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 > 01권 > 1859년 > 10월 >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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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6+KSM-WM.1857.4717-20140630.0000000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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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59년 10월 3일 / 哲宗10 / 己未
날 씨 구름 끼고 흐리다. 종일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고 바람 불고 춥다.
내 용
듣기에 정부(政府)에서 백관(百官)들의 이의(肄儀)가 있다고 한다. 직장(直長) 김형집(金亨集)이 하인을 보내 참석 할 지를 물어주었기에, 그 사람의 나를 위한 정성에 매우 탄복했다. 또 듣기에 임금이 장차 내년 봄에 신문(新門) 안 대궐로 이어(移御)하고, 옛 궁궐은 무너진 곳이 허다하여 막대하게 공역(工役)을 한다고 한다. 국가가 연이어 대사(大事)를 겪은 뒤 끝이라 궁궐을 보수할 공사비도 또한 어렵다. 또 대신(大臣) 모(某)가 연백(筵白)하기에, 헌종(憲宗)을 세실(世室)로 삼아 다시 도감(都監)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충청도(忠淸道) 내포(內浦) 태안(泰安) 땅에서 상납미(上納米)를 실은 배가 바다의 파도 때문에 부서져서 한 큰 선척에서의 익사자가 15인이라고 한다. 내일 존숭(尊崇) 습의(習儀)를 잘 치른 이후에 공조(工曹)에 받든 의물(儀物)을 모두 종묘(宗廟)와 대궐(大闕)에 들이고 나면 아마도 당연히 공조에 입번(入番)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리(書吏)가 와서 고하기에 도감이 파하기 전에는 으레 입번해야 한다고 했다. 만일 그러하다면 나는 다시 8일에 번숙(番宿)이 있을 것이다. 장차 7일 부묘(附廟) 이후에 반주가(泮主家)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매번 계속 시일을 끌 일이 많아져서 일의 기미로는 부득불 9일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11일의 존숭(尊崇)은 선인문(宣仁門)으로 왕래할 것이다. 나는 장차 보름 이후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인데, 귀향할 자금은 비록 대책이 없지만, 위 아(渭兒)의 치마를 염색할 포(布) 31척(尺), 면(綿) 2단(段) 38척을 그 아이에 대한 정을 헤아려 보면 부득이하게 염색해서 가야하기에 가격을 1냥 1전 6푼으로 정하여 염상(染裳)에게 내어주었다. 매일 밤에 잠을 못 자는 이유를 스스로 헤아려 보니 진실로 소변보기가 어렵고 껄끄럽고, 방광(肪胱)이 허투루 팽창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누워서 소변을 생각하니 소변은 매우 힘들고, 만일 소변 비색(秘塞)한 증세이면 소변물이 혹 가득 넘쳐서 대변이 설사가 되는 것 같으니, 필시 신경(腎經)이 허랭(虛冷)한 소치일 것이다. 오늘 저녁에 비로소 전 의원(全醫員)이 지어 준 축천탕(縮泉湯)을 복용했다. 이방 서리(二房書吏) 김연구(金鍊九)의 고목(告目)에 내일 책보(冊寶)를 안으로 들일 때 조복(朝服)을 입고 날이 밝기 전에 율관청(律官廳)으로 행차하라고 했다. 비실비실 대는 병든 객의 입장에서는 듣기에 매우 머리가 무거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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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三日。
雲陰。聞政府有百官肄儀。金直長亨集起伻問爲。其人爲我之誠。極可歎服。又聞自上將以明春。移御新門內大闕。而舊闕許多頹圮。工役浩繁。■國家連經大事之餘。補葺工費亦難。而又大臣某筵白。憲宗爲世室。復坐都監云。忠淸道內浦泰安地。上納米船。爲海濤所擊破。一大■〔隻〕渰死者十五人云。明日尊崇習儀合度之後。工曹所奉儀物。盡入宗廟與大闕之後。似當無工曹入番。而書吏來告。都監未罷之前。例有入番云。若爾則予復有初八番宿也。將以初七附廟後入泮主家。每多連拕。事機不得不初九入去。十一日尊崇。自宣仁門往來也。余將以望後還鄕。歸資雖沒策。渭兒染裳。布三十一尺。綿二段三十八尺。揆渠情地。不得已染去。故定價一兩一錢六分。出給染商。自料每夜未眠之由。亶出於小便艱澁。肪胱虛漲。臥而思溺。溺而甚艱。若小便秘塞之症。溺水或溢爲大便作泄。必是腎經虛冷之致。今夕始服全醫縮泉湯。終日雷雨風寒。二房書吏金鍊九告目。明日冊寶內入時。以朝服未明時行次律官廳。圉圉病客。聞甚頭重。

주석

이의(肄儀) : 예행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