에 이르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몸이 비대하여 포물부원군(包物府院君)이라는 별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