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소와공죽리관중건일기(笑窩公竹裏館重建日記) > 01권 > 1860년 > 0월 > 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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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8+KSM-WM.1860.4777-20160630.0632102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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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0년 0월 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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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리관 중건 일기 서문
죽리관은 우리 운악(雲嶽)[이함(李涵)] 선조이신, 증(贈) 참판공(參判公)께서 깃들어 사시면서 이름한 곳이다. 삼가 추념하건대, 참판공께서 인끈을 던지고 전원으로 돌아와 명리의 굴레에서 자취를 감추고 시(詩)와 예(禮)를 집안에 전하여 마침내 해동 문헌의 조종이 되었다. 규모는 검박(儉朴)하고 화치(華侈)하지 않아 이신양성(頥神養性)하고, 유한(幽閒)한 풍치가 있었다. 장경당(張敬堂)[장흥효(張興孝)], 김학봉(金鶴峯)[김성일(金誠一)] 등 제 선배들과 수창(酬唱)을 상고해보면 대강을 알 수 있다. 세대가 점차 혼미해지면서 훌륭하신 분들은 여전히 각처(各處)에 흩어져 계시니, 이 관(館)은 불행이도 중도에 폐해져 이미 백여 년이 되어 남아있는 것은 겨우 한 조각의 옛 터만 있을 뿐이다. 돌아가신 부형(父兄)들께서 매번 가리키며 탄식했었다. 지금에 이르러도 중건의 계획을 할 겨를이 없었으나 비로소 백원지세(白猿之歲)의 상원절(上元節)에 여러 종인(宗人)들이 건설을 도모하여, 지사(地師)가 땅을 살펴 온천정 유좌(酉坐) 임(壬)의 땅을 골라, 다시 새 터를 결정했다. 여러 친척들이 한 집안씩 임무를 담당하여, 각자 구관(句管)하게 하고 재물을 낼 방도를 짜게 했다. 읍중(邑中)의 신 리(申吏)의 집을 사서 철거하여 지었다.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서신으로 안부를 묻거나 직접 와서 묻고 칭찬하는 걸음이 이어졌다. 자손 된 자로서 더욱 감축됨을 이길 수 없다. 중수하는 규모를 생각건대 화려하게 고치면 선인의 뜻을 체득하지 못할까 두려워 옛 규모로 고쳐 만들었다. 서너 개월 안에 공사를 마쳤다. 여러 친족들의 불굴의 정성을 여기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친족들이 일제히 낙성(落成)한 뒤에 모여 각자 노정(奴丁)을 내어 정원과 담장을 만들었다. 대나무 뿌리를 캐어 사면에 둘러 심고 바깥 정면에는 백장미와 벽오동을 줄맞추어 심어 훗날 이 관(館)의 승경(勝景)을 삼고자 했다. 대나무를 심어 표상한 것은 선조께서 대나무 속의 그윽한 취향을 숭상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정(亭), 관(館), 원림(園林)은 고금이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 관(館)의 원림이 점차 문물의 부흥을 이룬다면 염계(濂溪)[주돈이(周敦頤)]의 서당, 회암(晦庵)[주희(朱熹)]의 고정(考亭)과 아름다움 명성을 나란히 할 것이다. 어찌 성도(成都)의 초당(草堂)처럼 한 때의 아름다움에 그치겠는가? 중추에 지례(知禮) 상사 김대진(金大鎭)의 기문을 벽 위에 판각하여 표저(表著)하는 바탕으로 삼았다. 천전(川前) 김진곤(金鎭坤)이 ‘죽리관(竹裏館)’이라 큰 글씨를 써서 판에 새겨 이 관(館)의 얼굴로 삼으니, 오호라! 성대하도다! 금고(今古)에 변하지 않을 것은 대나무와 관(館)이요, 금고(今古)에 없어지지 않을 것은 우리 선조(先祖)가 아니겠는가? 나는 재능이 없었으나, 외람되어 중수하는 임무를 맡아 한마디라도 사실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어, 당시 힘쓴 일들의 전말을 대략 기록하여 내세에 조상을 위한 일이 이와 같았음을 보여주고자 하노라.
경신년(庚申年) 황월(黃月), 하완(下浣)에 후손 학영(學榮)[이학영(李學榮)]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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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竹裏館重建日記序
竹裏館。卽我雲嶽先祖贈參判公棲息。命名之所也。竊伏念參判公之投紱歸園。斂跡名韁。以詩禮傳家。遂爲海東文獻之祖。其隨時行藏。甘隱肥遯。卜築是館。而當日寓趣之意。不啻若七賢之竹林。少蘇之筠軒。蓋其規模儉朴。不尙華侈。頤養幽閑之風致。考諸張敬堂金鶴峯諸先輩之酬唱。槪可見已。世代寢迷。雲仍散在各處。玆館之不幸中廢。已至百餘年之久。而所餘者。只是一片舊址而已。先父兄每指點興歎。迄今未遑其重建之計。始於白猿之歲上元節。諸宗人合謀設。而擇其地師相土于溫泉井西坐壬之地。更定新基。而與諸親排任一門。使之各自句管。兼爲措畫其出財之方。而買其邑中申吏屋子。撤來營建。遠近士友。或以書問。或以躬問贊賀踏至。凡爲子孫者。尤不勝感祝。竊念重修制度。改爲華麗。則恐非體先之志。故仍舊制修葺。而三四朔之間。工役告訖。其於諸親之殫心竭蹶之誠。於此可見矣。
周親齊員。咸會落成之後。各出奴丁。修築園墻。採取竹根。而四面匝種墻。外前面則白薔薇碧梧桐。成行列植。以爲日後。玆館之勝景。蓋種以竹表。想尙其先祖竹裏幽趣之意也。亭館園林之尙古今所同。而玆館之園林。漸成文物復興。則直與濂溪之書堂。晦庵之考亭。幷美齊聲。豈但如成都草堂。爲一時觀美已哉。迺於仲秋。以知禮金上舍岱鎭記文。板刻于壁上。以爲表著之資。以川前金鎭坤書竹裏館三大字。幷刻于板上以顔其館。於乎。盛矣。今古不變者。竹與館也。則今古不泯者。非我先祖也耶。余雖不佞。忝在重修之任。不可無一言記實。故略撮其時敦事顚末。以示來世爲先之事如此云爾。
庚申黃月下浣後孫學榮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