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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7+KSM-WM.1600.2726-20150630.065310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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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604년 2월 28일 / 宣祖37 / 甲辰
날 씨 맑다.
내 용
고부(姑夫), 고모(姑母)를 위해 술자리를 열었다. 정여섭(鄭汝燮)[정사상(鄭四象)]【사상(四象)】, 손길보(孫吉甫)[손경남(孫景男)]【경남(景男)】도 와서 잔을 올리는데 참석했다. 고모는 선고(先考)를 생각하니 마음이 북받쳐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감음(感吟)」일률과 병서(並序)를 지었다. 밤중에 파했다. 아침에 고모부가 장덕회(張德晦)[장현광(張顯光)] 영(令)【현광(顯光)】을 전송한 시를 보여 주었는데, 바로 현의 사람들이 성을 에워싸고 머물기를 바라던 때였다. 이때 의성(義城)에 부임을 한지 겨우 몇 달 만에 성인 위판(位版)을 도둑맞아 추고(推考)를 받은 후에 봉안제(奉安祭)를 마쳤다. 사장(辭狀)을 올리고 사직하고 떠나자 현 사람들이 모두 밤낮으로 성을 에워싸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에 맹서하며 말하길 "내가 고을의 수령이 되어 욕이 성묘(聖廟)까지 미치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현의 곡식을 먹겠는가!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 우리 고모부가 영가(永嘉)[안동(安東)]로부터 돌아오면서 장현광을 길에서 만나 성을 둘러싼 것을 보고 현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만류할 수 없고 하물며 3일 동안 굶주림에 이르렀으니 어찌 병이 없겠는가! 현인(縣人)을 보내어 보호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이에 현 사람은 결연(缺然)이 이내 해산하였다고 했다. 고모부의 시에 차운을 하고 이어서 여옹(旅翁)【스스로 여헌(旅軒)이라 불렀다.】에게 보내었다. 오산(鰲山) 수령 서희신(徐希信)은 문인이다. 군(郡)을 위해 수년간 몸가짐을 깨끗이 하였고 백성들을 사랑하기를 자애롭게 하여 대소인 모두 받들기를 원했는데 춘 초(春初)에 병 때문에 돌아가고자 하니 군사람들이 가시나무를 짊어지고 성문을 막고 낮밤으로 돌아가며 지켰다. 열무어사(閱武御史)가 파직 상소를 올렸다고 들었다. 【병으로 도회시(都會試)를 보지 못했다.】곧바로 밤중에 말을 타고 홀로 나가는 것이 과객의 행차와 같았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류간(柳澗)은 열무어사가 아니다. 선정하는 사람을 찾아서 파직하는 자이다."고 했다. 문여중(文汝中)은 내대(內臺, 내직)로부터 나와 양산(梁山) 수령이 되어 군(郡)을 4년간 다스렸다. 백성들은 부모와 같이 우러렀다. 언제나 해진 신발을 신고 있어서 그것을 안 사람들이 만들어서 보내주었다. 그 정사는 오로지 맑은 마음으로 일을 살피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고인(故人) 정사의 힘들고 번다함으로 곤란하여도 군의 백성들은 알지 못했다. 친히 절구(絶句)로 향학(鄕學) 밝아졌고 예를 다하여도 사람들을 부리는 것을 마치 중정(中正)하게 하였으니 당시의 무리들이 경내로 들어오지 못하여 남들에게 꺼림을 당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인근 일선부(一善府)에 수령이 되어 부임할 때 아들이 침상을 가지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쪽에도 자리가 있으니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는 길에서 그를 만나 함께 하룻밤을 머물렀다. 한터럭도 관의 기상(氣像)이 없었고 의복과 침구는 가난한 선비보다 못했다. 말이 시정(時政)의 득실에 미치어 늠름하여 범할 수 없었다. 양산(梁山)의 구사(丘史, 노비)와 복태(卜馱)를 따라오지 못하게 금하고 두 동비(童婢)만 도보(徒步)로 따랐다. 다만 몇 태와 전도는 일선(一善) 지공(支供)의 짐이었다. 3월에 부에 도착하니 순종(唇腫)으로 관에서 죽었다. 전날에 장인에게 명하여 신발을 만들어 과인의 고모에게 보내고자 했다. 이때에 이르러 공인(工人)은 관아[衙內]에 바칠 것을 만들었는데 첩이 받지 않고 말하기를 "나으리[進賜]가 계시다면 받을 것인데 지금은 받지 않겠다. 어찌 관의 신발을 받겠느냐! 신령님은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니 첩이 어찌 감히 받겠느냐!" 장인이 두세 번 줄려고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니 울면서 말하기를 "공은 비록 천하나 태수(太守)의 명을 받고 만들어 왔습니다. 제가 어찌 차마 사사로이 팔아서 이득을 취하겠습니까!"라 하고 관청(官廳)에 바치고 떠났다. 발인하는 날에 이르러 읍인(邑人)의 호상(護喪)하는 자가 삼사백냥 정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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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二十八日。
晴。爲姑夫姑母設酌。鄭汝燮【四象】孫吉甫。【景男】亦來參。奉杯姑母追思先考。感淚如瀉。有感吟一律並序。夜分乃罷。朝姑夫出示贈張令德晦【顯光】詩。乃縣人圍城。願留時也。時赴義城。纔數朔。見偸聖位版。推考後。奉安祭畢。辭狀。而浩然。縣人大小。日夜圍城。使不得去。乃誓曰。僕忝縣尹。辱及聖廟。何面目。更食縣粟。三日對案不食。時吾姑夫。自永嘉還。路逢見圍。乃謂縣人曰。誓不食粟。決不可留。況至三日飢。寧无病患。不如護送賢人。於是。縣人缺然乃解云。奉次姑夫韻。仍寄旅翁【自號旅軒。】鰲山倅徐希信文人也。爲郡數年。持己以淸。愛民以慈。大小人皆願戴。春初以疾欲歸。郡人負蕀。塞城門。晝夜輪守。聞閱武御史啓罷之狀。【病不赴都會試。】卽日夜半。騎馬獨出。有如過客之行。時人爲之語曰。柳澗非閱武御史也。乃擇罷善政御史云。文汝中自內臺出爲梁山倅。治郡四年。民仰之如父母。常著弊履。知識爲造送焉。其政專以淸心省事爲本。故人困於政重事煩。而郡民不知。親自絶句。以訓蒙士。鄕學始明。盡禮使命。如中正。輩自不入境。其見憚於人如此。隣爲一善府。將行。其子欲持所寢席。曰彼亦有席。不必持。余遇於路。同宿一夜。无分毫有官氣像。而衣服寢具。不逾於寒士時矣。語及時政得失。則凜凜不可犯。梁之丘史卜馱。禁不從來。故二童婢。徒步隨之。只數馱前導。乃一善支供之卜也。到府三月得唇腫。卒於官。前時。命工造履。欲送寡姑母。至是。工人造納衙內。其妾不受曰。進賜若存則可受。今已矣。何受官履。靈必有知。妾何敢。工人再三不得請。乃哭曰。工雖賤。聞太守之命而造來。吾豈忍私賣之利。納于官廳而去。及發引之日。邑人護喪者。三四百兩云。

주석

1) 고모부가 장덕회(張德晦)…전송한 시 : 『慕堂先生文集 坤』 “卧轍聞名久。圍城此一時。笑他萇楚詠。幾處泰山悲。仁里遺名李。離亭惜別巵。更吟歸去賦。爲謝解章詩。” 2) 의성(義城)에…봉안제(奉安祭)를 마쳤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1603)12월 9일, 선조 37년(1604) 2월 15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