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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601년 9월 30일 / 宣祖34 / 辛丑
내 용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에 관한 상소를 하는 일 때문에 여일(汝一)과 함께 향교로 들어가 묵었다. 경범(景範)도 함께 했다.

이미지

원문

○ 晦日。
以守愚陳疏事。與汝一入校宿。景範亦同。

주석

최영경(崔永慶) : 1529~159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서울 출생. 전라도방백(方伯) 중홍(重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하현감 훈(壎)이고, 아버지는 병조좌랑 세준(世俊)이다. 어머니는 현감 손준(孫濬)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학행으로 1572년 경주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고, 연이어 수령ㆍ도사ㆍ장원(掌苑)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575년 선대의 전장(田庄)이 있는 진주의 도동(道洞)으로 은거하였다. 마침 나라에서 사축(司畜)에 제수하고 그를 부르자, 잠시 나가 취임했다가 곧 그만두었다. 정구(鄭逑)ㆍ김우옹(金宇顒)ㆍ오건(吳健)ㆍ하항(河沆)ㆍ박제인(朴齊仁)ㆍ조종도(趙宗道) 등과 교유하였다. 1576년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창건하여 스승 조식을 배향하였다. 이듬해에는 외아들 홍렴(弘濂)이 죽는 불행을 겪었다. 1581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이 상소에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1585년 『소학』ㆍ사서(四書)의 언해를 위한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90년 정여립 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유령의 인물 삼봉(三峯)으로 무고되어 옥사(獄死)하였다. 당시 정적 정철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1591년 신원되어 대사헌에 추증되고, 사제(賜祭)의 특전이 베풀어졌다. 1611년(광해군 3) 산청의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