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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6+KSM-WM.1857.4717-20140630.0000000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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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0년 1월 10일 / 哲宗 11 / 庚申
날 씨 추위가 점점 심해지다.
내 용
조금 경영했던 일은 모두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밤에는 기침을 해서 새벽을 몹시 기다렸다. 객지에서의 고생이 도리어 견딜 수 없는 데에 이르렀다. 낮에 금우(金牛)가 올라왔는데, 한 마을의 노소가 모두 선사(先事)가 뜻대로 추증도니 일로 축하편지를 보냈다. 대개 영직(英直) 놈이 제석(除夕)에 맞춰 사경(四更) 초에 횃불을 들고 방(榜)이 왔다고 소리쳤는데, 마을 안에 일시에 퍼져 내가(內家)에 모여서 교지함을 열고 연설을 읽으니, 기뻐하며 박수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마을 편지는 면면이 다 왔지만 형호(衡湖) 형은 한 글자의 답도 없으니 매우 이상하다. 혹 출대(出對)했을 때 빠져서인가? 금우(金牛)의 말을 들어보니 초3일에 출발하여 어렵게 얼음을 밟으며 오백 리에 여드레를 소모하여 올라왔는데 끝없는 풍설(風雪)을 다 겪었다고 한다. 재종질(再從姪) 계성(季誠)의 편지에는 협지(夾紙)에 「여강묘모도(廬江廟貌圖)」가 있었으니, 그 뜻은 알만 하지만 아마도 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 같다. 필시 시킨 자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지만 나의 을(乙), 병(丙) 연간의 본사(本事)를 전혀 헤아리지 않은 것이니, 나도 모르게 심기가 불편했다. 내가 비록 환봉(還奉)하는 일에 대해 별다른 기축(機軸)은 있었지만, 하상(河上)의 사람들이 당초에 내가 이 뜻이 있다는 것 때문에 헐뜯은 것이 동변(東邊)의 사람들보다 심했으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다시 그 사이에서 착수하고자 하겠는가? 지난번 선성수령(宣城首領)의 답서에서도 대략 이 뜻을 보였는데, 지금 또 계성이 다른 사람의 부추기는 말을 듣고 나를 속없는 사람으로 본다. 비단 그 사람이 일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남에게 쉽게 보인 것이 한탄스러우니, 스스로 반성할 만하다. 일시에 혀를 차며 탄식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마땅히 뒤의 인편이 돌아갈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권평중(權平仲) 형, 이만운(李晩運) 형, 아사(雅士) 이휘필(李彙弼), 정언(正言) 배상련(裴相璉)이 찾아왔다. 또 의성(義城) 산운(山雲) 이 형(李兄)이 그의 아버지가 은전(恩典)을 입은 일로 잔치를 열어 초청했지만 밤이 추워서 이루지 못하고 신평 빈(新坪賓)을 시켜 대신 모임에 참석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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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十日。
寒事漸甚。如干所營之事。俱未得出脚。夜則咳嗽。苦待曙。客苦轉至難堪。午金牛上來。一村老少。俱以先事之如意蒙■■(崇秩)贈有賀書。蓋英漢趁除夕四更初。擧火呼榜至。村中一時震動。會于內家。開敎旨匭。奉讀筵說。無不快樂欣抃。繼之以感涕也。但村書面面皆至。而衡湖兄主無一字答。甚可怪也。或遺漏於出對時耶。聞金牛言。初三日發行。艱辛■■(十一)踏氷五百里費八日上來。喫盡無限風雪云耳。再從姪季誠書。夾呈廬江廟貌圖。其意可知。而想非出於渠之由中也。必有使之然者。而全不諒吾乙丙年間本事也。不覺心氣不平也。予雖有還奉之別般機軸。河上之人。當初因我有此意。詬謗齮齕。有甚於東邊之人。則予以何心更欲着手於其間哉。向於宣城倅答書。亦略示此意。今又季誠之聽他指嗾。看我以無腸。非徒渠之昧事。可歎吾之見易於人。可自反也。不■(無)禁一時咄咄起吁也。當待後便回却也。權兄平仲李兄晩運李雅彙弼裴正言相璉來訪。又義城山雲李兄以其大人天爵蒙恩事。設酌來請。而夜寒未遂。使新坪賓替往參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