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임천청액일기(臨川請額日記) > 01권 > 1864년 > 9월 >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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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9+KSM-WM.1864.4717-20170630.0103102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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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4년 9월 10일 / 高宗 1 / 甲子
날 씨 비가 그대로 그치지 않다.
내 용
대가(大駕)가 일찍 거둥하여 남별궁(南別宮)에서 오랑캐 칙사에게 문후를 하러 갔다고 들었는데, 비록 이는 주객의 예이지만 변발한 오랑캐 사신 앞에 이 어찌 차마 할 일인가? 분하고 탄식할 뿐이다. 오후에 문오 령(文五令)이 비를 무릅쓰고 왔다. 남궁(南宮)으로 거둥할 때 지응(支應, 벼슬아치가 공무로 출장 갔을 때 그 소용되는 물품을 대어주는 것)하기 위해 나갔다가 돌아들어오는 길에 들러서 비를 피할 계획이었다. 앉아서 지칙(支勅, 중국의 사신이 올 때, 숙식 따위를 제공하여 접대하던 일)의 범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궐내로부터 상사(上使)와 부사(副使)에게 육시(六時)로 매 때마다 은으로 된 반과 상을 한 좌(座)씩 수공했는데, 하루에 나온 것이 합이 12상좌였다. 의례히 돌아오는 것이 없이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게 되니, 수삼일 쓴 것은 이미 그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 호조 창고 24칸에 쌓인 베와 비단과 백지가 가득하였는데, 다만 객 한사람만 왔다 갔다 한 것이 부칙(副勅)에게 지급하기 위한 것이고, 상칙(上勅)은 이보다 갑절이나 되니, 그 외에 별도로 요구하는 것 또한 예측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나라의 경비를 논하는데 칙사를 응대하는 것이 두 번째로 속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유가 있었다. 그가 부의로 가져온 것은 은잔 세 벌, 제병(祭甁) 한 좌, 향촉 몇 쌍, 전수(奠需) 차로 은 삼천 량 외에 다시 다른 물건은 없었다고 할 뿐이었다. 조문을 받을 때는 곧 공경으로부터 아래로는 파산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빈전 뜰아래로 들어가 곡을 한 뒤에 다시 다른 곳에서 옥책을 받는 예를 선포했으니, 의절은 어땠는지 알지 못할 뿐이었다.
하상(河上) 류 진사(柳進士)는 거재(居齋) 유생으로 이이술(李而述) 어른을 보고 정담을 나눴는데, 우천 태(愚川台)는 지난번 대원군을 보러 가서 병산서원에 관한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곧 대원군이 "어찌 조금도 기다리지 않는가?"라고 한 것은 연달아 일어날 상황을 염려함이 있는 듯하니 임천서원 소유들은 잠시 내려가는 것이 좋을 듯하였다. 이술 어른은 이미 왔는데, 어찌 한 일도 없이 내려갈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술 어른이 와서 그 말을 전하며 이는 필시 대원군도 임천서원 유생들이 연이어 머무는 일을 아는 것을 보인 것이니, 아마도 아울러 병산서원의 언론에 들어감을 알만하다. 만약 그렇다면 병산서원의 성사되고 성사되지 않음과 함께 혹 같이 돌아가는지? 병산서원은 결단코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이치인데, 곧 또 바람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어른이 대략 일을 헤아린 것인데 혹 잘못 본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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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十日。
雨仍不止。聞大駕早動。往候胡使於南別宮。雖是主客之禮。而偏髮胡兒之前。此豈忍爲之事耶。憤嘆耳。午後。文五令冒雨而來。以南宮擧動時。支應次。出去還入路歷訪。避雨計也。坐談支勅凡節。自闕內需供六時於上副。而每時銀盤床一座式。一日所出。合十二床座。例無還來。爲渠囊槖。數三日所費。已不知幾何。而戶曹庫二十四間。貯布綿紬及白紙充滿。只客一人往來者。爲給副勅次上勅倍於此。而其外別求索酬應。又不可豫料云。論國費應勅之居二者有以也。渠所賻來者。銀盃三事。祭甁一座。香燭幾雙。奠需次銀三千兩外。更無他件云耳。受弔時則自公卿下至罷散官。皆入哭於殯殿庭下後。更於他所宣受玉冊禮。而儀節未知如何耳。河上柳進士居齋者。見李而述丈謂情談。而愚川台向見大院君。問屛山事何以爲之。則大院郡所答。何不少俟云云者。似有慮繼發之狀。臨川疏儒暫爲下去。似好。而述丈曰。旣來矣。何可無所事而下去耶云云。述丈來傳其言曰。此必見大院君亦知臨院儒生留連之事。則其幷入於屛院言論可知。若然則與屛山成否或同歸耶。屛山斷無不成之理。則又不能無幸望云云。此丈略料事者。而或不誤見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