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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6+KSM-WM.1796.4717-20140630.00811020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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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00년 8월 5일 / 正祖24 / 庚申
날 씨 맑다가 흐리다가 하다.
내 용
부리(府吏)가 글을 써서 보내 알리기를 대행대왕(大行大王)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고 묘호는 정종(正宗)이며 전호(殿號) 효녕전(孝寧殿)이고 능호(陵號)는 건릉(健陵)이라 하였다. 향청의 소리(所吏)가 여러 곳의 폐지를 베껴서 보냈는데 첫 번째는 구담(九潭)의 상사(上舍) 신광협(申光恊)의 것이었고 두 번째는 소호(蘓湖)의 참봉(參奉) 이우(李㙖)의 것이었고 세 번째는 가구(佳丘) 상사(上舍) 안명술(安命述)의 것이었다. 신 진사(申進士)[신광협(申光恊)]가 자기 이름이 남인들의 임안(任案)에 들어가 있는 것을 비루하게 여겨 패지(牌旨)를 내었다. 전문은 기록하지 않고 대강의 뜻은 "만약 나의 이름을 제거해서 보내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을 것이고 문제가 있음에 이르면 반드시 큰 풍랑이 발생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말뜻이 매우 준엄하였다. 이 침랑(李寢郞)[이우(李㙖)]이 패지를 내어 답하기를 "처음에 서인(西人)이 섞여 있는 것이 탄식스러웠으니 그 이름을 제거하여 임안에서 삭제해야 한다. 비록 신 상사(申上舍)[신광협(申光恊)]가 아니더라도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는가." 라고 하였다. 안 상사(安上舍)[안명술(安命述)]가 낸 패지의 뜻은 자기가 만든 임안이 남인 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쓰이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으로 패를 내었는데 그 첫 머리에 이르기를 "듣기에 내가 만든 임안은 사안(私案)이라 하여 없애고 쓰이지 않을 거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또 이르기를 "소호 이씨, 법흥 이씨, 의성 김씨 세 개의 성은 임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나 또한 말할 것이 있다. 당초 임안을 만들 때에 어떤 사람이 승지 김한동(金翰東)의 말을 전하여 이르기를 "명색이 남인들의 임안이라 하는데 서인들이 임안에 들어간 것이 어찌 쓰이겠는가. 우리 집 자제로 그 중에 들어가 있는 자를 마땅히 제거하라." 라고 하였고 소호(蘇湖) 이씨, 법흥(法興) 이씨 또한 위의 의견과 다르지 않았다고 하여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세 성씨에 원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한 것일 뿐이다. 안씨의 패지 아래 함부로 하는 말이 말단에 까지 있었다. 어찌 한 고을을 낮춰 보는 것이 이러한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심하구나. 인심이 옛날과 다르구나. 또 영문(營門)과 본관(本官)의 말을 핑계로 삼은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소호(蘓湖)에서 패지를 또 내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안씨(安氏)는 ‘사(私)’ 한 글자를 말하려고 하는가? 사촌 내의 친척과 함께 직임을 맡는 것을 피하는 것은 비단 향약에서 그러할 뿐만 아니라 국법에서도 또한 피하는 것인데 안씨는 임안에서 그 관례를 피하지 않고 숙질도 아울러 써 넣었으니 이것을 가리켜 사적인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안씨(安氏)중에 임안에 들어간 자는 여덟 명에 이르는데 남인(南人)인 안씨는 곧 한 사람도 없으니 서인(西人)인 안씨는 과연 몇 사람이 들어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안씨 패지 중에 감영의 제음(題音)이 전관(前官)의 말과 어긋나니 이것은 안씨가 스스로 믿는 것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군자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사대부의 일처리는 공명정대하여야 하고 오직 도리에 의거하여 말해야 하는데 어찌 관장(官長)의 말을 빙자하여 공갈하고 협박하여 승리를 취하는 바탕으로 삼는가."라고 하였다. 끝에서 이르기를 "지금 국상에 대한 성복하기 전에 다툼의 단초가 발생하였는데 이른바 사슴을 쫓느라 태산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반드시 싸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안(案)을 깨뜨릴 것이니 여러 군자께서는 절치부심하는 마음에 보답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대부(大父)께서 답변을 보내 이르기를 "소호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통쾌하게 만드는 구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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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五日
半晴半陰。府吏書告。大行大王謚號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廟號正宗。殿號孝寧殿。陵號健陵云。鄕廳所吏謄送各處牌旨。其一。九潭申上舍【光恊】。其二。蘓湖李參奉【㙖】。其三。佳丘安上舍【命述】。盖申進士自以其名入南中任案爲卑陋出牌。全文不記而大意曰。若不割送吾名。當有過舉。至於過舉。則必有大風浪。辭意甚峻。李寢郞答牌謂。初以西人混入者。不無慨然。當割其名。放諸錄外。雖無申上舍。豈無他人乎云云。安上舍牌意。則盖以自家所爲任案。南中以偏私不用。故出牌其起頭曰。卽聞吾之所修任案謂之私案。而罷不用云。果否。又曰。以蘓李法李虎金三姓之不入爲言云。此則吾亦有發明者。當初修案時。有人來傳金承旨【翰東】之言曰。名爲南中。而入於西案者。將安用之乎。吾家子弟有入其中者。當削去云云。蘓湖法興亦無異同云。故不錄焉。非有嫌怨於三姓也。蓋亦不敢書耳。其下無非慢罵之語至末端云。何其低視一鄕至此哉。甚矣。人心之不古也。又以營門及本官藉言顯顯可見。蘓湖牌旨又出。若曰。安首果欲辭一私字乎。四寸避嫌。非徒鄕約爲然。在國法亦所應避。而安錄不避之以叔侄幷書。指此而謂之。不私可乎。又曰。安氏入錄者。至於八人之夥。而安氏南中。則無一人焉。西人安氏中。果有幾人乎。又曰。安牌中營題背馳前官等之說。此可見安首之自負有在也。雖然。吾甞奉敎於君子矣。士大夫行事磊磊落落。惟當㨿理而言。豈爲憑藉官長恐喝脅制。以爲取勝之資耶。末言方今國哀成服之前。乃發爭競之端。正所謂逐鹿而不見泰山者也。正若必鬪乃已。則吾當自破吾案。以謝僉君子切齒之心矣云云。於是大父題送曰。蘓湖文字。甚快人意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