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가세잡기(家世雜記)1-안변종유록(安邊從遊錄) > 01권 > 1798년 > 4월 >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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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798년 4월 27일 / 正祖 22 / 戊午
날 씨 아침에 일어나니 가랑비가 내리다.
내 용
늦게 식사를 한 후에 길을 떠나 40리를 가서 문천군(文川郡)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각 읍 10리마다 지로(指路), 나장(羅將) 한 쌍을 내어 출참하게 하고 지공(支供) 또한 읍참(邑站)과 같았다고 하였다. 향소(鄕所)로 들어가 문안을 하니 모두 소인이라 칭하였다. 대개 안변(安邊)은 예로부터 경상(卿相)이 왔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지나갔던 관로는 서로에 비해 더욱 좋았다. 나는 듯이 말이 달리니 혹 떨어지거나 넘어질까 두려웠다. 문천(文川)에서부터 길을 떠나 30리를 가서 사원장터[沙院場基]에 이르렀다. 벌판과 들이 수 천리가량 펼쳐져 말 위에서 멀리 바라보니 상쾌하였다. 마을 앞에 화주 2개가 있고 단청은 밝게 빛이 났으며 종(鍾)과 경(罄) 소리가 쟁쟁하였다. 문천(文川) 박 진사집(朴進士家)의 집이라고 하였다. 고원(高原)의 지로 등 한 쌍의 무리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또 20리를 가서 고원읍에 이르니 읍리가 자못 착실하니 덕원(德原)문천에 비해 웅장한 읍으로 생각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쉬(主倅)가 직령(直領)과 나막신[木靴]을 착용하고 보러 왔다. 대개 무인이기 때문에 이와 같았다. 음식을 대접 하는 여러 가지 절도는 다른 읍에 견주어 또한 특별하였다. 어린 기녀 2명으로 하여금 수청을 들게 했지만 저녁 후에 그들을 돌려보냈다. 밤에 주쉬가 또 보러 왔다. 또한 인사를 하며 체통을 갖추었다. 나와 함께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매우 단아한 사람이고 기사(己巳) 생인 사람인데 청춘 소년 같았다. 길옆에서 김을 매고 북을 돋운 자는 모두 끝으로 만든 전립(戰笠)과 개가죽 옷을 착용 하였고, 혹 유건(儒巾)을 착용하고 있으니 모두 추위 때문에 그러하였다.

이미지

원문

廿七日。
朝起微雨。晩食後。離發。行四十里。抵文川郡中火。各邑十里程。出指路羅將一雙。出站支供亦如邑站云。鄕所入見問安。皆稱小人。蓋安邊自古來卿相故然也。所經官路。比諸西路尤好。馬走如飛。或恐墜蹶也。自文川離發。行三十里。抵沙院場基。原野可數千里。馬上遙望爽豁也。村前有華柱二介。丹靑照耀。鍾罄錚錚。謂文川朴進士家也。高原指路等輩一雙已來待矣。又行二十里。抵高原邑。邑里頗着實。比之德原文川惟雄牧也。纔坐席。主倅以直領木靴來見。蓋武人故如是。支供等節比之他邑又自別。使小妓二人定守廳。而夕後使之還送。夜主倅又來見。又拜持禮面也。與我數言。甚是端雅人。而己巳生者。如靑春少年也。路傍耘耔者。皆着繩戰笠狗皮衣。或着儒巾。皆畏寒而然也。

주석

화주(華柱) : 요동(遼東)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도(道)를 배워서 학이 되었다. 나중에 요동에 돌아와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으니, 어떤 소년이 활을 들어 쏘려 하기에, 날아가면서 말하기를, “새야 새야 정령위야,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인제야 돌아왔구나. 성곽은 옛날 같다만 사람은 다르구나. 어째서 신선을 안 배우고 무덤들만 총총한고.”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