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문중 자료 > 일기 > 김정섭일록(金鼎燮日錄) > 02권 > 1924년 > 3월 >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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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3+KSM-WM.1920.4717-20110630.00631020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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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924년 3월 15일 / 甲子
제 목 만수의 참변 소식을 듣다.
날 씨 맑다.
내 용
닭 우는 새벽 시간에 향례(享禮)를 잘 치렀다. 아침에 낙건(洛建)씨를 체천(遞遷)하고 돌아왔다. 치오(致五)씨의 장자인 만수(萬秀)가 경신년(庚申年; 1920) 봄에 청국(淸國)에 들어갔다가 수년간 소재를 알 수 없었다. 이번 봄에 몇 차례 그의 집으로 서신을 부쳐왔는데, 현재는 하얼빈〔哈爾濱〕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가 장춘(長春)에서 경관(警官)들이 독립당(獨立黨)의 뒤를 탐색하며 청(淸) 수비대와 더불어 밤에 객점에 들어가 머물고 있었는데 결국 형사부장을 포살했다. 이달 초 2일에 청병(淸兵)이 포위하여 폭탄을 던져 3명이 즉사했다. 이어서 청의 공동묘지에 매장했는데, 이윽고 조선인들이 머물러 있는 당파에서 의(義)를 떨쳐 그들을 추도하고 장차 조선인 묘지로 개장했다. 왕(王) ․ 유(柳) 두 사람은 옷단에 도장이 있어서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만수는 곧 빙험(憑驗)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온 몸을 점검 받았는데 왼쪽 팔다리에 그의 성명과 생년월일을 문신 해 있어서 비로소 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신문 상에 나와 있었다. 막 간절히 의아해하던 즈음에 길림(吉林)으로부터 문중에 편지가 왔으니 참악하고 놀라고 슬퍼서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했다. 이어서 모여 곡을 하고 초혼(招魂)을 한 후 각각 부조금을 기부하여 유족들을 구휼했으니 대저 그 사람의 평소 생활이나 일 한 바는 비록 칭할 만 한 것은 없었으나 경관을 살해한 것만 봐도 담략이 매우 컸고, 팔과 다리에 이름을 새겨 일찍이 말가죽에 쌓여 돌아 올 뜻을 품고 있었으며, 땅에 묻힌 지 여러 날이 되어서도 육신의 색이 변하지 않았으니 어찌 의열(義烈)함이 지극한 자가 아니었겠는가? 말단이 귀한 세상이 되어 족히 여러 잘못을 덮을 수 있는 시대에 어리석은 나만 홀로 ‘그의 죽음이여, 매우 장하다’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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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十五日【丁卯】
晴。鷄鳴時。利行享禮。朝遞出洛建氏而歸。致五氏長子萬秀庚申春入去淸國。數年不知所在矣。今春數三次付信其家。现住哈爾賓〖濱〗云矣。去念後抱殺日部將其警官必用情於淸國守備將去念五〔長春警官。跟探獨立黨。與守備隊。夜入留店。則竟砲殺刑査部將。今初二日〕。兵圍迊投爆。三人即死。因埋於共同地。於是人在留黨派。奮義追悼。將改葬鮮墓地。二人。有圖章於裔。故知其名。萬秀則無所憑驗。點檢渾軆。左臂脚黥刻其名姓生年月日。始乃覺之。出於新聞上。方切疑訝之際。自吉林抵門書來到。慘愕驚怛。令人氣塞。因會哭招魂。各捐助金。救恤遺族。大抵其人平居所事。雖無可稱。能殺警官。膽畧甚大。臂脚刻名。曽有包含其褁革之志。而埋土多日。肉色之不變。豈非義烈之致耶。末莭爲贵。足掩諸過。愚獨曰。其死也。甚壯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