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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8+KSM-WM.1614.2726-20160630.065310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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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619년 3월 27일 / 光海11 / 己未
날 씨 종일 흐리다. 낮밤으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다.
내 용
어제 아침에 회를 뜨고 빙어를 조리하여 술안주로 내었다. 오랜 시간 술을 마시고 파하였다. 상사(上舍) 박회무(朴檜茂)가 고하고 돌아갔다. 초계(草溪) 수령이 묶음 종이와 부채를 심부름꾼으로 하여금 보내서 주었다. 종이 한 묶음과 부채 한 개를 나누어 주었다. 이때 서쪽의 소식이 매우 험악하였다. 명나라 군사 7만 명이 오랑캐의 유인책에 빠져 한 골짜기에 들어갔다가 매복에 걸려 궤멸당하고 양 경략(楊經略)은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 유정(劉綎)은 명장으로 앞서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말하고 두 아들과 헤어졌는데, 과연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 부수(副帥) 김경서(金景瑞) 모두 그들에게 투항하였고 김응하(金應河) 홀로 군수(郡守)로써 열장(列將)이 되었으나 일이 성공하지 못할 줄 알고 관동(官童)과 함께 검을 차고 활을 가지고 독산(獨山) 봉우리에 올라가 한그루의 버드나무에 의지하여 거의 수백의 적의 목을 베고 절의를 지키다 죽었다. 【화상록(畵像錄)에 자세히 보인다.】정오에 사직 인사를 하고 부내(府內)에 도착하였다. 희로(希魯)[손처약(孫處約)]는 이때 야인가(野人家)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잠시 쉬기를 청하며 맞이하기에 살피지 않고 들어갔다. 사마 제원(司馬諸員)이 한양소식 때문에 강신회(講信會)를 멈추고 술자리를 파하였다. 저물녘에 당으로 돌아와 선사에 배알 하였다.

이미지

원문

二十七日。
終陰。午夜雷雨。作朝斫鱠調氷魚進肴。酌酒移時而罷。朴上舍檜茂告歸。草溪倅紙束扇子傳使來呈。一束紙一柄扇。分與之。時西報甚惡。天兵七萬。爲虜所引誘。至一谷中。爲伏軍所陷沒。楊經略。僅以身免。劉名將先言其必敗。與二子訣。果不返。我國元帥姜弘立。副帥金景瑞皆降之。獨金應河。以郡守爲列將而入。知事不濟。與官童。佩劍持弓。上獨山峯。依一柳。斬級殺。幾至數百。而死於節。【詳見畵像錄。】卓午拜辭。到府內。希魯。時寓野人家。出邀暫憩。不察而入。司馬諸員。以西奇停講信會。暫罷設酒也。日暮還堂。謁先祠。

주석

양호(楊鎬, ?~1629): 명나라 하남(河南) 상구(商丘) 사람. 만력(萬曆) 8년(1580) 진사가 되어 남창(南昌)과 여현(蠡縣)의 지현(知縣)을 지냈다. 입조하여 어사(御史)가 되었다. 거듭 승진하여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가 되고, 25년(1597) 정유재란 때 경략조선군무사(經略朝鮮軍務使)가 되어 참전했다. 다음 해 울산에서 벌어진 도산성(島山城) 전투에서 크게 패해 병사 2만을 잃었다. 이를 승리로 보고했다가 탄로나 거의 죽을 뻔하다가 대신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파직되었다. 38년(1610) 요동(遼東)을 선무하는 일로 재기했지만 곧 사직하고 돌아갔다. 1618년 조정에서 그가 요동 방면의 지리를 잘 안다고 하여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 겸 첨도어사(僉都御史)로 임명해 요동을 경략하게 했다. 다음 해 사로(四路)의 군사들을 이끌고 후금(後金)을 공격했지만 대패하고, 두송(杜松)과 마림(馬林), 유정(劉綎) 삼로(三路)가 함락되고, 겨우 이여백(李如栢)의 군대만 남아 귀환했다. 투옥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유정(劉綎, ?~1619): 자 성오(省吾). 장시성[江西省] 출생. 무공을 쌓아 쓰촨부총병[四川副總兵]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원병 5천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배편으로 강화도를 거쳐 입국하였다. 전세를 확인한 뒤 돌아갔다가, 이듬해 제독한토관병어왜총병관(提督漢土官兵禦倭總兵官)이 되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도와주었다. 예교(曳橋)에서 왜군에게 패전, 왜군이 철병한 뒤 귀국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조선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後金) 군사와 싸운 부차(富車)싸움 때 전사하였다. 김응하(金應河): 조선의 무장. 자는 경의(景義),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안동(安東). 25세 때 무과에 급제, 병조 판서 박승종(朴承宗)에게 선발되어 선전관이 되었고, 뒤에 박승종이 호남 지방 관찰사로 내려갈 때 비장(裨將)으로 따라간다. 그 후 경원 판관(慶源判官), 삼수 군수(三水郡守)ㆍ북우후(北虞候)로 있으면서 국경 지대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건주위(建州衛)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명나라는 조선에 군사를 청하였다. 이에 김응하는 1619년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부하로 강을 건너, 명나라 장군 유정(劉偪)의 군사와 같이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종군하였다. 이때 전황이 어려워졌고 적병에게 포위되어 전사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명나라 황제가 요동백(遼東伯)을 봉하고 처자에게 은(銀)이 내려주었으며 조정에서도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독산(獨山): 양강도 삼지연군 보서로동자구 소재지의 서북쪽 흥계수로동자구와의 경계에 있는 산. 외따로 솟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