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 > 01권 > 1859년 > 10월 >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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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6+KSM-WM.1857.4717-20140630.0000000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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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59년 10월 7일 / 哲宗10 / 己未
날 씨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내 용
조복(朝服)과 여러 물건들을 장동(長洞)에 보냈고, 답장을 보았다. 오늘 오시(午時)는 곧 부묘(祔廟)를 진하(進賀)하는 날이다. 나는 비록 실직(實職)은 없으나 오로지 부묘를 위해 올라 와서 50일 동안 두루 갖추느라 무한히 고생했으니 나아가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오늘 아침 장차 영영 반촌(泮村)으로 들어가려고 한 것이다. 돈화문(敦化門)을 지나다가 들어가 진하 반열에 참여하기 위해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방문하니, 실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정랑(正郞) 김상희(金相喜)를 만났는데, 동반(東班) 쪽 5품(品)의 반열에 있었다. 몸소 가서 그를 만나 어제 병이 더친 사유를 말했다. 김 정랑(金正郞)은 불참하여도 의리(義理)상 해가 될 게 없다고 힘써 이야기하는 바람에 다시 돈화문을 나와 곧장 반촌으로 들어갔다. 허기가 심하고 기운이 나른하였는데, 반촌 안주인이 아침밥을 올리기에 억지로 반 그릇을 먹었다. 베개를 베고 누우니 온 사지와 몸이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저녁에 축천탕(縮泉湯) 1첩(貼)을 복용했다. 밤늦게 저녁밥을 먹고는 밤새도록 인사불성이 되었다. 또 전에 머물던 곳의 안주인이 말똥을 치우지 않아 낮은 담장이 조금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내가 그곳을 떠나려고 출발할 때 1냥 5전을 내주었는데, 주사(酒邪)를 부리며 패악한 말을 하려했다.【1냥 5전은 곧 지난달에 내가 그 집에 맡겨 둔 돈이었는데, 그가 스스로 빼앗은 것이다. 돌려받을 방도가 전혀 없어서 좋은 말로 그 돈을 포기하고 왔었다.】 때문에 내가 좋은 낮으로 위로하고 풀어주었다. 반촌에 들어온 이후 영직 놈을 시켜 아직 찾아오지 못한 물건을 지고 오고자 보냈는데, 그가 염색한 포(布) 2단(段)을 빼앗고 말하기를, "40여 일간 머문 방세가 하루 1전(錢)씩 이니 그것을 받은 연후에 이 포를 주겠다."라고 했다. 이는 또한 세상의 변고에 관계된 것인지라, 비록 영영 잃어버릴 이치는 없었지만 자연히 심란해졌다. 어제 낮에 사복시(司僕寺)의 의막(依幕)에서 어느 한 사람이 나이가 거의 60인 자가 들어왔는데, 곧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이라고 했다. 그의 성명을 물으니 김보근(金普根)이었고, 곧 양순(陽淳)의 아들이며 그의 백부(伯父)인 희순(羲淳)에게 후계로 들어간 자였다. 일찍이 들어본 그의 사람됨이 과연 나쁘지는 않았다. 또 어느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나이는 73세였고, 연전에 영릉 참봉(英陵參奉)이 되었다가 지금은 봉사(奉事)로 부묘의 집사자(執事者)가 되었다. 그의 이름을 물으니 이의주(李義周)였고,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예라고 했다. 그의 근력은 힘든 임무도 능히 행할 수 있었으니 좋을 만하다. 승지(承旨) 이만운(李晩運)을 전정(殿庭)에서 만났고, 승지 이휘승(李彙升)도 의막에 찾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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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七日。
朝雲陰。送朝服諸具於長洞。見答書。今日午時卽祔廟進賀日也。余雖無實職。而專爲祔廟而上來。備閱五十日。無限勞苦。不可不進參。故今朝將永入泮村。歷入敦化門。擬參賀班。訪同僚所坐之處。無實職如我■■■■〔之人。一不〕入來。只見金正郞相喜。在東下五品之班。躬往見之。言昨日添病之由。金正郞力言不參之無害義理。故復出敦化門。直入泮。飢甚氣薾。內主上朝飯。强喫半碗。倚枕而臥。千肢百體。無一不痛。夕服縮泉湯一貼。夜深喫夕飯。達宵不省人事。且■■〔前寓〕之內主。以馬糞未祛。短墻少毁之由。吾之離發時。出一兩五錢。有使酒悖談之意【一兩五錢。卽月前吾之封置於渠家■之物。渠自乹沒者也。萬無還推之道。故好言棄來。】。故余好顔慰解。入泮後。使英漢欲負來未刷之物而送之。則奪其染布二段曰。四十餘日留房之貰。一日一錢式。捧之然後給此布。亦關世變。雖無永失之理。而自然心亂。昨午司僕依幕。有一人年近六十者入來。卽司僕判官云。問其姓名。金普根。卽陽淳之子。入后於其伯父羲淳者也。曾聞其爲人。果不爽矣。又有一人入來。年七十三。年前爲英陵參奉。今以奉事爲祔廟執事者。問其名。李義周。廣平大君後裔云。其筋力能行劇任。可佳也。遇李承旨晩運於殿庭。李承旨彙升。又來訪依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