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 > 01권 > 1859년 > 10월 >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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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6+KSM-WM.1857.4717-20140630.0000000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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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59년 10월 2일 / 哲宗10 / 己未
날 씨 날씨가 음응(陰凝)하다.
내 용
날씨가 음침하게 응결하여 안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낀지 이미 한 달이 되었으니 하늘에서 내린 액운이 장차 백성들을 죽이려는 것일까? 이른 아침 입직(入直)했다. 새로 큰 병을 겪은 뒤 끝이라 기식(氣息)이 침침하고, 홀로 빈 청사(廳舍)에 앉아 있자니 고향 생각이 갑자기 곱절로 들었다. 또 서리 바람이 붙어 몸이 떨리고 추위에 닥쳐 배가 냉(冷)했다. 도성(都城) 안을 통틀어 돌아봐도 누가 나를 위해 입에 맞는 음식 한 숟갈이라도 던져줄 자가 있는가? 스스로의 신세를 생각해 보니 마치 닭 벼슬과 같은 작은 관직에 몸이 얽매여 있는 것 같았다. 어찌 족히 대장부가 되어 거취가 자유를 얻지 못한 것일까? 도리어 한 번 웃음이 났다. 상사(上舍) 홍현승(洪顯承)의 양부(養父) 홍 모(洪某)는 자(字)가 숙지(叔智)인데, 기국(器局)이 있는 자로 일찍이 백만금을 소유한 부자로 이름이 난 자이다. 나이가 60이 안 되어 【기미년(己未年) 생이다.】연전에 죽었는데, 올해 봄에 그의 아들의 꿈에 나타나 고하기를, "너는 머지않아 비사증(鼻邪症)이 날 것인데, 만일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영영 병으로 폐인이 될 것이다. 함경도(咸鏡道)에 사는 전(全) 씨 성에 사심(士心)을 자(字)로 쓰는 사람을 널리 물어 찾아서 만금(萬金)을 아끼지 말고 치료를 하라."라고 했다. 현승이 양부의 명을 듣고 북도(北道)에 전 씨 성을 가진 사람을 널리 구했다. 문득 종루(鍾樓) 근처 다방곡(茶坊谷)의 오 합감(吳閣監)의 집에 전 씨 성을 가진 북청(北靑)지역 사람이 와서 머물고 있고, 사뭇 의술(醫術)을 아는 자라는 소식을 들었다. 현승이 그 소식을 들은 즉시 가서 만나보고는 그의 이름을 물으니 희영(喜永)이라 하고 그의 자를 물으니 사심(士心)이라고 했다. 그래서 교제를 트고 시약(試藥)했으며, 현재 쾌복(快復)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그의 부친이 꿈에 나타나 고하기를, "내가 거주했던 노석(鷺石)의 가실(家室)들을 배포(排布)하고 갑자기 이동하기가 어려웠으나, 지금에 이르러 사세(事勢)가 오래 머물기 어려울 것 같다. 도성 근처의 땅에서 너는 마땅히 집을 팔고 남도(南道) 지역의 산지를 찾아 이사해 간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머물러야 할 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서 현승이 한창 밤마다 조급하고 답답해했었다. 그의 생부(生父)인 홍 모(洪某)는 여주(驪州)에 있는데, 9월 20일 이후 그의 아들을 위해 남도로 유산(遊山)을 가려고 그의 아들을 불러 갔다. 현승의 생부는 나와 우연히 궐문 밖에 있는 예전 숙소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여러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사뭇 자상하고 화락한 사람이었다. 전 훈장(前訓將)의 생부와 더불어 현재 광주 유수(廣州留守) 영근(泳根)과 가장 긴밀한 사이라고 한다. 현승의 양부가 살아있을 적에 영동(永同) 땅에 별업(別業)을 두었고 또 천여 금으로 풍기(豊基)에 땅을 사 뒀는데, 그의 생부가 가 있는 땅은 여기에 내 놓지 않았다. 3경 무렵의 밤에 번개가 번쩍거리고 크게 우레가 쳤는데, 비와 우레가 서너 차례 치자 공조(工曹) 대청(大廳)이 흔들리고 부서졌다. 뇌전(雷電)이 모두 그치려 할 즈음에 이러한 일을 당한 것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뇌우가 조금 그치자 간신히 한 차례 잘 수 있었다. 또 꿈을 꾸었는데, 내가 선산(先山)의 회장(會葬)하는 곳에 갔다. 빈객(賓客)들이 많이 모였고, 종족(宗族)들도 모두 모여 있었다. 오계(梧溪)의 사람들 또한 많이 와서 모여 있는데 확실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某) 빈객 가운데 얼굴이 뚜렷이 기억나는 자는 하상(河上)의 류 함평(柳咸平)이었는데, 나의 애첩(愛妾)을 기롱하는 말이 있어 내가 "내가 소첩(少妻)을 가진 것은 또한 자네가 소첩 가진 것과 같으니 어째서 자기의 처지는 용납 않고 남을 조롱하는가?"라고 답했다. 또 하상 하형(夏亨) 척질(戚姪)이 나를 조롱하며, "잃어버린 얼자(孽子)의 한 일파이니 동성(東城)의 일파가 아니겠는가? 혹 그간에 누태(漏胎)했는가?"라고 했다. 함평 및 여러 빈객들과 더불어 장례소(葬禮所)에 왔다. 광막(壙幕)이 넓게 펼쳐져 있고, 혈(穴)을 파 놓은 것이 연이어 세 군데였는데 서쪽을 향해 있었다. 곁의 한 혈은 판 것이 평정(平正)하지 않고 그 아래가 기울어져 있었다. 내가 역부(役夫)를 시켜 흙을 담아 평평하게 했다. 그 후에 일은 꿈을 깨고는 모두 잊어버렸으나, 관곽(棺槨)을 꿈꾼 것은 관직을 얻는 징조가 아니겠는가? 이른 아침 운무가 낀 와중에 동료 류방근(柳邦根)이 당직(當直)으로 들어왔기에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전날 밤에 소변보기가 어렵고 껄끄러워 잠을 자지 못했고, 또 한밤중에 배고픔이 심하여 북어(北魚) 서너 편(片)을 먹었는데, 또 입이 마르고 장에 갈증이 나니 매우 견디기 어려웠다. 듣기에 임금이 오늘 아침에 담사(禫祀)를 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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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二日。
日氣陰凝。似霧非霧。已一月。天之厄運。其將遏劉生靈耶。早朝入直。新經大病之餘。氣息奄奄。獨坐空廳。鄕思頓倍。且■■■■■■■■■■〔霜風膠慄。寒逼而腹冷。〕環顧都城誰能爲我投適口一匙。自念身世。若鷄官之小縻身上。豈足爲大丈夫去就之不得自由耶。還可一笑。洪上舍顯承養父某字叔智。有器局。曾以百萬金之富。得名者也。年未六十【己未生】。年前身死。■■〔今春〕夢告其子曰。汝不久出鼻邪症。若不趁治。永爲病廢之人。廣詢咸鏡道全士心爲字人。不惜萬金而治之。顯承聞命。廣求北道全姓人。忽聞鍾樓近地中。■〔茶〕坊谷吳閣監家。來住北靑人姓全。而頗知醫術云。顯承聞卽往見。問其名曰喜永。問其字曰士心。因納交試劑。今至快復之境。又其父夢告曰。吾之所居鷺石。家室排布。猝難移動。而到今事勢。難可久留。都城近地。汝當賣室。移向南道尋山去可活。不言所■〔居〕之地。顯承方夜夜燥鬱。其生父某在驪州。九月念後。爲其子。作南道遊山行。招去其子。顯承之生父。予偶逢於舊闕門外旅舍。數次接語。而頗慈詳愷悌人。與前訓將生父。今廣留泳根最緊云。顯承養父在世日。置別業于永同地。又以千餘金買土于豊基。其生父所往之地。要不出此等地云。夜■〔三〕更。電閃閃大雷。雨雷三四節。工曹大廳者震碎。當此雷電俱收之際。極爲不祥。雷雨少歇。艱得一眠。又有夢。予往先山會葬之所。賓客多集。宗族咸萃。梧溪之人亦多來會。而不能瞭然知誰。某賓客烱記面目者。河上柳咸平。有譏我愛妾之說。予答以少妻亦與少妾同。何不恕己。而嘲人耶。又河上夏亨戚姪。嘲我失孽一波。無乃東城。或其間漏胎耶。與咸平及諸賓客來葬所。壙幕廣張。開穴聯三。向西爲之。而邊一穴。鑿不平正。其下傾仄。予使役夫。畚土平之。其後事。覺來俱忘却。而得非夢棺得官之兆耶。早朝雲霧中。柳同僚邦根。以■〔當〕直入來。予還旅舍。前宵以小便艱澁未眠。且中夜飢甚。啖北魚三四片。又口燥腸渴。極爲難堪。聞自上行禫祀于今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