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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6+KSM-WM.1796.4717-20140630.00811020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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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00년 6월 6일 / 正祖24 / 庚申
날 씨 아침에 비가 그치다.
내 용
낮에 가구 숙(佳丘叔)이 용궁(龍宮)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한 달 전에 풍산(豊山) 사람이 예읍(醴邑) 김성윤(金成胤)의 묘에 투장(偸葬)을 하였다. 김 씨(金氏)의 집에는 다만 과부 세 사람과 십 여세의 어린 아들만 있는데,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여 관에 소송을 넣었지만 관에서는 돌보아 보호하지 않고 도리어 공갈하는 위세를 부렸다. 그 아들이 이에 그 묘를 파고 자수하였는데, 관이 크게 노하여 곤장 삼십 대를 치게 하였다. 과부가 그것을 듣고 비를 맞고 관아에 들어가 슬피 울면서 상대하니, 관이 아전을 시켜 끌어내게 하고, 다시 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이에 공론이 자자하여 뜬소문이 시끄러웠다. 무이(武夷) 이 진사(李進士)와 금곡(金谷) 박태녕(朴台寧)이, 이 일에 서로 관련되어 용궁수령(龍宮首領)이 하인 삼백 명을 내어 그 집을 에워쌌다. 이 진사는 다락 안에 숨어 있었는데, 아전이 그 여종을 붙잡아 고문하며 물으니, 그 여종이 견디지 못하고 이실직고 하였다. 이에 서로 함께 집안의 뜰에 갑자기 들어가 큰 나무로 벽을 쳐서 마침내 그를 끌어내었는데, 욕설을 수없이 하였다. 이로 인해 관정(官庭)에 잡아들였는데, 다른 아전이 태학생(太學生)이라서 어렵다고 하였다. 이방 이덕배(李德陪)가 말하기를, ‘안동(安東)에서는 왕년에 태(笞)가 제일 상사(第一上舍)에게 미쳤으니,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박태녕이 듣고서 스스로 나타나자 수령이 곤장 일곱 대를 치는 것으로 영문(營門)에 소장을 올리니, 감사가 판관에게 맡겼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진사가 안동 영리(安東營吏)를 뵙고 어떤 조목으로 벗어날 뜻을 이야기하자, 영리가 ‘소인이 어찌 감히 소홀히하겠습니까만, 영법(營法)에 형장(刑杖) 전에는 원정소지(原情所志)를 시행하지 못하니, 과연 주선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상사(李上舍)가 욕을 당한 후에 헐청(歇廳)에 나가있을 때 이덕배가 성찬(聖餐)을 올리자, ‘그 안에 약이 들었는가?’라고 물으니 이덕배가 벌벌 떨면서 물러났다. 대개 이놈은 전후로 양반을 능욕하는 것이 다반사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일 후에 각 읍의 통문이 차차 날아왔는데 안동(安東), 상주(尙州), 함창(咸昌), 선산(善山)의 통문이었고, 선산은 두 곳에서 통문을 보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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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六日。
朝雨歇。▣(聞)午佳丘叔自龍宮還語曰。月前豊山人逼葬於醴邑金成胤墓。金家只有寡女三人及十餘歲幼子。不勝寃鬱。入訟於官。官不顧護。反有恐喝之威。其子【此事恐不◘】乃掘其墓而自首。官大怒。决棍三十。寡女聞之。冐雨入庭。相對悲泣。官使吏曳出。復收子拘囚於獄。於是公論藉藉。飛語喧傳。武夷李進士與金谷朴台寧有相干事。龍宮倅出下人三百名圍其家。李進士藏在樓中。吏捕其婢拷詰。其婢不能堪告以實。於是相率突入於內庭。以大木打壁。遂拽出之。無數辱說。因捕入官庭。他吏以太學生難之。吏房李德陪曰。安東徃年笞及第一上舍。何憚之有。朴台寧聞而自見。倅决棍七箇。以狀呈達于營門。監司屬之判官云。又曰。李進士見安東營吏。喩以某條圖脫之意。對曰。小人何敢歇後。然營法刑杖前原情所志不得施行。果難周旋云。又曰。李上舍見辱後。出坐歇廳。李德陪盛飱以進。問曰。其中有藥乎。德陪悚慓而退。蓋此漢前後凌辱兩班無数云。又曰。此事後各邑通文次次飛告安東尙州咸昌善山。而善山則二所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