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 > 01권 > 1859년 > 10월 > 6일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 리스트로 첫 페이지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6+KSM-WM.1857.4717-20140630.000000012253
URL
복사
복사하기

상세내용

상세내용 리스트
날 짜 1859년 10월 6일 / 哲宗10 / 己未
날 씨 저녁에 구름 끼고 흐리다가 비가 내리다.
내 용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앉아 세수하고 머리를 빗어 정돈했다. 영직(英直) 놈을 시켜 말을 먹이라고 했는데 말이 말죽을 먹지 않고 또 복통을 일으키니 일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격인지라 어찌 급작스러운 상황에 변통 할 수 있겠는가? 병든 말에 안장을 놓고 학금(鶴金)으로 하여금 뒤따라오게 했다. 금호문(金虎門)으로 들어가 진선문(進善門), 숙장문(肅章門), 인정문(仁政門), 연영문(延英門), 연양문(延陽門), 건양문(建陽門)을 지났고, 건양산(建陽山)을 넘어 효정전(孝正殿)으로 향했다. 월대(月臺)에 들어가니 동료들이 차례로 일제히 모였고 백관(百官)들 또한 모두 모였다. 각 관사(官司)의 하인들이 둘러싸서 분잡하니 머물러 있기가 힘들었다. 학금을 시켜 선인문(宣仁門) 밖에 나가게 하여 영직이 말을 끌고 있는 곳을 방문하게 했다.【금호문에 들어갔을 때 영직(英直)을 시켜 선인문 밖에 말을 세워두라고 했었다.】오랜 시간이 지나고 학금이 돌아와 고하기를, "아래위로 그를 찾았으나 없었기 때문에 돈화문(敦化門) 밖까지 가보았는데도 없었습니다."라고 하니 이를 장차 어찌하겠는가? 나는 채여(彩轝)가 막 떠나고 대가(大駕)께서 또 출궁(出宮)할 것을 염려하여 이름을 도감(都監)의 낭관(郎官) 동료들로부터 뺀 이후에 채여를 따르지 않았으니 이 무슨 모양인가? 부득이하게 배하인(陪下人)과 더불어 먼저 선인문으로 나가니 진(陣)이 이미 나열되어있었다. 급히 한 곳으로 가서 가마꾼을 내어 궁궐 담장 아래의 샛길을 따라 먼저 종묘(宗廟)의 문 안에 이르러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조금 뒤에 채여가 줄을 지어 들어오고 용기(龍旂)가 그 뒤를 이었으며 필성(蹕聲)이 따라서 나왔다. 여러 동료들이 걸어서 들어오자 나 또한 대열에 끼여 들어가 동행했다. 묘문(廟門) 밖에 이르러 임금의 행차를 공손히 맞아드렸고, 이어서 사복시(司僕寺)로 향했다. 의막(依幕)에서 조금 쉬는데, 도감 서리(都監書吏)가 와서 여러 낭청(郞廳)과 감조관(監造官)을 불러들인다고 고했다. 나 또한 묘문 밖으로 따라갔지만 별 일은 없었다. 다시 앞서 쉬던 의막으로 갔다. 해가 이미 낮이 되자 여러 동료 가운데 3인【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임승수(林勝洙), 감조관(監造官) 이원성(李源星), 정기덕(鄭基德)】이 아침밥으로 성찬(盛饌)을 갖추어 들어왔다. 세 사람은 내가 밥이 없는 것을 알고는 각기 밥뚜껑에 밥과 반찬을 덜어 함께 먹자고 극구 권하니,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 빈 사양만 하는 것은 무익하기에 결국 그들과 함께 먹었는데, 바야흐로 십시일반(十匙一飯)이 될 만했다. 조금 뒤에 학금이 왔고, 영직도 왔다. 어떻게 나를 찾아왔냐고 묻자 여러 의막들을 두루 다녀보고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비로소 영직 놈을 꾸짖으며, "아침 전에 너는 말을 끌고 어디로 갔기에 나로 하여금 거의 낭패 보게 했느냐?"라고 했다. 영직 놈이 답하며, "종묘 대문 밖에 말을 세워두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를 타이르며, "시골 놈이 서울 지리에 어두운 것은 마땅하나 내가 어제 밤부터 어찌 선인문을 말하지 않았느냐? 선인문은 반촌(泮村)으로 들어가는 길의 홍화대문(弘化大門) 아래에 있다고 간곡히 말했었다. 그리고 또 지각이 있다면 곧 안장 얹은 말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 백관들이 나올 문인데, 너는 종묘의 문 밖에 그 말들이 있는 것을 보았느냐?"라고 했다. 동료들이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시골 놈이 으레 이와 같은 자가 많으니 자네 또한 그를 문책하는 것은 보탬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로 하여금 식주가(食主家)에서 3전 돈을 빌려 대략 당일 용돈으로 쓰게 했다. 오후에 또 종묘 안의 여러 집사(執事)들을 불러 나오게 했다. 나와 여러 동료들은 따라 가서 종묘 안으로 들어갔다. 종묘 안을 보니 16개의 실(室)이 있고, 1실 당 각기 1칸이었다. 그 아래에는 6칸의 공간이 있고, 종묘 뒤에는 후전(後殿)이 있었으니 신주(神主)를 조천(祧遷)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 제도가 크고 웅장했으며 단청도 휘황찬란했으니 이러한 것은 마땅한 것이다. 묘문에 기대어 터를 바라보니 아마도 도성의 정기(正基)가 되는 것 같고, 또 배포된 규모와 수목의 울창함은 완연히 마치 왕의 신령이 오르내릴 것 같으니 신민들이 엄숙하고 공경해야 할 곳이다. 저녁에 의막으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구름 끼고 흐리다가 비가 내렸다. 비를 피할 만한장소가 없어서 대문 밖으로 나왔다. 밤이 깊은 후 경고(更鼓) 소리를 듣고 다시 백관의 반열에 들어가서 부묘(祔廟) 제사에 참여하고, 이어서 숙소로 향했으니 피곤함에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임금이 내려 준 사찬(賜饌)이 있다고 하나 각처에 흩어져 있어서 볼 수 없었다.

이미지

원문

初六日。
聽鷄起坐。整巾櫛。使英漢秣馬。馬不喂粥。又痛腹。而事到竿頭。豈有變通於蒼猝耶。具鞍於病馬。使鶴金陪後。入金虎門。過進善門肅章門仁政門延英門延陽建陽門。越建陽山。向孝正殿。入月■〔臺〕。同僚次■〔第〕齊會。百官亦咸集。各司下人。環擁紛沓。難可留滯。使鶴金出宣仁門外。訪英直牽馬在處【入金虎門時。使英直立馬宣仁門外】。移時還告曰。上下求之無有。故訪及於敦化門外而亦無。此將奈何。余念彩轝方將啓行。大駕又將出宮。名以都監郞僚。落在衆後。不得隨轝。此何貌樣。不得已■〔與〕陪下人。先出宣仁門。陣已羅列。急往一處。出轎軍。從宮墻下間道。先至宗廟門內。隱身待之。俄而綵轝溶溶入來。龍旂繼之。蹕聲隨發。諸同僚步入。余亦橫入同行。抵廟門外。祗迎。因向司僕。依幕少憩。都監書吏來告。招入諸郞廳監造官。余亦隨往廟門外。別無所以。復往前依幕。日已向午。諸同僚三人【司僕主簿林勝洙。監造官李源星。鄭基德】朝飯具盛饌入來。三人知我闕飯。各以飯蓋除飯與饌。極勸同食。到此地頭。虛讓無益。遂與之同喫。方可爲十匙一飯。俄而鶴金來。英直又來。問何以訪我。則言閱盡諸依幕而知之。始責英漢。以朝前汝牽馬往何處。而使我幾乎狼狽也。英漢答之曰。立馬于宗廟大門之外。余笑而諭之。宜乎漠昧鄕漢。余自前夜。豈不言宣仁門乎。宣仁門之在入泮路弘化大門之下。丁寧言之。且有知覺。卽鞍馬簇立之地。卽百官所出之門。汝見宗廟門外。有鞍馬乎。同僚皆笑曰。鄕漢例多若此。余亦責之無補。使之推貸三錢文於食主家。略略爲當日用下。午後又招進廟內諸執事。余與諸僚。隨往入廟內。見之則十六室。每一間一室。其下有空間六間。廟後有後殿。卽祧遷之所云。其制度之宏壯。丹雘之焜煌。宜乎然矣。而倚廟門而望見基址。似爲都城正基。且排布規模。陰密樹木。宛若陟降王靈。臣民肅敬之地也。夕還依幕。忽雲陰雨下。無容身避濕之所。出大門外。夜深後聽更鼓。復入於百官班。參祔廟祀。因向寓所。困憊不得交睫。自上有賜饌云。散在各處未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