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 > 01권 > 1860년 > 1월 >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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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6+KSM-WM.1857.4717-20140630.0000000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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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0년 1월 7일 / 哲宗 11 / 庚申
날 씨 날이 또 매우 춥다.
내 용
방(榜)을 보니 김석진(金奭鎭)이 삼상(三上)이 되었다. 곧 창녕위(昌寧尉)의 손자이고 돈녕 참봉(敦寧參奉) 도균(道均)의 아들인데 올해 나이가 18세이니 홍분방(紅粉榜)이 아니겠는가? 내주(內主)가 연례대로 성황당(城隍堂)에 가서 기도하고 돌아와서 점친 것을 말했는데, 내가 올해 신수가 대통(大通)하여 6월에 출재(出宰)할 것이고, 집 사는 것을 원한다고 하니, 또한 과거급제 이전의 창부(唱夫)가 아니겠는가? 류 침랑(柳寢郞)의 종 삼득(三得)이 저녁에 노새를 끌고 와서 출입(出入)을 청했다. 그 놈이 필시 아침에 들어왔을 것이지만 저녁에 온 것은 분명히 까닭이 있을 것이니 매우 통탄스럽다. 류 랑(寢郞)의 편지가 있기에 답장을 썼다. 밤에 반인(泮人) 홍장연(洪長淵)이 와서 말하기를 정(丁), 술(戌) 연간에 동촌(東村) 소론(少論) 오태중(吳泰重)이 창녕현감(昌寧縣監)이 되었을 당시 큰 가뭄을 만나 기도를 해도 영험이 없어서 이에 장인을 시켜 오색(五色)의 용 그림을 그려서 관아 뜰에서 삶게 했다. 잠시 뒤에 장마처럼 비가 내려 주산(主山) 화왕(火旺)의 남쪽 기슭에 산사태가 나고 교외(郊外)에서 객사(客舍)가 잠겨서 온 고을에 수재(水災)가 났는데, 고금에 없는 일이었다. 이어서 큰 흉년이 들자 백성들이 생활 할 수 없어서 서로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마침 그 당시 과거급제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아우 명희(命喜)가 이 고을을 수령이 되었는데, 자신의 녹봉을 덜고 또 집안 재산을 내어 뿔뿔이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서 집을 잃은 자는 집 지을 비용을 주고 식량이 떨어진 자는 농사지을 거리를 주어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고을 백성들이 지금까지 칭송한다고 한다. 예천(醴泉)의 신임 수령 유건환(兪建煥)은 전 남원부사(前南原府使) 정환(廷煥)의 아우이고, 동복(同福)에서 이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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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七日。
日又極寒。見人題榜眼。金奭鎭爲三上。卽昌寧尉之孫。敦寧參奉道均之子。今年十八餘。非紅粉榜耶。內主以年例。往禱於城隍堂。歸言問卜。則吾之今年身數大通。六月當出宰。請買屋。亦非登第前唱夫耶。柳寢郞奴子三得。乘夕牽騾至請出入。厥漢必朝入。而乘暮至者。必有所以。甚可痛。寢郞有書。故答之。夜泮人洪長淵來言。丁戊年間。東村少論吳泰重爲昌寧縣監。時丁大旱。祈禱無靈。乃使工作龍畫五彩。烹於縣庭。俄而雨下如注。主山火旺南麓出沙汰。漂沒客舍于郊外。一縣水災。振古所無。仍大歉。土民不得資生。許多離散。適其時月宮秋士之弟命喜。作宰此縣。捐廩而又出家貲。招諭離散。漂室者。給作家之費。乏糧者。給作農之料。得以安堵。縣民至今稱道云。醴泉新倅兪建煥卽前南■(府)原府使廷煥之弟。而自同福移職云。

주석

홍분방(紅粉榜) : 분홍빛의 옷을 입고 입에서 젖내가 난다는 뜻으로, 과거시험이 공정하지 못하여 권문세가의 어린 자제가 과거에 급제한 것을 비웃는 말. 월궁(月宮) :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진(晉)나라 극선(郤詵)의 ‘월궁에 있는 계수나무를 꺾는 다[月宮折桂]’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