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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604년 4월 9일 / 宣祖37 / 甲辰
날 씨 새벽에 비가 내리다가 아침에 개다.
내 용
선사(先祠)에 배알했다. 송촌(松村)으로 향하다가, 송 공(宋公)【후경(後慶), 후창(後昌)의 아우다.】의 집 앞 길에서 머물렀는데, 희로(希魯)[손처약(孫處約)]가 사람을 전송하고 사람을 맞아들였는데, 바로 서행보(徐行甫)[서사원(徐思遠)], 장덕회(張德晦)[장현광(張顯光)], 장정보(張正甫), 최계승(崔季昇)[최현(崔晛)], 노홍중(盧洪重) 및 관자(冠者)와 동자(童子) 10여 명이 와서 송 공의 집 앞 단오정(端午亭)에 모였다. 이 또한 약속하지 않고 모인 것이라 할 만했다. 행보가 반궁(泮宮 , 성균관)의 통문을 보여주었는데, 주상께서 "이회재(李晦齋)[이언적(李彦迪)] 선생은 갑진(甲辰),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횡행 속에서 중류의 지주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간사한 무리에게 붙어서 녹훈에 이르렀다. 이 모(퇴계선생)가 비록 그를 지나치게 추존했지만, 문묘배향(文廟配享)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당시에도 비록 조금 구설이 있었으나【진사 서시웅(徐時雄)이 성균관에 있을 때 벗에게 편지를 부쳐 말하기를 "공신이 조정에 가득한데, 이기(李芑), 정순붕(鄭順鵬)이 가장 으뜸이다. 이언적(李彦迪)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 일을 경계했지만, 권벌(權橃)만은 홀로 항의하는 말을 했다."고 했다.】 선생의 심사는 해와 별 같았다. 그러나 간사한 논의가 주상을 기망하고 이미 총명을 가려서 성균관 유생의 소와 홍문(弘文)과 옥당(玉堂)의 차자(箚子)를 누차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도의 드러남과 가려짐이 여기에 관계되지 않겠는가. 참으로 우리 유자의 중요한 일이다. 저녁 무렵에 작별을 고하고 송촌으로 들어가 외종매(外從妹)의 관에 곡을 했다. 덕회와 함께 묵었다.

이미지

원문

九日。
曉雨朝霽。謁先祠。向松村。次宋公【後慶後昌之弟。】家前路。希魯送人迎入。乃徐行甫張德晦張正甫崔季昇盧洪重及冠童十餘人來會■(家)宋公家前端午亭矣。此亦可謂不期而會矣。行甫示泮宮通文。主上以李晦齋先生不能砥柱中流於辰巳士禍之橫流。反附奸黨。至於錄勳。李某【退溪先生】雖過爲推尊。不合配享文廟云云。當時雖小有言。【進士徐時雄在館。寄書友人曰。功臣滿朝。芑鵬爲最。迪戒仗馬。事淵撥〖橃〗獨抗義之語。】先生心事。有如日星。而邪議罔上。已蔽聰明。泮宮諸生之疏。弘文玉堂之箚。屢陳不允。道之顯晦。不係於此乎。眞吾儒之一大機關也。將夕告別。入松村。哭外從妹之柩。德晦同宿。

주석

1) 중류의 지주 : 지주중류(砥柱中流), 지주산(砥柱山)이 황하(黃河)의 급류 가운데에 있다는 뜻으로, 사람됨이 굳세고 강하여 위태로운 국면(局面)을 지탱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2) 화가 자기에게 미칠 일 : 장마는 임금의 의장마(儀仗馬)이다. 당(唐) 나라 때 권신(權臣) 이임보(李林甫)가 간관들이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협박하기를, “그대들은 입장(立仗)한 말을 보지 못하였는가. 소리만 지르면 쫓겨나는 법이다. 그대들도 내가 하는 일에 말썽을 부려서는 안 된다.” 했다. 『新唐書 卷223 李林甫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