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 > 01권 > 1859년 > 10월 >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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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6+KSM-WM.1857.4717-20140630.0000000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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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59년 10월 9일 / 哲宗10 / 己未
날 씨 음려(陰沴)한 날씨가 조금 풀리다.
내 용
음려(陰沴)한 날씨가 조금 풀렸으나 해가 날 때 멀리 남산(南山)을 바라보니 여전히 안개 기운이 있었다. 한 번 괴질(恠疾)이 성 안으로 들어온 뒤로 34일 내에 음악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제 밤에 비로소 젓대소리가 들렸으니 앞으로 태평하게 될 조짐인가? 집과 고향 소식은 적막하기가 천애(天涯)와 같게 된 지 이미 한 달 3일이나 되었다. 이렇게 무한히 고생한 상황을 열거 해 보면 가족들이 필시 나를 염려하여 버려두진 않을 것인데, 나 또한 이따금 편치 못한 회포가 인다. 어제 저물녘에 반주(泮主)의 소당(小堂)을 걸었는데, 금원(禁苑)의 붉어진 나무에 바람 든 이파리 소리가 소슬하고, 새 달빛 푸른 하늘에는 서리 맞은 기러기가 울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칠순(七旬)의 마음 약한 사람이 이 한 달을 만나니 겁회(劫灰)를 겪은 뒤 끝에 더욱 고향 동산이 그리운 회포를 금할 수 없다. 오늘 아침 또 반촌(泮村)에 인사를 다녔으니 이는 한 달 남짓 서로 왕래가 끊겼기 때문이다. 교리(校理) 강진규(姜晉圭), 승지(承旨) 강면규(姜冕圭)를 방문하고 돌아오니, 주서(注書) 권노연(權魯淵)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다고 했다. 아까 강 교리(姜校理)를 만나고 있을 때 듣기에 삼남(三南) 지역에 또 수의어사(繡衣御使)가 나왔는데, 영남(嶺南)심이택(沈履澤)이 선정된 고을[牲邑]로 내려갔다고 한다. 식후에 강 교리가 데리고 있는 배하인(陪下人) 영록(永祿)이 돌아가는 길에 나의 모휘항(毛揮項)을 내어 주고 그로 하여금 바꿔 입게 했다. 강 령(姜令)과 있을 적에 들었는데, 반인(泮人) 이민영(李敏永)은 곧 법전(法田)에서 10대(代)를 산 주인(主人)이었다. 근래에 비할 데 없이 빈한(貧寒)해져서 각자가 다른 머물 주인을 정하여 가게 되었다. 노론(老論) 강 씨(姜氏)들 가운데 참판(參判)의 집이 그와 지친(至親)이었으나, 약간의 사람들은 최후에도 가지 않았다. 연전에 또 양만길(梁萬吉)을 머물 주인으로 정했다. 그런데 올 봄에 그의 출계(出系) 간 셋째 아들 건(鍵)이 홍문관(弘文館)에 등제(登第)하였지만 창방(唱榜)할 한 푼의 돈도 없었다. 반촌에 머물고 있는 강 씨들이 모두 민영(敏永)만길(萬吉)에게 권하여 그들로 하여금 한양에서 편전(便錢) 수백 민(緡)을 구하게 하였고, 은 무사하게 응방(應榜)했다. 그래서 민영만길이 모두 돈을 받아내는 일로 봄 상간에 의 신은(新恩)을 따라 함께 갔었지만, 박대함이 매우 심했고 한 푼도 주지 않았으며 쫒아 내라고 호통을 당했다. 그래서 민영 등은 일전에 구걸하러 올라온 것이다. 또 작년에 강교환(姜敎煥)이 경사(京寺)에서 죽었기에 영은 장(永恩丈)이 백 민 돈을 부조하여 장례비용으로 삼았다. 그의 아들이 부고를 듣고 올라왔지만 운상(運喪)할 비용을 가지고 오지 않고는 다시 전동(典洞)에 돈을 요구하려하니 그의 족인(族人)들은 돈을 빌려 줄 수 없다고 말하고는 말과 가마와 운구꾼[運柩軍]만 보내었다. 급기야 집안 산에 평안히 운구하였으나, 운반비용을 주지 않아 운구꾼들이 한정 없이 싸움만 일으키고 돌아갔다고 한다. 서문(西門) 밖에 있는 연서역(延曙驛)에 김 동지(金同知)라는 자가 있었는데, 몸소 일만 금을 번 자이다. 자녀 없이 부부가 모두 연로했는데, 동지(同知)는 70세이고, 그의 처 또한 70이 다 되었으나 죽었다. 후손으로 세울 자가 없는 처지를 괴로워하여, 연전에 타성(他姓) 사람을 데리고 와 의양자(義養子)로 삼았는데, 이른바 의양자라는 놈이 거의 천여 민(緡)을 탕진하는 것에 이르러, 의부(義父)는 팔자를 자탄했다. 하루는 마을의 노소들을 모아 술과 안주를 차리고 그들을 취하고 배부르게 한 후에 마을 사람들에게 선언하기를, "내가 일생동안 재산 증식을 거의 만 금에 가까이 했다. 나는 지금 오늘 내일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만일 하루 만에 눈을 감는다면 곧 내 재산은 한결같이 주인 없는 물건이 될 것이다. 청컨대 오늘부터 영영 전답(田畓)과 가장(家庄) 문기(文記)들을 마을에 기부할 것이다. 그러니 원컨대 마을의 여러 사람들은 나의 정과 처지를 가련하게 여겨서, 조만간 내가 죽은 이후에 내 부모님의 묘와 우리 부부의 무덤에다가 전답에서 추수한 비용을 가지고 해마다 으레 죽은 날 제사를 지내 주고, 그 나머지는 마을 안의 1년간 소요비용으로 정하여 쓰게 한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좌중에 있던 어느 한 사람이 동지를 한쪽 구석에서 불러서 개인적으로 권면하며 말하기를, "동지께서 오늘의 처사는 크게 잘못 생각함이 심합니다. 동지께서는 어째서 지금 나이가 어린 처를 맞아 들여 자녀를 낳아서 나의 풍요로운 재산을 가지고 나의 골육에게 주지 않고, 공연히 의미 없는 일을 만들었습니까? 오늘 취하고 배불리 먹인 이곳에서는 비록 ‘알겠다.’ ‘알겠다.’ 그랬지만, 내일 각기 돌아간 이후에는 필시 당신 재산을 모두 차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다툼이 있을 것이니, 재산을 나눠먹은 사람들이 동지의 무덤에다가 한 잔의 술도 과연 부어 주는 자가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에게 일찍이 과부가 된 질녀(姪女)가 있는데, 그의 사람됨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만일 나에게 삼백 민의 돈을 준다면 백 민은 내가 긴급히 사용 할 것이고, 이백 민은 나의 형에게 남겨 혼구(婚具)를 꾸리는데 쓸 것입니다."라고 했다. 동지가 듣고 웃으며, "내 나이가 이미 고희(古稀)인데 비록 장가는 들더라도 어찌 자식을 낳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말이 좋으니 시험해볼 만하다."라고 했다. 결국 삼백 민을 내어주었고, 그 사람은 말한 대로 이백 민을 그의 형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의 형이 갑자기 크게 노하며 말하기를, "내 딸이 정절이 훼손함이 있음을 나도 모르는데 너는 어찌 아느냐? 그리고 이렇게 현격히 차이나는 일을 만드는가? 또 크게 불가한 한 가지가 있으니 동지의 나이는 이제 죽을 때가 되었는데, 내 딸의 나이는 겨우 24세이다. 비록 행여 억눌러서 정절을 빼앗았다 하더라도 너는 숙질간의 처지에 어찌 차마 이처럼 박정한 일을 만들었는가?"라고 했다. 오랜 시간 형제간에 다투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는데, 그의 질녀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들어와 말하기를, "제가 밖에서 대략 전말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숙부께서는 많은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마땅히 그에게 시집 갈 것입니다."라고 했다. 곧바로 날을 정하여 동지에게 통지했고, 동지는 장가들어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 해에 사내아이를 낳았고 다음 해에도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모두 무탈하게 성장했다. 동지는 나이 88세에 세 아들 모두 장가보내고 그의 처는 나이 42세로 바야흐로 해로(偕老)하여 부(富)는 더욱 쌓여만 갔다. 그는 복 받은 사람으로 일컬어졌지만,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어느 사람이 전하기에 임금의 총애를 받는 환관(宦官) 정지상(鄭志常)은 대감(大監)으로 호칭하면서 상을 내려 받는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전 훈장(前訓將) 또한 빌붙어 아첨한다고 한다. 영양(英陽) 주곡(注谷)조병훈(趙秉薰) 형에게는 부친이 있는데 자는 순가(舜可)이다. 그는 그의 6대조인 옥천(玉川)[조덕린(趙德隣)] 공의 일로 여러 해 한양에 있으면서 마음과 힘을 곡진히 다하며 무한히 고생했으나 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장차 이달 20일 이후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반촌(泮村) 숙소에 있는 나를 방문했다. 그의 정경(情境)이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떨구게 했다. 나는 때를 기다리라는 말로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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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九日。
日氣陰沴稍解。而日出時■■〔遙望〕南山。則尙有霧氣。一自恠疾之入城內。三十四日之內。未聞歌吹之■〔響〕。前宵始■〔有〕笛聲。其將爲太平兆眹耶。家鄕消息。漠若天涯。已一月三日。閱此無限勞苦之狀。渠等必念我不置。而吾亦有時起懷不平。昨暮步泮主小堂。望見禁苑紅樹。風葉瑟瑟。新月碧空。霜鴈噭噭。七旬腸弱之人。値此一月。劫灰之餘。益不禁■■〔鄕園〕之懷。今朝又修泮館人事。蓋月餘相阻也。訪姜校理晉圭。姜承旨冕圭而歸。權注書魯淵來訪而返云。俄在姜校理座上。聞三南又出繡衣。嶺南則沈履澤牲邑下去云。食後。姜校理率陪下人永祿回路。吾之毛揮項。出給永祿。使之改衣。在姜令座。聞泮人李敏永。卽法田十代主人。近貧寒無比。各自定他主去。而老姜中參判家。與其至親。如干人最後不去。年前又定主梁萬吉。今春其第三出系子鍵。登第於其館。無唱榜一分錢。姜氏留泮之人。俱勸敏永萬吉。使之求京便錢數百緡。無事應榜。■敏永萬吉。俱以捧錢事。春間隨新恩偕往。薄待太甚。不給一分。號令驅逐。敏永等。日前丐乞上來。又於昨年姜敎煥之死於京寺也。永恩丈賻百緡。爲送終之費。其子聞訃上來。不持來運喪之費。欲更徵於典洞。其族人等言。其不可貰出。馬轎運柩軍送之。及其■■〔平運〕家山也。不給運貰。貰卒無限生梗而歸云。在西門外延曙驛。有金同知者。身致萬金。無子女而夫妻俱年老。同知年七十。其妻年亦洽七而死。苦無立後之處。年前取他姓爲義養子。所謂義養。攖去千餘緡去。其義父■■自歎八字。一日聚洞中老少。設酒殽。使之醉飽後。宣言於洞中曰。吾之一生。殖貨殆萬金。而■■〔吾今〕■爲朝暮之年。若一日溘然。便一無主之物。請自今日。永納田畓家庄文記于洞中。伏願洞中僉員。矜憐我■■■■■〔情地〕。早晩身死之後。吾父母之墓。吾夫妻之塚。以田畓秋收。年■〔例〕身死日祭之。其餘定爲洞中一年用下。未知何如。僉曰諾。有一人在座中。招同知於一隅。私自勸勉曰。同知今日處事。大爲不思之甚。同知何不及今娶■■〔年少〕妻。生子生女。以吾豊饒之財。不付吾骨肉。而空然作無義之事乎。今日醉飽之場。雖曰諾諾。而明日各歸之後。必有都呑之人。又有生梗。分食之人。同知塚上一盃酒。未知果有酹之者也。吾有早寡姪女。其爲人可佳。若給我三百緡銅。■■■〔百緡〕吾爲緊急用下。二百緡遺之吾兄。爲治婚之具。同知聞而笑曰。吾年已到古稀。雖娶豈能生子也。然而君言好。可試之。遂出給三百。其人依言以二百遺其兄。其兄聞輒大怒曰。吾女之有毁節意。吾亦不知。汝何知之。而作此徑庭之事乎。且有大不可之第一件。同知年今垂死。吾女年才卄四。雖或抑而奪節。汝在叔姪之地。豈忍作此薄情之事乎。移時鬩墻聲聞於外。其姪女■不招而入曰。吾在外而略聞梗槪。父與叔不必多言。吾知吾事。吾當嫁之。卽已定日通于同知。同知娶而率去。當年生男子。又翌年生男子。又翌年生男子。俱無{虫+恙)}長成。同知年八十八。俱娶三子。其妻年四十二。方偕老富益富。以福人稱之。豈非異事耶。有人傳自上有愛宦鄭志常。號稱大監。賞賜無比。前訓將亦趨附云。英陽注谷趙兄秉薰。有父親。字舜可。以其六代祖玉川公事。閱歲洛下。備盡無限辛苦。事又不成。將以今念後還家。訪余于泮舍。其情境令人墮淚。余以待時慰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