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 01권 > 1864년 > 6월 >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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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64.4717-20170630.0103102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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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4년 6월 7일 / 高宗 1 / 甲子
날 씨 맑다.
내 용
일찍 출발하여 사평진(沙坪津)에 도착했다. 오랜 비 끝에 한수(漢水)가 불어 넘쳐 이에 세 척의 배로 나누어 탔다. 사공이 뱃삯을 매우 간절하게 하였는데, 비록 매우 놀랐지만 무사히 건너는 데에 급급하여 각기 1전씩 지급했다. 다 건너고 나서 강기슭에 내려 정각(亭閣)으로 올라갔다. 불어난 강물을 굽어보니 시야 가득 물이 넘실대었다. 비 올 조짐이 있어 조금도 쉬지 못하고 곧바로 출발하여 말을 재촉하여 도성으로 들어갔다. 막 여관에 도착하니 또 비가 쏟아 붓듯 내렸다. 이날은 20리를 갔다.
반촌(泮村)에 들어간 이후 소청(疏廳)이 아직 설치되기 전이어서 소수(疏首) 이하의 인원은 형편상 장차 각기 개인적으로 주인가(主人家)를 마련해 지내면서 매일 소수에게 문후를 드려야 할 뿐이었다. 그러나 소수 어른의 옛 주인가는 빈곤이 심하여 음식 등을 받들어 제공할 길이 없었기에 결국 호상(湖上)측 여관으로 옮겨 소색(疏色)과 함께 거처하고 두 직일(直日)이 모시며 처리할 계획을 했다. 대개 길을 출발한지 13일 만에 도성에 들어왔는데, 죽령을 넘은 이후 약 9일 동안 비가오지 않은 날이 없고 병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소수 어른의 노쇠한 기력은 도리어 젊은이들 보다 나았고, 진흙탕 길에 말을 타고 가는 것을 잘 견뎌 여독이 더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일행의 경사가 이보다 큰 점이 없다. 대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러한 점에서 예측되는 것인가?
오후에 승지(承旨) 이만운(李晩運)이 문안 왔다. 별제(別提) 류치윤(柳致潤), 승지 이휘준(李彙濬), 판사(判事) 박제연(朴齊淵), 진사(進士) 안행준(安行準), 진사 이만기(李晩起), 대아(大雅) 이중건(李中建), 대아 이이재(李伊在), 대아 이심재(李深在)이염재(李念在), 대아 황재익(黃在翼), 생원(生員) 이수영(李秀榮)이교영(李敎榮), 대아 조병훈(趙秉薰), 교리(校理) 이계로(李啓魯), 교리 강하규(姜夏奎), 정언(正言) 강기(姜{金+耆}), 정언 권노연(權魯淵), 진사 강문영(姜文永), 대아 이대재(李大在), 진사 권익화(權益和), 대아 김억수(金億銖), 석사(碩士) 홍기서(洪起瑞)홍기혁(洪起赫)이 문안 왔다. 그들 모두 청액상소하는 일은 시의(時宜)를 헤아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개 근세의 습속은 선현, 선조를 현창하는 일을 막론하고 무릇 일을 경영할 때 반드시 먼저 주선하여 간곡히 구하여 이루어질 만한 길을 보게 된 이후에 비로소 유림의 의론을 빌려 그것을 꾸미니, 이미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되었다. 이번 우리의 거사는 본래 기회를 타서 가능하다고 여길 때 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만 시골 산야 선비의 우활한 견해로 봤을 때 지금 새 조정의 초기가 유학을 높이고 문(文)을 숭상하는 치세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유림의 억울했던 소원을 행여 상소로 목소리를 내는 날에 신구(伸救)될 수 있을 것이므로 이에 감히 서로 인솔하여 온 것이니 믿는 점은 공의(公議)일 뿐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태학(太學)은 해상(海上)의 일로 한 번 시끄러운 이후에 장의(掌議)가 자리를 비워 근실(謹悉)을 얻을 만한 길이 없음을 잘 알게 되었고, 또 병산(屛山)의 유생들은 관직자나 유생이나 할 것 없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말을 펼치면서 백방으로 막아서고 장난질하니, 한양에서 공론을 가질 만 한 친구들은 모두 방해를 당해 입을 열 뜻이 없었다. 각 도의 서원 등에 전결(田結) 총수와 부리는 인원을 보고하라는 조정의 명 또한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알 수 없어 우선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다만 머리만 맞대며 기다리니, 요컨대 이는 사문(斯文)의 운수에 관계된 것이기에 어찌 성공의 여부를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장의가 나온 이후를 기다려 태학에 통유(通諭)하여 근실을 청해 복합(伏閤)할 계획이지만 이 또한 기약이 없으니 답답할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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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七日。
晴。早發。到沙坪津。積雨餘。漢水漲溢。乃分乘三船。梢工索船價甚懇。雖極可駭。而急於利涉。各給一戔。旣濟。登江岸上亭閣。俯臨漲江。極目浩襄。而有雨意。未能少憩。仍發促鞭入城。才到館。又雨下如注。是日行二十里。入泮後。疏廳未設前。疏首以下。勢將各居私主。而日候疏首而已。而疏首丈舊主人貧甚。無以供奉。遂移于湖上館。而與疏色同居。兩直日爲侍處計。盖自發程十三日入城。踰嶺以後凡九日。無日不雨。無人不病。而疏首丈衰老氣力。還勝少年。能堪泥路鞍馬。未見添憊。一行之慶。孰大於是。大事順成。可卜於此耶。午後李承旨晩運來問。柳別提致潤李承旨彙濬朴判事齊淵安進士行準李進士晩起李大雅中建李大雅伊在李大雅深在念在黃大雅在翼李生員秀榮敎榮趙大雅秉薰李校理啓魯姜校理夏奎姜正言{金+耆}權正言魯淵姜進士文永李大雅大在權進士益和金大雅億銖洪碩士起瑞起赫來問。而皆言疏事似不量時宜。蓋近世習俗。勿論爲賢爲先。凡營事。必先周旋懇求。見可成之路而後。始借儒論。以文之者。已成難醫之痼矣。今番之擧。本不出於乘機見可之計。而只山野迂見。以爲新政之初崇儒右文之治。若是其可觀。則儒林抑鬱之願。或可以見伸於呼籲之日。故敢此相率而來者。所恃者公議也。來見太學以海上事。一番擾端後。掌議虛位。謹悉無可得之路。且屛山儒生。無搢紳章甫。四遊宣言。沮戱百端。京中知舊之可有公論者。幷被阻撞。無意開口。各道結摠。保額之令。又未知如何究竟。姑無所於事。只聚首以待。而要之是關係斯文之運。豈人力所可能。以成否之也。第俟掌議出後。通諭太學。爲請謹悉伏閤之計。而此亦無期。可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