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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2+KSM-WM.1823.4728-20100731.900110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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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39년 10월 11일 / 憲宗5 / 己亥
제 목 우귀신행을 하다.
날 씨 아침에 비가 내리고 오후에 햇볕이 나다.
내 용
우귀신행(于歸新行)을 하였다. 김필환(金必煥) 사장(査丈)께서 신부를 데리고 와서 하루 밤을 묶고 돌아갔다. 이해 향임(鄕任)과 원임(院任)의 임원을 결정하고자 지방관청인 상주현(尙州縣)과 경상감영(慶尙監營)에 명단을 올렸는데 향당에서 올린대로 수석(首席)과 부석(副席) 모두 본부에서 허락하였다. 삼종형 낙원(洛源)씨 낙범(洛範)씨가 앞장서서 새로운 임원을 선출하자고 발문(發文)하여 한 고을을 뒤흔들어 다시 창건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일이란 때를 기다려야 하고, 때란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하였으니 그 역시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존도(存道)의 류(柳)씨들이 새로 임명된 임원들 명예를 공격하는 통문을 발송하니 그것은 근본을 잊은 행동으로 매우 개탄스럽고 개탄스럽다. 둘째 아이 확석(確石)이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나이가 여섯 살로 글재주가 있었다. 8월에 두 조카를 데리고 성주(星州)에서 거행된 식년시(式年試)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 왔다. 상시(上試)는 서씨이고 부시(副試)는 김두명(金斗明)형이었다. 감시(監試)의 제목은 ‘옛날 군자들은 반드시 옥을 차고 다녔는데 오른쪽에는 치(徵)음과 각(角)음이 나는 옥을, 왼쪽에는 궁(宮)음과 우(羽)음이 나는 옥을 차고 다녔다.’이였다. 경기도 내에는 西學(천주교)이 크게 일어나 무수한 남녀를 형벌로 죽였는데, 성 밖의 여러 곳에 범법자들이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겨울 석 달 동안 비나 눈이 오지 않았다. 종손 종표(宗標)씨의 맏아들이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며 맏조카 집에서 강독하고 제술(製述)을 공부한지 지금까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미지

원문

十月
十一日
新行。朝雨午暘。査丈金必煥氏帶來一宿而旋。是年。有鄕任院任三所事呈官呈營營。本府皆時題鄕堂先有首副席許任之事。三從兄洛源洛範氏首唱發文。傾動一鄕。幾於更創之境。事有待時。時亦待人。其亦此之謂歟。存道柳氏以新儀之名。打發通之人。其忘本也極矣。可慨可慨。次子礭石入學。年六歲。有文才焉。八月。率兩侄觀光式科于星州而還。上試。副試金兄斗明。監試題古之君子必佩玉右徵角右宮羽。畿內西學大熾。刑殺男女無數。至于城外。往往犯科者。不知幾許云。冬三月不雨雪。宗孫宗標氏長子。以秀才來接長姪家。講讀製述者。于今數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