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 01권 > 1864년 > 5월 >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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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64.4717-20170630.0103102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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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4년 5월 15일 / 高宗 1 / 甲子
내 용
도회(道會) 때에 모인 향도(鄕道)의 유생들이 백여 명이었다. 다음날 강무당(講武堂)에서 개좌하여 공사원으로 유학(幼學) 권연하(權璉夏), 김수익(金壽翼)을, 조사(曹司)로 최명곤(崔命坤), 김태림(金泰林), 이유기(李有基)를 의망하여 선출했다. 공사원이 자리에 나온 뒤로 자리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두 문충(文忠) 선생을 배향하는 사당에 아직 사액(賜額)의 은전을 입지 못했으니 크게는 유림의 억울한 것이었는데, 이제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이미 지난 가을에 은허(恩許)를 받아 액(額)을 받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임천(臨川)도 의당 같은 처지에 있는데도 유독 은전의 내림을 받지 못했으니 어찌 우리 당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지금 모인 것은 장차 유생들을 보내어 임금께 상달하는 일인데, 유림의 대사에 이보다 더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각기 소견을 다하여 진퇴(進退)의 가부(可否)의 기회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모두들 말하기를 "이번 일이 오늘날까지 계완(稽緩)된 것은 이미 우리들이 불민(不敏)한 죄인데 하물며 이런 때에 대론(大論)이 결정된 마당에 어찌 가부(可否)의 할 말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병산(屛山)의 유생과 진사 류효목(柳孝睦)이하 6, 7인이 좌중에 나와 말하기를 "이번 큰일에 누가 감히 이론을 내겠습니까마는 이번의 병산 서원에 선액(宣額)하는 일은 이미 원호(院號)를 비망(備望)하여 입계(入啓)하는 때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사액(賜額)을 맞이하는 날이 이달 8일에 있기로 했는데, 일전에 한양 소식을 보니 입계(入啓)한 뒤로 보류 중에 있어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조정의 처분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이번에 다시 원액(院額)의 일로 외람되어 범한다면 혹 이미 허락받은 병산서원에 해가되는 일이 없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들의 소견으로는 가을이나 겨울 혹은 내년 봄을 기다려 병산서원의 일이 어떻게 하회(下回)하는지 살피는 것이 양측에 마땅할 것 같은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였다. 좌중의 의론은 "이 말이 무리한 것은 아니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 각 도 서원의 결총(結總: 전결의 총계)과 보액(保額: 인원수)을 상세히 보고하는 일을 보면, 조령(朝令)이 매우 엄격한데다 전문(傳聞)에 따르면 사액서원 이외에는 모두 훼철한다는 의론이 있다고 합니다만 이는 미연(未然)의 일이고 믿을 수 없으나 병산서원은 이미 선조(先朝)에서 이뤄진 명이고, 비록 약간의 곡절이 있어 잠시 반포되어 내려오지 않았을지라도 이루어지지 않을 이치가 만무합니다. 임천서원은 한 마디 상달(上達)함도 없이 가을과 겨울을 앉아 기다리다가 만약 결총(結總)과 보액(保額)이 보쇄(報刷)된 뒤에 병산서원의 액호가 내려지고 곧바로 사설(私設) 서원을 훼철하라는 명이 있게 되면, 임천서원은 장차 훼철을 면할 여지가 없으니 어찌 감히 청액하는 바람이 일어나겠습니까. 이와 같다면 유독 임천서원만이 곤경에 처하는 것만 아니라 또한 병산서원도 혐한(嫌恨)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임천의 소(疏) 때문에 병산서원이 해를 입을까하는 우려는 분명 지나친 우려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러한 우려가 있다면 우리들도 병산서원의 후생이 아닙니까. 어찌 감히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류효목(柳孝睦)이 이르기를 "저희들도 감히 질언(質言)하지 않습니다만 저희들로서는 더불어 일할 수가 없으니 명첩(名帖)에 등록하지 말아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좌중에서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번 일의 계획에 이론을 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일전에 귀문(貴門)이 제소(製疏) 망기를 물리친 것을 저희들은 이미 의아스럽게 느끼고 있었는데 귀측이 매사에 생트집을 잡으니 실로 개탄스럽습니다."라고 하자 병산서원의 유생들이 일시에 나갔다.
그러나 대사(大事)가 이미 펼쳐졌고 한 쪽의 방해로 갑자기 정지할 수 없어 이내 소수(疏首)로 류○○, 이재흠(李在欽), 이만우(李晩遇)를 의망하여 내고, 조사(曹司)로 하여금 좌중에 권점(圈點)하게 하여 류○○로 비준하였다. 조사가 자리에 나올 것을 청하자 소수가 극구 사양했으나 좌중에서 극구 청하여 자리로 나왔다. 서로 읍례를 행하고 여러 임무를 파정했다. 그러나 쇠잔한 서원의 물력으로 소록(疏錄)에 상경(上京)하는 유생들을 초출(抄出)하는 것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산(芝山), 박곡(朴谷), 호상(湖上), 귀호(龜湖)의 소초(疏草)가 들어와 본손(本孫)에게 봉하여 부쳤다. 제사통(製寫通)을 뽑아 이달 27일로 순흥(順興)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도회를 여는 것으로 정하고 발문하여 두루 고지했다. 소(疏)의 자료를 각처에 나누어 부치고 파했다.

이미지

원문

五月
十五日。
道會時。鄕道儒會者。百餘員。翼日開座于講武堂。望出公事員。幼學權璉夏金壽翼。曹司崔命坤金泰林李有基。公事員出座後。言于座曰。兩文忠先生尊享之祠。尙未蒙賜額之典。大爲儒林之抑鬱。今幸屛山已於昨秋。得蒙恩許。延額指日。臨川宜在一例之地。而獨不見於恩典之下。豈非吾黨之責耶。今此齊會。蓋將爲治送儒生。上達天聽之擧。則儒林大事。孰有加於此哉。幸各盡所見。以爲可否進退之地。如何。僉曰。此擧之至今稽緩。已是吾輩不敏之罪。況於此際。大論已定。其何有可否之可言也。屛山儒生進士柳孝睦以下六七人。出言于座曰。今此大擧。孰■(事)敢有異論。而第今屛山宣額之事。已至院號備望入啓之境。故所以定延額之日。在今八日。而日前見京信入啓後留中不下。莫知其由云。朝家處分。未知如何。此際更以院額事干瀆。或無害於已蒙許之屛院未可知鄙等之見。稍待秋冬或明春。以觀屛山事。下回之如何。則似兩得其宜。未知何如。座中僉議以爲此言非爲無理。而實不然。見今方以各道書院結總保額。詳悉報上事。朝令甚嚴。且傳聞以額院外。幷有毁撤之議云。此則未然之事。雖不可信。而屛山則是先朝已成之命。雖緣些少曲節。姑未頒下。而萬無不成之理。臨川則無一言上達。而坐待秋冬。若於結額報刷之後。勘下屛院額號。而卽有私設毁撤之令。則臨川其將免毁之不暇。何敢生請額之望耶。如是則非獨臨川之向隅。抑非屛山之所慊恨者耶。以臨川之疏。而屛山被害之慮。萬萬是過計之憂。若有一分是慮。則吾等獨非屛山後生耶。豈敢作此擧也。柳孝睦曰。生等。亦不敢質言。然生等。則不可與共事。勿以名帖入錄。如何。座中曰。若然。則不過是立異於此事之計。日前貴門之製疏退望也。生等已訝感矣。貴邊之每事生梗。實所慨然。屛山儒生。一時出去。而大事旣張。不可以一邊乖沮遽自停止。乃望出疏首柳○○李在欽李晩遇。使曹司收圈点於座。柳○○爲準。曹司請出座。疏首固讓。而座中固請。乃出座。行相揖禮。因爬定諸任。而殘院物力。不可不觀抄出上京儒生數十員在疏錄。芝山朴谷湖上龜湖疏草入來。封付本孫。出製寫通。以是月二十七日。定發行道會於順興紹修書院。發文輪告。分送疏資於各處而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