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 > 01권 > 1859년 > 9월 >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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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6+KSM-WM.1857.4717-20140630.0000000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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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59년 9월 25일 / 哲宗10 / 己未
날 씨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리다.
내 용
숙소에서 북청(北靑)의 의원(醫員) 전희영(全喜永)을 만났는데 그의 자(字)는 사심(士心)이고 홍 상사(洪上舍)를 따라 온 것이다. 그 사람은 의술이 사뭇 정밀하다고 하기에 내가 소변을 자주 보고 잠을 못 이루는 병을 물었다. 혹 화설(化泄)의 증세가 아닌가 하여 그 사람이 화제(和劑) 하나를 내어 주었으니 이는 축천탕(縮泉湯)의 화제였다. 익지 인(益智仁) 5전(戔), 오약(烏藥) ․ 당비해(唐萆薢) ․ 향부자(香附子) 각기 2전에 강(薑) 3편(片)을 넣어 먼저 4~5첩(貼)을 빈속에 복용한 이후에 다른 처방을 써보자고 했다. 이 의원은 막 다방곡(茶芳谷)의 오 합감(吳閣監)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임금이 순라(巡邏)를 다시 매우 신칙(申飭)하라고 하고 파루(罷漏)도 거의 날이 밝으면 하라고 하였고, 또 사사롭게 도축(屠畜)하는 것에 관한 금제(禁制)를 풀라고 하였으니, 이는 사망한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내가 도성에 들어온 지 이미 37일에 이르렀는데, 도감소(都監所)에 출입하는 것에만 골몰하고, 또 괴질(恠疾)이 사방에서 몰아닥친 상황에 밖으로 나갔다가 여기(沴氣)에 걸리고 싶지 않아 문을 닫고 날을 보내며 아무 곳에나 인사를 다니는 것도 전폐했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나가고자 하여 등창이 난 말을 타고 나갔으니 과연 무탈할지 알 수 없다. 사동(寺洞) 김 훈장(金訓將)에게 갔으나 병으로 나오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병판(兵判)도 과천(果川)으로 나가 있어서 만나지 못했다. 다만 영은 장(永恩丈)만 만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재동(齋洞)에 가서 참판(參判) 조재응(趙在應)을 만났는데, 막 그의 둘째 자부(子婦)가 이 유행병에 걸려 근심스럽게 지내고 있었기에 다음날을 기약하고 일어나 나왔다. 교리(校理) 홍종운(洪鍾雲)을 방문했다가 집으로 왔다. 한밤중에 잠을 못자고 있는데 홀연히 슬피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나니 측연히 일어나 앉아 귀를 기울여 들어보았다. 전날 곡성과 사뭇 다르게 마치 천지에 다하는 슬픔과 같았으니 필시 부모가 자녀를 곡하거나 효성스러운 자손이 부모를 곡하는 것 같다. 왼쪽에서 들으면 왼쪽에서 들리고 오른쪽에서 들으면 오른쪽에서 들리니 슬프고 슬픈 소리가 모여 마치 장차 큰 비가 몰려오는 것과 같다. 이 어찌 늙은 객으로서 평안한 마음으로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담배를 서너 대 피우고도, 밤새 잘 수 없었다.

이미지

원문

二十五日。
朝雲陰。旅舍遇北靑醫全喜永。字士心。隨洪上舍來。其人頗精術業云。故問吾數尿未寐。或化泄之症。其人出一劑。乃縮泉湯。益智仁【五戔】。烏藥。唐萆薢。香附子【各二錢】。入薑三片。先四五貼空心服後。用他劑云。此醫方住中茶芳谷吳閣監家云。自上巡更極申飭。罷漏幾乎開明。又弛私屠之禁。蓋爲民死亡也。吾之入闉。已至三十七日。而汨於都監所出入。且恠疾四逼。不欲出犯沴氣。閉戶度日。全廢某某處人事。今日始欲行之。而瘡馬跨出。果未知無頉也。往寺洞金訓將。以病不出座。未見。兵判出果川。未見。只見永恩而歸。歸路往齋洞。見趙參判在應。方以其仲子婦。染時疾。憂愁度了。故留後期起出。訪洪校理鍾雲而來。中夜無寐之際。忽哀號之聲四起。惻然起坐。側耳聽之。殊異乎前日哭聲之如歌其窮霄激壤之慟。必是慈父母之哭子女。孝子孫之哭父母。左聽則左聞。右聽則右聞。哀哀之音。凝合而若將大雨之驟至。此豈白頭遠客之所可平心成眠耶。吸草數三竹。達宵未得合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