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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2+KSM-WM.1823.4728-20100731.900110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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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32년 7월 1일 / 純祖32 / 壬辰
제 목 아버지께서 마루에 앉아 계시다 우연히 낙상을 당하시다.
날 씨 맑다.
내 용
이날 외출했다가 돌아와 아버지를 뵈오니 아버지께서 마루에 앉아 계시다 우연히 낙상(落傷)을 당하셨는데, 그때 맏조카가 집안에 있어서 즉시 부축하여 응급조치는 하였다고한다. 그러나 등 뒤쪽이 당겨 당목향(唐木香)을 달여 따뜻한 술과 함께 며칠을 복용하였으나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이로부터 더위 먹은 서증(暑症)이 다시 발병하였는데, 아버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서증(暑症)과 냉증(冷症)을 앓아 왔었다. 중년인 임오․계미년 이후로 여름만 되면 서․냉증의 두 가지 증세로 여러 달을 고생하시다가 날씨가 선선해지면 점차 차도가 있어왔다. 그러므로 올해 여름에도 비록 본래부터 편안치 못한 증세로 고생하고 계시지만 가을이 되면 틀림없이 괜찮아지리라고 믿고 있다.
8월에 이르러 숟가락과 젓가락질 하는 근력이 점점 떨어졌고 설사 증세까지 있었으며 간혹 복통이 오기도하였다. 이달에 홍수가 나서 강과 들판이 물바다가 되어 푸른빛이라고는 없었다. 장마가 여러 달 계속되어 오곡이 결실되지 못하고 본래 씨를 늦게 뿌려 흉년에 가깝다하겠다. 또 수해(水害)때문에 팔도가 흉년이 들었는데 경기도가 가장 심하며, 산골짜기와 강가에 사는 사람과 짐승들이 입은 수해가 올해같이 참혹했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환후가 오랫동안 낫지 않더니 9월 달에 이르러 때마다 다르고 날마다 심해지시었다. 비록 대단한 고질병은 아니었지만, 원기가 몰라보게 줄어들고 피부가 매우 거칠어져 원기를 보양하고자 소의 천엽과 닭고기 등을 잡수시고, 사이사이 인삼이 섞인 약제를 복용하였으나 회복이 더디어 옆에서 모시는 우리들로서는 매우 안타깝고 걱정스러웠다.
80노인의 오랜 우환에 자손 된 자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깨닫질 못하겠다. 그러나 정신은 여전하시며 사물의 판단이 분명하고 경계하시는 것이 밝고 엄하시어 온 집안이 뜻밖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송인겸(宋仁兼)의원에게도 물어봤더니 맥박이 고르지 못하나 다른 염려나 불안할 것까진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앓으신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 9월 이후에 점점 숨결이 가빠지고 가슴과 배의 통증이 회복인복(蛔腹蚓腹)으로 생긴 증상인 것 같아 산사탕(山査湯)과 강밀탕(薑蜜湯)을 오랫동안 복용하였다.
윤 9월에 이르러 정신은 비록 평상시와 같았으나 호흡이 매우 순조롭지 못하여 끊어질 것만 같았고 원기(元氣)가 점점 소멸되어 갔다. 상황이 이렇게 어그러져 갈 때 우리들은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고 지키며 수 십 차례 음식을 드렸지만 겨우 서 너 번 받아 잡수시었다. 큰조카가 받들어 모신 이후로 봉양함이 여느 때와 같은 지극한 정성으로 비록 심한 추위나 큰 비가 닥쳐도 피하지 않았으며 어렵고 힘든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종일관하였다.
할아버지를 봉양함은 비길 데 없었으며 탕약과 미음을 드릴 때는 반드시 자신이 정성되고 간절함으로 절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대개 이러한 효성(孝誠)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리라. 맏형이 비록 일찍 죽었지만 그 깊은 사랑과 두터운 덕이 없어지지 않고 대를 이어 실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성된 마음으로 봉양함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이 같은 도량 넓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들은 하나 같이 회복을 바라면서 아버님의 옆에서 밤을 지새우다 혹시 눈물을 흘리니 아버님께서 거듭거듭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울지 말아라. 내 나이 일흔일곱에 빈손으로 성가(成家)하여 너희 4형제를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게 하였고, 대략의 문자는 알아 무식함과 아둔함을 다행히 면하게 하였으며, 막내손자도 과거를 준비하고 있으니 금년이 비록 흉년이라고는 하나 논밭에는 곡식이 익어가니 추수를 하게 되면 앞으로 제사를 모시는데 곤란하고 어려운 폐단을 없을 것이니라.’하시었다.
대개 선조의 제사를 모시는 범절이나 밭과 토지에 있어서는 평일에 이미 구분하여 나누었기 때문에 되풀이하여 말씀하시지는 않으셨다. 그 밖의 가까운 일가 중 어려운 형편으로 제사를 잘 모시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록 기력이 쇠퇴한 가운데서도 자주 자주 걱정을 하시었다.

14일에는 삼종 형 낙주(洛疇)씨를 불러 경계하시기를 ‘참봉공(參奉公)의 종손은 이미 재산을 탕진하여 유리걸식하고 있으니 너의 자손들 모두가 형편에 따라 골고루 부담하여 종가를 돌보아 주어야 할 것이며, 비록 두어 가지 포와 과일일지라도 합력하여 조상의 제사를 빠뜨림이 없도록 하여라.’고 당부하시었다. 이 때 돌아눕는 것조차도 도움이 있어야하고, 음식을 드실 때도 사람을 기다리며 항상 침상에만 누워 계시었다. 날로 엄엄(奄奄)하시어 우리들의 걱정과 두려운 마음이 절박함이 그지없었다. 이 날 초저녁에 여러 종질들을 오라고하여 ‘요 며칠 내로 나는 세상을 떠날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삼가 밖에 나가지 말고 좌우에서 기다리라 하시었다. 15일 유시(酉時)에 처음으로 미음을 드렸더니 겨우 몇 숟갈 받아 잡수시더니 갑자기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아! 애고(哀孤)! 애고! 자애롭기가 비길 데 없는 아버님께서 어이 이렇게 떠나시는가요? 어지신 우리 아버님 어이 그리 빨리도 가시는가요? 여러 자식 여러 손자 누구인들 깊은 슬픔이 없으리오만 종명누진(鐘鳴漏盡)토록 아버지의 덕망과 유업(遺業)을 이어받지 못한 아들이 되었으니 더더욱 슬픕니다. 오늘에 이르러 이게 무슨 변고입니까? 이 무슨 변고인가요? 발을 구르고 가슴을 쳐봐도 스스로 죽지 못한 원통함에 지극한 서러움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천하에 자식 된 자로서 누가 이를 감당치 못하겠는가마는 불초한 저의 죄는 너무 깊고 혹독합니다. 삼종형 낙원(洛源)씨가 여러 일가들과 함께 고복(皐復)을 한 후 애통하게 곡을 하고, 예에 따라 호상(護喪)이 각처에 부고(訃告)를 띄웠는데 친인척과 멀고 가까운 지인, 친구에게 보낸 부고가 80여장에 이르렀다. 맏형이 이미 죽어 맏조카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승중상(承重喪)을 입게 되니 등친지한(等親之恨)이 한스럽고, 아버님이 속광(屬纊)하시던 날 저녁, 맏형이 없으니 더욱 서럽고도 박절하였다. 둘째형 또한 이미 지하의 고혼이 되었으니 삶과 죽음이 하나이니 죽음이 어찌 다르다 하리요. 애고 애고 ! 불초의 죄를 어찌 하오리까!
16일 아침에 돈장(敦匠)일의 목수는 친척 홍상주와 괴동(槐洞)의 임덕흥(林德興)이 함께 하였다. 관(棺)을 만들 나무는 지난 해 예천(醴泉)에서 사온 것이다. 좋은 나무로 장방(長房)을 만들어야 한다고 예로부터 일컬어 왔으나 그런데도 지극히 좋지 않는 나무인지라 한스럽고 안타깝다. 염습(斂襲)과 수의(襚衣)는 명주로 이미 예전에 일습(一襲)을 준비를 해 두었고 멱건(幎巾)과 악수(握手)도 또한 모직물로 하였고 폭건(幅巾)과 대대(大帶) 역시 모직물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심의(深衣)를 준비하지 못하여 생명주(生明紬)로 만든 도포를 사용하였는데 집이 넉넉지 못한 것 아니라 아는 것이 넉넉하지 않아서이다. 삼베 열 필을 사다가 오복(五服)에 따라 상복을 모두 지어 4일 성복(成服)을 하고 바깥채 서쪽 윗방에 빈소를 만들었다. 장례를 주관하여 처리할 사람들을 정하였는데 호상(護喪)은 허종구(洪宗九)씨, 상례(相禮)에는 홍재연(洪載淵)씨, 사서(司書)는 홍낙원(洪洛源)씨, 사화(司貨)는 홍채린(洪彩麟)씨, 조빈(造殯)은 류순조(柳舜祚)씨, 돈장(敦匠)은 구한탁(具漢倬)씨가 맡았다.

오호! 애고! 한 달이 지나면 겨울철로 바뀌고 장례할 달이 닥쳐오니 애통한 심정을 다 할 수 없으나 그러나 마음을 다스려 양례를 잘 경영하여야 할 것이다. 23일 조카 석모(錫模)가 함창(咸昌) 증동(曾洞)에 가서 지사(地師) 이중건(李重乾) 생원을 모셔와 점심을 먹고 동산(東山)의 선영(先塋)에 갔다. 선영 근처에 부장(祔葬)할 만한 곳이 있으나 년운(年運)이 맞지 않고 다른 곳은 있어도 너무 좁고 작았고, 선영의 백호견(白虎肩) 임감용(壬坎龍) 자망(子望)이외에는 점지할 곳이 없었다. 비록 그렇더라도 이곳은 말썽이 있었던 곳이며 마을이 아주 가깝고 그 아래는 별묘(別廟)가 있다. 때문에 지난 임오년(1822)에 삼종형 낙원 씨가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이곳에다 묏자리로 하고자하였으나 우리 집에서 별묘(別廟)가 있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삼종형은 장사랑공(將仕郞公)묘소의 바로 아래 유좌(酉坐)에다 묏자리를 구걸하여 장사지냈다. 그 당시 집안 어른들이 말하길 이 지점은 파(派)가 갈라진 이래로 자손들이 장사지내지 않은 곳이라 하였다. 그 후 두 집안이 서로 의거하여 이도 금하고 저도 금한다는 것은 도리가 되지 못한다.

또 6촌의 장례는 가히 금지하지 않으면서 우리 두 사람의 의론은 불가하다고 하니 무릇 다른 일가들로서 비교하여 두루 자손이 生養의 분별이 있고 宗支의 다름이 있으나 어찌 가히 장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겠는가? 문자는 마음 상함을 허락하니 이 子坐는 버려두었다. 오늘 불초한 죄가 쌓여 이러한 罔涯함을 만났고 다음 날 白寺에 가서 內洞에 있는 先塋의 아래 一間 역시 발붙일 곳이 없어 종일 헛되이 돌아다니다가 돌아왔으니 애통할 뿐이요. 망극할 따름이다. 子坐 외에 다시 뜻하는 완전한 지점이 없으니 이날 저녁에 나(不肖)는 여러 일가가 합석한 자리에서 발설을 하였더니 어느 누구도 놀라고 당황하는 자가 없고 묵묵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날로부터 山事을 고하고 다음날 사람과 말을 갖추어 보내어 일을 하게 하고 생원 李重乾씨는 당시에 銀尺으로 이사를 하였고 재종숙이 와서 집에 머물렀는데 역시나 이 자리(葬地)를 금지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 아재 또한 先老들과 같이 늦게 와서는 相依한 말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때문에 오늘 山事에서 비록 박절하긴 했으나 가히 금지하여 결단하지는 않았다. 가장 말하기 어려운 사람은 삼종형 집인데 私廟가 거의 여섯 가구를 누르며, 산사람이 사는 곳과 가장 가까우니 간절하게 설득하여도 장례의 의사를 용납하지 않았다. 대개 그것을 금지하고자 하는 자는 실제로 장례를 금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거처한 곳을 절박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나(불초)와 조카들은 주야로 슬퍼한지가 거의 10일에 이르고 삼종형 또한 서로 향하여 애통해 한 것을 헤아릴 수 없다. 뒤집어 자신을 돌아보아도 역시 괴이함이 이와 같을 수 없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삼종 형이 우리들을 불러 말하길 양가가 서로 의거하다가 지금 큰일을 만나 오히려 서로 다투고 어그러지게 되었다. 모든 일이 굽어지고 어긋남을 헤아리고 이와 관련하여 분명하게 하는 것은 私合하고 從便하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安葬의 뜻을 특별히 허락하고 논쟁은 그만두었으면 한다고 하니 내 입장에서는 슬픔을 그치고 奄道를 용납하지 아니하니 후세 양가 자손이 모두 사람의 도리를 따르고 금수의 마음을 면하는 것을 그 누가 감히 터럭만한 일로서 서로 싸움을 하게 하겠는가? 잊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마음을 억누르고 모든 절차에 여러 종형들이 힘을 다해 도와서 輓祭를 모두 갖추니 悲情이 모름지기 깊었다. 대개 사람이 난처한 일에 처하여서 이와 같이 그것을 단호하게 잘 처리한 자가 이것이 잘 못이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마땅하다! 그 가문을 창대하게 하고 복이 後昆에 미칠 것이다.
안장 날자는 10월 18일 辰時에 정하였고 5일 전에 金井을 열고 하루 전에 발인을 하였다. 山役군의 찬은 종형집에서 갖추어 제공하였고 朝夕에 虞제사를 지내고 당일 需제사를 지냈는데 네 상가로부터 갖추었고 山神祭節은 金생가로부터 갖추어 제공받았으니 각각 집마다 힘에 따라서 情事를 폈다. 한스러운 것은 금년의 일이 크게 무고하고 모든 일에 있어 매번 극진하지 못하였던 것 그 情이 깊이 애통하다 할 만하다. 여러 일가에서부터 멀고 가까운 지인과 친구 그리고 상놈들이 드러내어 돕지 않음이 없었고 와서 보고 슬퍼함이 깊었다. 진시에 하관을 하고 誌石을 세우고 外壙을 채웠다. 이 날 갑자기 추워져서 두 고을의 軍丁들이 부역을 마칠 수가 없었다. 신주를 만드는 것(造主)은 이에 成在升 어른이 곧 燈巖 李생원에게 청하여 왔고 신주 쓰는 것(題主)은 글을 잘 쓰는 자를 구하였으나 당일 회원들 가운데 별반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 경모에게 쓰게 했다. 5일에 졸곡을 하고 26일이 지나자 날씨가 매우 화창하여 눈비가 풀렸기 때문에 집안의 군정을 거느리고 山地에 올라가 沙草(흙을 덮고 잔디를 심음)를 마치니 情地가 조금 편안했다. 山地가 坐 壬坐로서 썼으면 좌향이 모두 마땅할 듯 한데 丙子生에게는 7條가 된다고 하기 때문에 子坐를 써서 外向은 장래 壬坐로서 坐를 돕게 할 뿐이다. 동짓달은 크게 가물어서 한 방울의 눈비가 없었다. 12월 3일은 돌아가신 아버님 생신이다. 애통망극하다. 「단괄(袒括-부모상을 당하여 한쪽 소매를 입지 않은 것)한 날」슬픔을 줄이지 못하고 종일토록 몰아쉬는 숨소리의 여운조차 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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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七月
初一日
晴。是日自外還。省則家君坐於堂上。偶爲落傷。其時伯侄在家內。卽出扶護。然背部牽引卽。煎唐木溫酒。服之數日。委頓未幾向差。自此以後。暑症更發。家君自少時。本有暑冷之症矣。中間壬午癸未後。當夏則二患暑熱。呻吟數月。而向于寒節。則漸漸向差。故今又當暑。雖有本候不平之症。然意謂若當秋至。則必向減矣。至于八月。匙箸筋力。漸漸損下。時有泄症。或有腹痛。是月之間。大水沒浦野。無靑色。霖雨連月。不開五谷。本以晩種近於凶歲矣。又爲水損。八路告凶。京畿最甚。山谷之間連江之邊。人家與牛馬之入于水患者。未有若此年之慘也家君患候。漸至彌留。至于九月可謂時異而日甚。雖未有大端沈痼。而眞元暗鑠。肌膚大脫。其所補養食物。牛肚鷄臄之類。而間用蔘劑。傍侍者見甚悶迫。然八耋長時之患。爲子孫者自不覺其如何。而況又精神如常暸暸。命戒申嚴。故一室無意外之慮。問于醫友宋仁兼甫。則亦曰無他念慮脉訣。別無不安節云。故如是呻吟者幾爲數月。九月以後漸爲命骨下牽痛之症。若蛔腹蚓腹。又如胸腹之痛。故又長服山査湯薑蜜湯。至閏九月。精神雖曰如常。氣息奄奄。眞元消鑠。便矢之節。子孫輩必侍衛。而夙宵之頃。幾至數十次食飮之節。纔至三四巡。伯侄自侍奉之後。平日奉養之道。極盡其誠。雖祁寒暑雨不避。艱險少無難容。一如志意。就養無方至於侍湯之際。粥飮必身。自爲之勤勤懇至。少無違節。蓋其誠孝出於天性。伯兄雖己終沒。其深仁厚德倘無食報於嗣胤也耶。何其莫誠心奉養者。不敎而如是也。如是度了者。幾又一望。而吾輩達夜侍側。或號泣而淚。則家君申申戒戒之曰。汝輩勿泣也。吾年今七十七矣。赤手成家。汝之四家姑免飢寒。粗識文字幸免黙魯。季孫亦爲科目。今年雖云歉歲。秋穀登場。而若終於此時。則將來子孫輩無奉祀艱難之弊云。而槩奉先祭祀之節。以如于田土。平日已爲分付區畫。故更無申敎。而其他至親奠窮者。則雖在奄奄中。每每憂虞。至于十四日呼三從兄洛疇氏而戒之曰。叅奉公家宗孫。旣至流離。蕩殘無地。則汝之下家。均是子孫。乘條周旋。雖數器脯果。合力以奉無至闕香云矣。是時轉側隨人。匙箸待人。常臥牀褥。時日奄奄。吾輩之憂懼。寸心欲絶。是夜初昏。旣吾輩請諸從侄輩。來曰今數日之內。吾將棄世。愼勿出外而左右待之云矣。十五日酉時。初將進米飮。則纔受數匙。奄忽棄背。嗚呼。哀孤。哀孤。哀孤。慈莫如吾親而奄然耶。仁莫如吾親而奄忽耶。諸子若孫孰不深盡。而尤極鐘盡於不肖矣。至于今日。此何變何變。拚號擗踊。自不滅死。至寃彌中。至慟在心。天下爲人子者。孰不當此也。不肖偏酷。罪惡獨深。三從兄主洛源氏率諸至親。皐復而哀慟後。遵禮護喪發書訃告于各處。婣査遠近知舊之家。訃書多至八十餘丈矣。尤爲慟迫者。伯兄已歿。伯侄承重。等親之恨。兼切於屬纊之夕。而仲兄亦已爲地下之靈。則存歿之一體。崩殞何爲小異。哀孤。哀孤。不肖何罪。十六日。朝。敦匠事木手。族人洪喪主槐洞林德興也。壽柩。年前往醴泉貿來矣。木理可用長房。亦稱故用之。然不甚極美。切恨也。殮襚之節。則年來已爲預備以明紬爲一襲。而幎握。則亦以毛段爲之。幅巾大帶亦以毛段用之。然所恨者。深衣未備。代用生綃袍。家非不饒。而知覺者不足故也。喪布十疋貿來。而五服俱製。四日成服。成殯于外寢西上房。執事分定。則護喪洪宗九氏。相禮洪載淵氏。司書洪洛源氏。司貨洪彩麟氏。造殯柳舜祚氏。敦匠具漢倬氏。嗚呼。哀孤。旬朔易邁。冬節漸迫。禮月將至。則哀痛之情。雖曰靡極。然克襄可營。二十三日。使錫模侄。往咸昌曾洞。迎地師李生員重乾氏。午飯後。往東山先塋。局內或有祔葬之地。無年運或狹窄。而先塋白虎肩壬坎龍子望之外。更不可占矣。雖然此地前所云云處。而村舍最近。麓下有別廟。故去壬午年間。三從兄主洛源氏遭外艱。占穴于此地。而吾家以別廟之故。禁。不得入葬。則三從兄主。以將仕郞公階砌下酉坐之原。來乞于先老。于時合族齊會。先老曰。此地由來支派孫。未葬之地。然吾兩家相依。而此禁彼禁。則不爲道理也。且六寸之葬不可言禁。則吾兩人之誼爲不可。以凡他至親比均。是子孫而雖有生養之別。宗支之異。然何可不葬也。爲文字許之懼。此子坐則置之矣。今不肖罪積。遭此罔涯。翌日往白寺內洞先塋之下。一間亦無着足之地。終日空行憮然還來。哀痛而已。罔極而已。子坐之外。更無意向完定之地。是夕不肖發說于諸至親合席之下。則孰不驚。惶黙然。無一言也。自是日以山事哀告。而翌日俱人馬治送。李生員重乾氏于時銀尺移居。再從叔主來留于家。亦在所當禁此地。然此叔主。亦與先老。晩來相依之道。與他自別。故今於山事。雖曰切迫。不可禁斷也。最所難言者三從兄主家。以私廟之壓。近六家之生居。最近恳恳說。到爲不容許葬之意。蓋其欲禁者。實不欲禁葬。而以所處爲所切迫者也。不肖與罪侄輩。晝夜乞哀者幾至一旬。而三從兄主亦相向。而哀慟者無數。反求諸己。亦無可怪。如是數日之後。三從兄主呼不肖輩曰。兩家相依。今遭巨創。抑所爲相爭乖戾也。揆諸事屈乖。明關此則莫如私合從便。以爲安葬之意特許。說罷。不肖之所地。弭哀不容奄道。而後世兩家子孫之俱。人道而免獸心者。其孰敢以毛髮之事。更爲相爭。而忘誼也。克襄凡節。諸從兄主極力挾輔。輓祭俱備。悲情殊深。蓋處人難處之事。而若是其截。然善處者非此。則不能也。宜乎。昌大其門。福乘後昆也。安葬日字定在十月十八日辰時。前五日開金井。前一日發靷車。山役軍餐。則從兄主家辦供。朝夕祭虞。當日祭需。自四喪家辦備。山神祭節。自金甥家辦供。各家隨力以叙情事。所恨者今年之事大無故。凡節於以每爲所未能極盡。其情深可哀慟也。自諸至親至于遠近知舊與常漢輩。莫不賻助。而來觀哀感良深。辰時下棺。竪誌石。實外壙。日今卒寒。兩洞軍丁。不能畢役。造主則仍成丈在升氏。便請于燈巖李生員而來。題主則求善書者。而當日會員。員之中別無可意者。故使敬模侄書之。五日卒哭。越二十六日有氣太和。雨雪解釋。故率家內軍丁。卽地上山。卽畢沙草。情地少安也。山地坐。以壬坐用之。則坐向若俱宜。而於丙子生爲七條云。故以子坐用之。外向則將來以壬坐。坐補之耳。至月大旱。無一点雨雪。十二月初三日 先府君生日也。哀慟罔極之。無減於袒括之日。而終日無喘息之餘存者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