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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614년 4월 17일 / 光海 6 / 甲寅
날 씨 가물다.
내 용
이른 아침 들어가 선생을 뵈었다. 성주(城主)는 송학무(宋學懋)의 집에서 다시 왔다. 선생은 나와 함께 무과연(無過淵)으로 갔다. 학무, 이지영(李之英), 도성유(都聖兪) 무리 대여섯 사람이 따랐다. 이때 선생의 어려(漁廬)는 암벽의 틈에 자리했는데, 우리 모두가 벼랑에 기대어 수시로 멈춰 쉬면서 올랐고 선생은 순식간에 올라 내다보셨다. 학무가 가장 다리가 약해 간신히 걷고 있으니 선생은 그가 정력을 허비한다고 웃으실 뿐이었다. 구종(丘從, 하인) 등 인력을 빌려 돌을 날라 기초를 닦게 했는데 날이 저물고 공사를 멈췄다. 성산(星山) 유향소 별감(留鄕所別監)이 술을 올렸고 성주가 뒤이어 와서 3순배 마시고 그쳤다. 저보(邸報, 朝報)가 순사(巡使)에게서부터 왔는데, 경기(京畿)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고 봄에 비가 오지 않아 이달부터 4일간 남대문을 닫았다고 한다. 우상(右相) 정창연(鄭昌衍)정온(鄭蘊)을 신구(伸救)함에 매우 간절하고 지극했다고 하니 문익공(文翼公)의 손자라 이를 만하다. 성주의 말이 영가(永嘉) 제현들의 사적에 이르렀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퇴계(退溪)의 문인(門人)】과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은 처음엔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나 늦게는 서로가 반목하여 학봉은 백담의 상차(喪次)를 지나면서 절만 하고 곡은 하지 않고 갔다고 한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영상(領相)】 또한 월천(月川) 조목(趙穆)【퇴계의 고제(高弟)】과 끝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 지숙료(止宿寮)에서 묵었다.

이미지

원문

十七日。
旱。早朝入拜先生。城主自宋學懋家再來。先生與俱無過淵。學懋李之英都聖兪輩五六人從。時先生漁廬。基于巖隙。衆皆緣崖。亦時止憩而上。先生一瞬登眺。學懋最脚柔艱步。先生笑其費精。而也借丘從等。負石築基。日暮停役。星山鄕別監進酒。城主繼後三行而止。邸報自巡使來。京畿旱甚。春不雨。自月四日閉南大門。鄭右相【昌衍】伸救鄭蘊甚切至。可謂文翼公之孫矣。城主語及永嘉諸賢事迹。金鶴峯【誠一。退溪門生。】與具栢潭【鳳齡】初甚情密。而晩節相睽。鶴峯過柏潭喪次。拜而不哭而去。柳西厓【成龍。領相。】亦與月川【趙穆。退溪高弟。】終不得相愛云。宿止宿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