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가세잡기(家世雜記)1-안변종유록(安邊從遊錄) > 01권 > 1798년 > 1월 >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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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798년 1월 15일 / 正祖 22 / 戊午
날 씨 바람 불고 춥다.
내 용
신랑은 음식상을 물렸다. 나는 유곡 형(酉谷兄)과 함께 돌아오다가 중간에 그와 헤어졌다. 낮에 동성(東城)에 도착했다. 눈이 발목을 잡아 소가 강을 건너는데 절뚝거려,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게 시키고자 했으나 매우 고생스럽다. 동문의 성 위에 태수(太守)와 영장(營將)이 장막을 설치하고, 동서부 백성들의 차전놀이를 보았다. 한 부의 총각은 함부로 행동했다. 40~50 무리가 벌거벗고 함성을 질렀는데, 오래했다. 일부가 물러나니, 바로 서부이다. 동부의 벌거벗은 무리는 승세를 타고 몰아부처, 태수 앞에서 승전고를 울렸다. 또 일시에 뒤쪽에서 박수치고 이겼다고 소리를 지르니, 가소로웠다. 영장은 서부장이다. 태수는 각을 불며 성에 들어갔다. 길가는 도중에 잠시 각이 멈추어 그것을 보았다.
많은 양반을 만났는데, 이들은 향중의 일 때문에 관아에 들어갔다. 또 어떤 사람은 법흥 이씨[法李]였는데, 동성에 이르러, 무고함을 당한 일로써 온 집안이 분개하여 모두 연달아 머물렀다. 대개 법흥 이씨의 서얼 귀래정(歸來亭) 태협(泰協) 등 5명은 동성에서 수십 년 동안 피고인을 욕하였는데, 이르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번에는 향교에서 통문을 내어 말하길, 이 직산(李稷山)씨가 모년에 영남에서 죄인을 사면했는데, 이것은 임금과 위를 기만한 것이니, 그 자손 가운데 누가 감히 청금록(靑衿錄)에 들겠으며, 누가 다시 장의(掌議)를 내겠는가. 이 때문에 노론배들이 향교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말을 지어 냈는데,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다. 교임(校任)에게 벌을 주어 말하길, "팔뚝을 자를 때는 마땅히 빨라야 하는데, 독(櫝)을 훼손한 것은 누구를 허물하랴."라고 했다.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사림들은 태사묘(太師廟)에 모여 곧 관에 정장을 올려 전교를 두 차례 내리게 할 계획이다. 동성은 관아와 감영에 정장을 올리고, 두려워 관아에 호소하려한다고 했다. 대개 직산(㮨山) 어른은 모년에 영남에서 교관을 내는데 차출되었는데, 여러 차례 해조(該曹)에 병으로 상소하여 초기(草記)를 논죄함에 이르러, 끝내는 감영 문 뒤쪽에 공문이 이르러, 곧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문을 잠그고 손님을 사양하고 또 이로써 취리(就理)를 당하고 원정한 후에 풀려났는데, 이것은 조보에서 나왔다고 하나 분별하기에 부족하다. 변변치 못한 일개 서얼의 망언으로 일의 장황함이 여기에 이르렀다. 그것을 말하려니 마음이 아프다. 평성(坪城)의 나쁜 소식을 전해 들으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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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十五日。
風寒。新郞退床。我與酉谷兄同歸。中路與酉谷兄別。午到東城。雪捉蹇牛渡江。欲使能職畫之。而其實可苦也。東門城上太守及營將設將幕。親東西部民車戰。一部總角無賴。四五十輩赤身起鬧。久之。一部却而退。乃西部也。東部赤身輩乘勝長驅。於太守之前鳴勝鼓。又一時拍手呼勝於後邊。亦可笑也。營將西部將也。乃無聊而退。太守吹角入城。路中暫住角觀之。多遇兩班。是則以鄕中事入府。而又或法李也。到東城。以被誣事。一室憤慲。盡難連留也。蓋法李庶孼歸來亭泰協等五人氏。東城累十年訟隻。詬辱無所不至。今乃發通於校中曰。李稷山氏某年頒赦嶺南。是欺君罔上。其子孫誰敢混入靑衿錄。而誰復出掌議也。以是老論輩屯聚校中。鎖門作辭。無所不至。付罰校任曰。斷腕當疾。毁櫝誰咎。其義不可曉也。士林會于太師廟。方呈官奉出兩度傳敎計。東城則方呈官呈營。又將裹足叫■閽云。蓋㮨山丈於某年差出嶺南頒敎官。而累次呈病該曹。則至有草記論罪。末乃到付營門後。卽爲歸家。杜門謝客。則又以是就理原情後蒙釋。則是出於朝報而不足卞也。以幺麽一庶孼之妄談。事之張皇至此。言之痛心。轉聞坪城惡報。夜不成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