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가세잡기(家世雜記)1-안변종유록(安邊從遊錄) > 01권 > 1798년 > 4월 >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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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798년 4월 29일 / 正祖 22 / 戊午
날 씨 흐리다.
내 용
밥을 먹은 후 길을 떠났다. 40리를 가서 정평관(定平館)에 도착했다. 수령이 영문에서 활쏘기 시험 일로 무사를 거느리고 영문에 들어왔다. 임시숙소로 작청에서 정한 수청 기생 2명이 와서 시중들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 길을 떠났다. 고개 하나를 넘어 들판을 바라보니 한결같이 넓었다. 정평(定平)에서부터 함흥(咸興)까지 모두 이와 같았다. 50리를 가서 만세교(萬歲橋)에 도착했다. 다리의 길이는 수 천보이고 전부 완전히 나무로 만들었는데 인마가 다닐 때 은은한 소리가 났다. 다리 아래에는 강이 있었는데 깊어서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 없었고 강의 너비는 백여 걸음 정도였다. 강가에 낙민루(樂民樓)가 있었는데 바라보니 우뚝하여 마치 날아갈 것 같았다.
동문 안 포정사(布政司) 앞에 여관을 정하였다. 이윽고 아버지께서 의관을 갖추고 영문에 들어왔다. 나 또한 그 뒤를 따라서 흑대문(黑大門)에 들어갔다. 동쪽에서부터 올라가니 이른바 지락정(知樂亭)이 있었다. 수 백리 망망한 들이 눈앞에 있었고 만여호의 집이 무릎아래 벌려져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벽 위쪽에 우암(尤菴)[송시열]의 기문, 남구만(南九萬)의 시, 번암(樊岩)【채(蔡)】[채제공], 오사(五沙)【이정운(李鼎運)】, 학록(鶴麓)【이익운(李益運)】, 이집두(李集斗)의 시판이 있었다. 집 안에는 미소년과 건장한 자 6, 7명이 있었는데 모두 좋은 옷을 입고 활과 화살을 차고 함께 뜰 가장자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하자 서로 친해졌다. 함께 각지 명승지를 다녔으니 이 또한 우연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함흥(咸興) 사람으로 윤(尹), 도(都), 김(金) 세 개의 성이었다. 지낙정 오른쪽 아래에 선화당(宣化堂)이 있어서 이 친구들과 함께 내려갔다. 선화당이 허물어져 있어서 관찰사를 몰래 엿보았다. 막 무사시(武士試)에서 활 쏘는 일 때문에 각 읍 수령들이 함께 즐기고 있었고 아버지도 참석하여 앉아 계셨다. 함흥 무사들은 모두 재주가 뛰어나서 혹은 5발, 4발을 맞추었으며 3발을 맞춘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활쏘기를 마치고 중군(中軍)과 정평관리, 비장이 모두 활을 쏘았다. 선화당에 기녀들이 가득 있었고 모두 서서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이름을 부르고 과녁에 명중했음을 알렸다.
전에 듣기에 함경도 관찰사의 위의(威儀)와 범절(凡節)이 왕에 견줄 만 하다고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도리어 경상도 감영보다 못하였다. 작은 담 하나를 넘어 공자묘 터를 보니 매우 기이하였다. 향교 주산에서 수백 보를 올라가니 북쪽 성곽 위에 구천각(九天閣)이 있었고 구천각에서 성을 따라 수십 보를 가니 망양루(望洋樓)가 있었다. 건물들이 모두 북쪽으로는 끝이 없는 큰 들을 향하고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한 없이 넓고 끝이 없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쪽 정상에 큰 길과 같이 넓었고 그 가에 푸른 소나무가 있었는데 곧 태조대왕이 활을 쏘던 곳이었다. 아래로는 긴 강이 드넓었고 만 척(尺)의 무지개다리가 그 가에 뻗어있으니 이것이 곧 낙민루 아래 만세교다. 동쪽에 송추(松楸)는 국가의 능(陵)이고 남쪽의 송추는 태조 본궁(태조 오대조 신위를 제사지내는 곳)이다. 북쪽에 쓸어낸 듯한 큰 길이 있었는데 이는 회령(會寧), 종성(鍾城)으로 가는 곳이다. 동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또 길 하나가 있는데 이는 삼수(三水),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이다. 오랫동안 성위에 앉아 동서를 가리켰다.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해가 이미 서쪽으로 내려가서 어쩔 수 없이 여러 친구들과 산을 내려왔다.
성 북문 위에 집승정(集勝亭)과 봉화대가 있었다. 정자 위에 여러 친구들이 술자리를 만들고 갑자기 권하였는데 나는 술을 마실 수 없었으나 날이 춥고 정은 깊어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한 잔을 기울이고 겨우 성을 내려왔다. 관예(官隸)들이 탈 말을 가지고 좌우로 나를 찾고 있었다. 여러 친구들과 이별을 하였다. 말을 타고 집에 이르니 아버지께서 방금 돌아와 계셨다. 밤에 함흥 판관 김이수(金履綏)가 와서 아버지를 만났다. 안 낭청(安郞廳)도 왔다. 밤에 벼룩 때문에 부자가 모두 편안히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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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廿九日。
陰。食後發行。行四十里抵定平館。主倅以營門試射事。率武士入營門。下處定於値作廳。守廳妓二人來侍矣。午飯後發行。踰一嶺。望見原野大同。茫茫無際。自定平至咸興皆如是也。行五十里抵萬歲橋。橋橫亘可數千步。以全木作堂。人馬行隱隱有聲。橋下有川。深不過揭厲。而廣可百餘武也。江上有樂民之樓。望之巋然如飛出也。定旅舍於東門內布政司前。小頃。父主具冒帶入營門。我亦隨其後入黑大門。自東而上。有所謂知樂亭。數百里平郊茫茫在眼前。萬餘戶家舍羅列膝下。眞奇觀也。壁上有尤菴記。南九萬詩。樊岩【蔡】五沙【李鼎運】鶴麓【李益運】李集斗詩板。堂內有妙少年豪勒者六七人。皆着好衣佩弓矢。具俳佪庭畔。我先爲人事。仍與相好。與之同遊於各勝處。是亦不偶然也。其人皆咸興之人。而尹都金三姓也。知樂亭右邊下有宣化堂。與此友下去。因破屋窺見方伯。方以武士試射事。與各邑守令共樂。父主亦參坐。咸興武士皆妙才。或五中四中。而三中者不知其數也。射畢。中軍及定平及俾將皆射之。滿堂綠衣紅裳。皆起立作聲。蓋喚名報中鵠也。前聞北伯威儀凡節。依於王者云。今來見。却不如慶尙營門也。越一小墻觀孔子廟基。甚奇異也。自鄕校主山登上數百步。北郭城上有九天閣。自九天閣因城上行數十步。有望洋樓。皆北望大野一望無際。東望大海茫茫無涘涯。上有高頂。寬如垣途。蒼松處其上。是則大祖大王射場。下臨長江浩浩。萬尺虹橋橫亘其下。是則樂民樓下萬歲橋也。東邊松楸。是國陵也。南邊松楸。是大祖本宮云。自北有大路如掃。是入會寧鍾城之途也。小東而北又有一路。是則三水甲山之路也。移時坐城上指點東西。不欲離下而日已西矣。不得已與諸友下山。城北門上有集勝亭及烽燧臺。亭上諸友設酒盃頓勸。我不能飮酒。以日寒情深。不得已强傾一盃。纔下城。官隸以鞍馬左右搜索。仍與諸友別。上馬到舍。父主纔還來矣。夜興判金履綏出來見父主。安郞廳亦出來矣。夜以蚤蝎。父子皆不能穩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