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가세잡기(家世雜記)1-안변종유록(安邊從遊錄) > 01권 > 1798년 > 5월 >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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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798년 5월 2일 / 正祖 22 / 戊午
날 씨 맑다.
내 용
강원 도사(江原都事)는 함흥(咸興) 사람으로 성묘하는 일로 어제 정평(定平)에 들어왔다가 오늘 함흥으로 돌아갔다. 밥을 먹은 후에 수령과 함께 40리를 가서 초원(草原)에 도착하였다. 아버지께서 바로 들어가 찰방(察訪)을 만났고 나는 먼저 참사(站舍)에 도착하였다. 찰방 어르신이 만날 것을 요청한다는 말을 전해 들어 이 때문에 잠시 만났다. 관의 상황이 매우 냉락하니 괴로울 만 했다. 오랜 시간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가 나왔다. 점심을 먹은 후에 40리를 가서 영흥부(永興府)에 도착했다. 수령이 보러 와서 아버지께서는 들어가셨다.
문천 수령이 준원전(濬源殿) 단오 제사의 대축관(大祝官)일 때문에 또 본부에 들어왔다. 날이 아직 일러서 걸어가 군자루(君子樓)로 올라갔다. 루는 태조께서 즉위하기 전에 활을 쏘던 곳이다. 걸린 현판에 이르기를 ‘태조께서 유엽전(柳葉箭)을 20순(巡)을 쏘았는데 적중한 것이 96개요, 맞지 않은 것이 다만 4개 였다.’라 하니 그 무예의 신통함을 상상할 만하다. 앞 기둥에 서문을 쓴 현판이 걸려있는데 ‘산천문물은 남북 요충지를 짓누르며, 남녀가 의관은 풍패의 고향을 따른다. 태조 또한 잠시 영흥에서 지냈다. 이 때문에 본 궁에 영정을 안치했다.’라고 하였다. 함흥 본궁에는 태조께서 쓰신 활과 화살, 관복이 남아있다고 하였으나 보지 못하고 왔으니 안타깝다.
루 뒤쪽에는 쌍성관(雙城館)이 있으니 곧 객사이다. 그 웅장함과 확 트인 것이 참으로 노닐만한 곳이다. 반나절 노닐다가 또 자리를 옮겨 내려가서 육의정(六宜亭)으로 올라갔다. 곧 작은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었고 그곳에 정자를 지었다. 건너편도 있었으나 다리가 없어서 보지 못하고 객사로 돌아왔다. 아버지께서 본관에 들어가서 수령을 보았고 또 문천 수령을 만나고 왔다. 오늘 길에서 안변(安邊)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가진 자를 만났는데 서울에서 소호(蘇湖)의 편지를 받았다고 하였다. 아내의 병이 우선 안정되었고 친정 또한 평안하다고 하니 기쁨을 헤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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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二日。
晴。江原都事咸興之人。以掃墳事昨日入定平。今日歸咸興。食後與主倅步行四十里抵草原。父主直入見察訪。我先到站舍。察訪丈傳語要見。故暫入見。而官況甚冷落可苦也。移時陪父主出來。午飯後行四十里到永興府。主伯出見。父主入去。文川倅以濬源殿端午祭享大祝官又到本府矣。日尙早。故步出登君子樓。樓卽太祖微時射場之所也。揭板云。太祖射柳葉箭二十巡。中者九十六矢。不中者只四矢。可想其武藝通神也。前柱揭板書曰。山川文物鎭南北之雄關。士女衣冠依豊沛之古里。太祖亦暫居永興地。故有本宮■安影幀云。咸興本宮有太祖遺弓矢及冠服云。而未見而來。可恨。樓後有雙城館。卽客舍也。其雄偉爽豁。眞可遊處也。半日逍遙。又移下。登六宜亭。卽小塘中作島。仍亭焉。越邊亦有之而無橋棧。故不得入見。仍還旅舍。父主入本官。見府伯。又見文倅而來。今日路中見安邊問安持者。自京得蘇湖書。知室憂姑安。親庭問安。亦云平安。其喜不可量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