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 01권 > 1864년 > 9월 >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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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64.4717-20170630.0103102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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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4년 9월 29일 / 高宗 1 / 甲子
내 용
중현(仲賢)이 또 밖으로 나갔다가 왔다. 오씨(吳氏), 이씨(李氏) 등 여러 집에서 모두 대원군(大院君)에게 고할 틈이 아직 없었다고 하니 고민되고 고민된다. 오후에 고양(高陽)으로 나갔으니 내일 전소(奠掃)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서쪽으로 향하여 바람을 거슬러 가니 이미 견디기 어려웠고, 또 저물녘이 되어서야 도착했으니 감기를 앓을까 염려되어 매우 두려울 뿐이다. 여관을 나갈 때 전해온 말이 있었는데, 다음 달 2일에 감제(柑製)가 설행된다고 하여 원진(元振) 형과 여러 사람들이 모두 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만일 감제가 있다면 결단코 저는 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기다려 양보하지 말기를 권할 것이니 형들은 부디 저를 염두에 두지 마십시오."라고 하여 한 바탕 웃고 갔다. 그러나 빠르게 진출할 기색이 없으니 도리어 스스로 한탄스러웠다.
해가 저물어 묘막(墓幕)에 들어가니 각처에서 모인 인원이 무릇 10여 인이었다. 양지(陽智)는 140리 거리이고, 음죽(陰竹)은 거의 300리였으며, 강화(江華)는 90리였는데도 5,60세의 노인들이 모두 도포를 지고 지팡이를 끌며 각기 행자도 가지고 왔으니, 영남 사람의 입장으로 그 광경을 보건대 크게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제수 마련도 다만 묘지기에게 맡기고 따로 살피지 않았지만 갖춘 물품이 깨끗하게 바쳐지니 그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였다. 대개 위토(位土) 답(畓) 32마지기와 전(田) 닷새갈이 분량은 그에게 맡겨 농사를 지었는데, 수확물을 지주와 소작인이 반으로 나누는 일도 없고 다만 1년에 한 봉사 조의 분량만 제공하게 한 것 외에는 따로 제공할 비용이 없었기 때문에 그 또한 명줄에 관계되어 행여 죄를 짓고 탈이 나지 않을까 두려워 이렇게 마음을 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먼 곳의 자손들보다 나은 점은 사랑스러울 만 할 뿐이다. 아침저녁으로 제공하는 음식도 매우 따뜻하여, 마침 반촌 여관에서 묽고 찬 음식만 먹던 뒤 끝에 한 번 포식하는 것 또한 조상의 은혜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집에 보낼 편지를 써서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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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二十九日。
仲賢又出外而■(還)來。吳李諸家。皆未有告言之隙於大院君云。悶悶。午後出去高陽。爲參明日奠掃。而向西溯風。已是難耐。又犯暮抵達。感疾可慮甚恐耳。出去時有傳言。以初二日設柑製。元振兄諸人皆欲止之。余謂若有柑第。■(數)斷吾自不去待人。勸禁讓與。兄輩幸勿以我爲念也。一笑而去。然其無進銳之氣。還自嘆恨。日昏入墓幕。各處會員凡十餘人。而陽智則一百四十里。陰竹則近三百里。江華則九十里。而五六十老皆負袍曳筇。各齎行資而來。以嶺中觀之。大是不可及處。辦需則只任墓直。而不別看檢。然備品潔供。極其誠敬。蓋位畓三十二斗落田五日耕。而任渠作農。無分半之事。只使供一年一祀外。無他供費。故渠亦爲命脈所關。而或恐罪頉。爲此盡心。然可愛其勝於遠地子孫耳。朝夕供又甚溫。適館中淡冷之餘。覺是一番飽食。亦是祖先之賜耳。修付家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