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 01권 > 1864년 > 10월 >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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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4년 10월 9일 / 高宗 1 / 甲子
날 씨 맑다.
내 용
아침에 아픈 증세가 조금 줄어들었다. 끝내는 오한이 와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을 수 없었다. 이불을 끌어안고 조섭할 계획으로 삼았는데 많은 사람이 오고가서 매우 편하지 못할 뿐이었다.
양동(良洞) 반장(泮長)이 일전에 들어와 오늘 대원군을 만나러 가서 마침 조용한 때를 만나 먼저 "병산(屛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라고 말했다. 대원군이 곧 손을 저으면서 "나는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인해서 반장이 말하기를 "영남 소유들이 반년이나 넘도록 와서 머무르니, 매우 걱정스럽고 답답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원군이 "어느 소유(疏儒)인가?"라고 하니, 반장이 임천(臨川) 김학봉(金鶴峯)[김성일(金誠一)] 서원을 사액하는 일이라고 답하였다. 대원군이 "이 유생은 곧 나도 들어 알기 때문에 아무 문관에게 전언하여 내려가게 하였는데 끝내 가지 않았는가?"라고 하였다.
반장이 말하기를, "영남의 일은 기호의 한 읍의 한 유생이 제멋대로 처단하여 스스로 세운 것과는 다릅니다. 이번 상소의 일은 70개 고을의 선비들이 널리 모여 의논을 도모하여 행장을 꾸려 유생을 보낸 것입니다. 어찌 일한 것도 없이 내려갈 수 있습니까? 반드시 복합하고 가려하는 것이지, 대개 반드시 이미 내려진 명령을 받고 물러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다만 한 장의 상소를 올리는데 유림들의 정성을 편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원군이 말하기를, "지금 이 동조(東朝)에서 서원의 일로 이같이 진노한 나머지에 어찌 감히 갑자기 소를 올리는가? 영감이 그들에게 권하여 보내라."라고 하자, 반장이 말하기를, "소유가 어찌 소인의 한 마디로 물러나 돌아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원군이 말하기를, "막 한 나라 주교(主敎, 성균관 대사성)의 지위가 되어 다른 도의 유림의 일을 모두 주장할 수 있는데, 하물며 본도의 유생에게 있어서랴?"라고 하자, 반장이 말하기를, "영남의 유론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원군이 말하기를, "내 말을 그에게 전하여 유생들이 내 말을 듣고 시행한다면 나는 또한 유생들의 말을 받아들일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가 조금 뒤에 또 다시 이와 같이 말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영남에 대해서 소홀하게 대접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보아 이 어른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은 어떤 뜻에 인연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 말은 남긴 뜻이 없지는 않았다. 뒷날에 또 그가 말을 공손히 내는 모습이 문오 령(文五令)과 함께 수작하는 때와는 크게 다르니, 혹 우리를 돌아보고 생각하는 길이 없지 않아서인가? 그러나 요컨대 반드시 그 세운 바를 이루려고 한 것이지만 이번은 대원군이 마음을 돌릴 가망이 없으니, 근심스러웠다.
마땅히 가까운 시기에 거두어 돌아가야 할 것이지만 반장의 말에 "며칠 사이에 또 다시 그 뜻을 탐지하여 대원군에게 유생 몇 사람을 초청하게 하여 얼굴을 보고 물러나 보내기를 권하게 할 테니까, 뒷날의 말을 기다린 후에 마치고 돌아갈 계획을 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뜻은 이것을 바꿀 수 없고 또한 혹 초청하는 일이 있으면, 소수는 물론이고 비록 소수 이하 유생들이 세도(世道)에 빨리 나아가더라도 앉아서 부르는 아래에는 선비의 몸으로 자중하는 도리가 아니니, 대략 뜻을 보인 것일 뿐이다. 원진(元振) 형과 여러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이는 곧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이다. 반장과 함께 상의하려고 내가 편지로 소유들이 가지 않는 뜻을 알렸기 때문에 앞의 말로써 답을 받고 나오는 것이 뒷날 청탁을 처리할 바탕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들의 뜻과 또 어떻게 여길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반장이 이르기를, "다른 수작도 또한 장황합니다."라고 하니 말이 과거의 일에 미치자, 대원군이 말하기를, "영남의 급제자 두 사람의 명단이 내려갔네."라고 하자, 반장이 "경술년에는 일곱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인이 보기에 두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원군이 말하기를, "욕심이 크네. 김석보(金奭輔)는 곧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이 갑자년에 화를 당했다고 들었기 때문에 내가 서글피 여겨 그를 들였고, 장원상(張原相)은 또한 이 공론이 마땅히 해야 할 자였기 때문이네."라고 하였다. 내일 방이 나오는데, 기한에 앞서 알았으니, 시험에 낙방한 자들은 더욱 방을 기다린 뒤에 그것을 알 필요가 없으니, 우스울 뿐이다. 소청이 파하고 돌아가는 것은 보름과 20일 사이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내 생각에는 형께서 머물러 거취를 같이한다면 곧 늙은이의 다리에 힘을 펼 도리가 있을 만하지만 행자가 더 들어가서 하루라도 머물지 않으려고 하니 답답하고 서글프다. 어제 계맹(繼孟) 형을 보았는데, 가볍게 돌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거듭거듭 지시하였다. 요사이 일의 기미의 연유를 모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멀어서 서로 연락을 하며 의론을 받들 길이 없어서 갑자기 스스로 돌아갈까 또한 매우 편하지 않으나 복합하지 못함을 분명히 알았으니, 부질없이 머무르게 되면 일에 대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편지 가운데 근실을 얻어 복합하는 말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 또한 근래에 격식으로 되어 있는 관례가 없었다고 하였다. 모두 이 향곡(鄕曲, 시골의 구석진 곳)에서 근심하고 답답해하는 것은 문제를 제기하는 말일 뿐이지만 또한 시행할 수 없는 것은 탄식할만하고 두렵다.
원진(元振)이술(而述) 어른이 광주(廣州)에서 성묘하는 일로 나갔고, 중현(仲賢)은 오 교리(吳校理)를 보기 위해서 또 나갔다가 왔다. 오 형(吳兄)의 말에 "내 입으로 이르러 이 일이 대원군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그 영화로움은 좋은 벼슬일 뿐만 아닙니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과 더불어 그 범범한 말을 함께 하지 않은 것은 조용히 문답하는 겨를을 얻고자 한 것인데, 괴롭게도 겨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괴로운 상황이 많지만 잠시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대개 그 정성스러운 마음은 나를 위하는 것이니,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돌아가기를 결정하지 못했는데, 요컨대 이 공도 대원군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울 뿐이다. 그러나 대원군이 말은 뒷날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오 형의 말 또한 믿을 만하지만 어떤 사람이 이재원(李載元)의 말을 전하기를, "우리 대감이 애석해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조정의 처분을 갑자기 스스로 당신 손으로 그것을 행해야하는데, 돌아서 곧바로 청액 상소를 허락하는 것은 실로 조정의 이목을 돌아봐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근래 여러 방면에서 대원군의 뜻을 탐지하고 청하는 것에 대해서 모두 온화한 얼굴과 근심스런 말로 답하는 것은 이재원이 하는 말과 꼭 맞다. 비록 이번에 허사로 돌아갔지만 혹 뒷날의 이력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병산(屛山)은 모두 액자(額字) 사고에 대해서 화가 생겼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곧 우리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하였는데, 요사이의 내부 사정과 같다면 임천이 도리어 병산의 해를 입은 듯 하나 확실한 견해는 아니니 어떨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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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九日。
晴。朝痛勢少減。終是忤寒。不能巾櫛。擁衾爲調攝之計。多人往來。極是難便耳。良洞泮長日前入來。今日往見大院君。適値從容先言屛山如何。院君卽搖手曰。吾不知吾不知。因言嶺南疏儒經半年來留。極爲悶鬱。院君曰。何疏儒。答以臨川金鶴峯院額事也。院君曰。此儒生則吾亦聞知。故於某文官傳言。使下去。終不去耶。泮長曰。嶺南事。異於畿湖之一邑一儒之擅斷自立。今番疏事。七十州章甫之廣聚謀議。治送儒生者也。豈可無所事而下去耶。必欲伏閤而去。蓋非欲必受成命而退。成否在天。只展儒林之誠於一封上達而後。已也。院君曰。今此東朝以書院事。如是震怒之餘。豈敢遽爾上疏耶。令監勸之送也。泮長曰。疏儒豈以小人一言而退歸耶。院君曰。方爲一國主敎之位。他道儒林事。皆可主張。況本道儒生耶。泮長曰。嶺南儒論則不如是矣。院君曰。以吾言傳之。儒生聽施吾言。吾亦有聽儒生之言之時。小頃又更言如是曰。吾於嶺南。不恝然待接云云。大氏〖氐〗此丈終始固執。未知緣何意思。然其言不無餘意。於日後且其遜出辭語之狀。與文五令酬酢時大異。或不無眷念之道耶。然要之必欲勝其所立。今番則無可望其回聽。可悶。所當從近捲歸。而泮長之言。數日間又更探其意。而欲使院君招請儒生數人。面勸退送。以待後日之言然後。爲罷去計云云。吾意此是不易。且或有招請之事。疏首則勿論。雖疏下儒生趨進於世道。坐招之下。非士身自重之道。略示意而已。爲元振兄諸人打非。然此則斷不可爲。欲與泮長相議。爲自家書告以疏儒終不去之意。以前言受答出來。爲後日執請之資。似好。而未知諸意又以爲如何耳。泮長云。他酬酢亦張皇。語及科事。院君曰。嶺南及弟二名下去矣。泮長曰。庚戌年則七人爲之。小人所見則二人太小矣。院君曰。欲心則壯矣。金奭輔則聞寒暄堂以甲子年當禍。故吾愴念而入之矣。張原相亦是公論之當爲者也云。明日爲出榜。而先期知之。落魄者尤不必待榜而後知之。可笑耳。疏廳罷歸。要不出望念間。吾意則兄主之留爲同去就。則老脚可有舒力之道。而行資加入。不欲留一日。悶悵悶悵。昨見繼孟兄。以不可輕歸之意。申申指示。而似不知此間近日事機之故。然遙遠未及相通奉議。而遽自罷歸。亦甚不安。而明知其不得伏閤。空爲留滯。何益於事耶。書中有無謹悉伏閤之言。而此亦近來無格例云。皆是鄕曲悶鬱所發之言耳。然亦不可施者。嘆悚嘆悚。元振及而述丈。以廣州掃墳事出去。仲賢爲見吳校理。又出去而來。吳兄之言謂以吾口。而此事有可回聽大院君。則其榮不啻好官。所以不與他人同其泛言。欲得從容答問之暇。而苦未得暇。雖苦狀之多。然不可不少俟云云。蓋其誠心爲我者。不可不聽其言。故未得決歸。而要之此公。亦難回聽耳。然院君之言意有後。吳兄亦可信。而或傳李載元之言曰。吾大監不無愛惜之念。而朝家處分。俄自當身手爲之。旋卽許額疏。實顧朝廷耳目云。蓋近日諸路探請。皆以和顔悶辭答之者。與此言相符。雖今番虛歸。或可爲日後履歷否。屛山都是生火於額字事故云。而渠輩則謂被吾邊之害。如近日裏面。則臨川還似被屛山之害。而非的見。何可知也。

주석

이재원(李載元) : 1831∼1891. 자는 순팔(舜八),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흥완군 정응(晸應)의 아들로 흥녕군 창응(昌應)에게 입양되었으며, 고종의 종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