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김중휴일기(金重休日記) > 01권 > 1859년 > 9월 >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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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6+KSM-WM.1857.4717-20140630.0000000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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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59년 9월 24일 / 哲宗10 / 己未
날 씨 어두운 안개 기운이 조금 개다.
내 용
오늘 아침 습의(習儀)에 참여하는 일 때문에 어제 밤부터 새벽까지 잠을 못 잤으니 이는 매우 심란했기 때문이다. 일찍 도감소(都監所)에 가서 여러 당상관(堂上官), 낭관(郎官)들과 함께 의정부(議政府) 습의(習儀)에 나아가 참여하고 머물던 숙소로 돌아오니 해가 이미 늦은 아침이었다. 도감 회소(都監會所)에서 듣기에 회동(會洞) 판서(判書) 정최조(鄭{宀/最}朝), 고부 수령(古阜守令) 류선(柳善)의 아들인 진사(進士) 류 모(柳某) (같은 지역 출신), 진주(晉州) 정언(正言) 하범대(河範大)와 또 사과(司果)로 승육(陞六)한 서너 명이 이 모두 유행병 때문에 어제 갑자기 죽었고, 한양 5부(五部)를 통틀어 상원(上員) 남녀의 죽은 자는 수백 명이 채 되지 않는 수이고, 하예(下隷) 가운데 죽은 자는 8천~9천 명이라고 한다. 직장(直長) 유익환(兪益煥)북촌(北村)에서 와서 하나의 처방을 보여주었다. 「구급신효방(救急神效方) : 모과[木瓜] ․ 석류(石榴) 각기 1개, 호초(胡椒) ․ 생강(生薑) 각기 7냥 중(重), 산자(蒜子) ․ 고초(苦椒) 각기 17개, 후박(厚朴) ․ 진피(陳皮) 각기 2전(戔). 위의 여러 재료들을 충분히 찧어서 즙을 내고 찌꺼기는 버린다. 호초 ․ 후박 ․ 진피는 각기 가루를 만들되 찧어 놓은 것에 넣지 않는다. 또 소금을 식도(食刀)로 세 번 센 불에 구워 곱게 가루를 낸다. 백비탕(白沸湯)에다가 아이를 보호하는 온갖 약재들을 타서 매 회 2~3전씩 온복(溫服)한다.」라고 되어 있다. 상사(上舍) 홍승현(洪顯承)은 곧 고(故) 산림(山林) 직필(直弼)의 족인(族人)인데, 산림의 집안과 인접한 노돌리(露突里)에 거주하고 있고, 여주(驪州)에서부터 들어온 집안의 후손인 자이며, 고향에 생부(生父)와 생형(生兄)이 있다. 그 사람과 누차 나의 여관에서 상봉하였으니 이는 내가 과거를 치를 때 그가 여관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은 이름난 거부(鉅富)인데, 사람 됨됨이는 청약(淸弱)하고 비병(鼻病)이 있었으나 자질은 매우 좋은 자이다. 장차 이번 겨울에 집을 팔고 장동(壯洞)으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이는 산림의 집이 이번 가을에 이미 먼저 장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그의 심정을 헤아려 보니 낙향할 의사도 사뭇 많았다. 듣기에 전날 밤에 임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영은 장(永恩丈)이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가 종일 나오지 않았고, 오늘 아침에 조금 감세(減勢)가 있었다고 한다. 또 듣기에 광통교(廣通橋)에 괘서(掛書) 사건이 있었는데 제때 철거했다고 한다. 전언(傳言)중에 5분의 4 정도의 이로운 것만 말해 나머지는 기록하지 못한다. 홍 상사(洪上舍)의 생가(生家) 또한 거부였는데, 그의 계숙(季叔) 박(朴)은 전동(磚洞) 조 훈장(趙訓將)에게 당시 4만 금(金)을 주고 백의(白衣)로 맹산 군수(孟山郡守)가 된 자이다. 그의 집안이 대대로 경사부(京士夫)였는데도 이러한 일이 있는데, 하물며 영외(嶺外)의 사람에게 있어서랴. 세상에 분개하는 탄식이 없지 않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의 주인인 태위장(太衛將)의 첩(妾)이 장차 모레 상간에 괴질(恠疾)을 피해 인천(仁川)의 친가(親家)로 간다고 하였고, 나 또한 오래 머물 뜻이 없어서 오늘 우선 옷가지 한 보따리를 반주가(泮主家)로 보냈다. 모레 직(直)을 마치고 나온 이후 반촌(泮村)에 들어갈 계획이다. 앞으로 허다하게 많은 공고(公故)를 어떻게 다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매우 시름겹고 고민되어 밤에 편히 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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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二十四日。
霧暗之氣少霽。今朝以參習儀事。前宵達曉未寐。蓋多心亂也。早往都監所。與諸堂郞進參議政府習儀。還所寓旅舍。日已晩朝矣。都監會所聞。會洞鄭判書{宀/最}朝。柳古阜善之子進士某同道。晉州河正言範大。又司果陞六三四人。俱以時疾。昨日猝死。通五部上員男女死者。不滿數百。下隷死者八九千云。兪直長益煥自北村來。示一方曰。救急神效方。木瓜。石榴【各一箇】。胡椒。生薑【各七兩重】。蒜子。苦椒【各十七箇】。厚朴。陳皮【各二戔】。右諸料爛擣。取汁去滓。而胡椒厚朴陳皮各作末。不入於擣內。又以鹽食刀三猛煮細末。白沸湯一保兒調和諸件。每二三錢式溫服云。洪上舍顯承卽■■■〔故山林直弼〕之族人。與山林家接隣居露突里。卽自驪州入后者也。有生父生兄於故土。其人屢次相逢於吾之旅館。乃渠之科時主人也。其家以鉅富得名。爲人雖淸弱鼻病。而姿質甚佳。將以今冬賣家入壯洞云。蓋山林家今秋已先移壯洞故也。考其中情。落鄕之意頗多。前宵聞上候不安。永恩丈入大內。終日不出。■今朝少有減勢云。廣通橋又聞有掛書。趁時撤去。傳言只道切五分四利。其餘未記。洪上舍之生家亦鉅富。其季叔。朴磚洞趙訓將當年納四萬金。以白衣爲孟山郡守者也。其家世京士夫。而有此等事。況嶺外之人乎。不無慨世之歎。所寓太衛將之妾。將以再明間。避恠疾於仁川親家。吾亦無久住之意。今日先送衣封一負于泮主家。擬再明出直後入泮計。向後許多公故。未知何以爲之也。極爲愁憫。夜穩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