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가세잡기(家世雜記)1-안변종유록(安邊從遊錄) > 01권 > 1798년 > 3월 >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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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798년 3월 26일 / 正祖 22 / 戊午
내 용
막내숙부를 모시고 책실 여러 사람과 함께 석왕사(釋王寺) 길을 떠났다. 도호부 서루(西樓)를 나와 남대천(南大川) 판교(板橋)를 지났는데, 다리가 가로 뻗혀진 것이 수백 보 가량 되었으며, 완전하고 훌륭한 것이 화산(花山)의 호교(湖橋)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대야(大野)의 송추(松楸) 속에 들어가 십 여리를 가고 또 십 여리를 갔다. 남산 역관(南山驛館)을 지나 또 십 여리를 가서 단속문(斷俗門)에 이르렀다.
만산(萬山) 송추 안의 길 가운데에 문을 만들었으니,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또 등애문(登崖門)을 지나 또 불이문(不二門)을 지나니 바로 사교(蛇橋) 가의 하나의 큰 문이다. 조계문(曺溪門)을 들어가니 문은 기둥이 두 개인데 위에는 마치 기둥이 네 개인 각(閣)과 같다. 마치 연조문(延詔門)과 같지만 크고 작고 웅장함과 쇠잔함이 판이하게 다르다. 곧바로 범종각(泛鐘閣)에 올라 절의 터를 바라보니 평평하고 넓고 단정하고 오묘하며 절의 모양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한두 명의 승려가 나를 보러 왔지만 원당(願堂: 선왕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의 기세 때문에 승려의 습속이 매우 좋지 않아서 회양부사(淮陽府使)의 아들이 맞고 돌아갔다고 하니, 그 습속을 알만 하다. 대웅전(大雄殿)에 들어가 보니 금불(金佛) 9인과 나한(羅漢) 30여인이 있고, 불당의 높이는 수십 장 가량 되었으며 용단(龍段)과 문단(文段)이 위에서부터 곧바로 수백 척 드리웠으니 모두 궁중에서 내려 보냈다고 한다. 석왕사(釋王祠)에 들어가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의 영정을 보니, 신승(神僧)이 됨을 알 수 있다. 상하 삼사(三師)부터 승호(僧號)를 더하여 금과 비단으로 봉하고 상아로 꿰어 궤에 넣어 보관하고 칠을 해서 아름답게 했다. 석왕사의 동쪽에는 비각이 있으니 곧 삼조(三朝)의 어필이다. 삼조는 바로 태조(大祖), 숙종(肅宗), 지금 조정이다. 뒤에는 전서(篆書)를 쓴 것이 있는데 남학명(南鶴鳴)이 지은 것으로 크게 허탄한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금강산(金剛山)과 낙산(洛山)에서부터 와서 처음 보는 것이니, 기이할 만하다.
나한전(羅漢殿)에 들어가니, 전에는 나한 529인이 있었는데, 그 가부좌를 한 모습이 천태만상이었다. 어실(御室)에 들어가니 바로 어필을 봉안한 곳이었다. 금병풍이 사방으로 눈부시게 아름답고 가운데에는 하나의 궤가 봉안되어 있으니, 바로 여러 조정의 필적이 매우 많았지만 승려는 귀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내려가서 용비루(龍飛樓)에 올라가니 바로 태조가 보위에 오르기 전에 사냥을 하던 곳이었다. 쌓아서 당으로 만들었는데 명인들이 시를 지은 것이 많이 있었다. 당의 동쪽에는 비각이 있으니 바로 지금 조정의 어제친필로 무신년에 창건한 것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수많은 산이 둘러싸서 많은 소나무가 빽빽하고 계단 아래의 흰 돌에는 맑은 물이 흘러 굉연하게 소리가 울리니 아름다울 만하다. 돌아와서 멸적당(滅迹堂)에 누워 사적을 본 것을 찾아보니, 절은 바로 태조가 창립한 것이었다. 지금의 석왕사에서 어떤 승려가 벽곡(辟穀)을 하며 도를 닦았는데 태조가 꿈을 꾸고 그 승려에게 해몽을 하게 하니 …… 왕이 될 징조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절의 이름은 진실로 이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학성(鶴城) 관아에 돌아오니 해가 아직 몇 장 낚시대 위에 있었다. 원산(元山)으로부터 아버지의 평안하다는 소식을 얻었다. 또 답장을 써서 곧바로 향임에게 부쳤다. 좌수별감을 들어가서 만나니 모두 젊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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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廿六日。
陪季父主曁與册室諸人作釋王寺行。出都護府西樓。過南大川板橋。橋桓亘可數百步。完好不比花山湖橋也。入大野松楸中。行十餘里。又行十餘里。歷南山驛館。又行十餘里。抵斷俗門。萬山松楸中。路中作門。可知爲佛氏也。又過登崖門。又過不二門。卽蛇橋上一大門也。入曺溪門。門卽二柱而上如四柱閣也。如延詔門。而大小雄殘辦異也。直登泛鐘閣。望寺基平闊端妙。寺樣櫛比。一二僧來見。而以願堂之勢。僧習頗不佳。淮陽府使之子見打而歸云。其習可知也。入見大雄殿。金佛九人羅漢三十餘人。佛宇高可數十丈。以龍段文段自上直下數百尺。皆自宮內下送也云。入釋王祠。見指空懶翁無學影幀。可知爲神僧也。自上下三師加僧號。金帛封之。象牙簽之。樻而藏之。漆而美之也。祠之東有碑閣。卽三朝御筆也。三朝卽大祖肅宗今朝也。背有記篆。南鶴鳴所撰。不至大虛誕。自金剛山洛山而來初見也。可異也。入羅漢殿。殿有羅漢者五百二十九人也。其趺坐之像千態萬狀也。入御室。卽御筆所奉也。金屛四方爛然。中有安一樻。卽累朝筆迹甚多。僧不知爲貴也。下登龍飛樓。卽太祖微時射獵之所也。仍築而堂之。多有名人題詩。堂之東有碑閣。卽今朝御製親筆戊申所刱也。四顧千山抱圍。萬松森然。階下白石淸流。轟然爲聲。可嘉也。歸臥滅迹堂。索寺蹟觀之。寺卽大祖刱立也。卽今釋王之祠。有僧辟穀修道。大祖有夢。釋之於其僧。▣…▣(其)以爲王兆。故寺名諒以也。還到鶴城衙。日猶數丈竿也。自元山得父主平書。又修答。卽付鄕任。入見座首別監。皆靑髮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