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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2+KSM-WM.1823.4728-20100731.900110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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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30년 8월 3일 / 純祖30 / 庚寅
제 목 석여씨 부로씨와 함께 본부에 가서 왕세자의 인산의 곡반에 참여하다.
내 용
석여씨 부로(芙老)씨와 함께 본부(本府)에 가서 왕세자의 인산(因山)의 곡반(哭班)에 참여하였다. 발인은 초3일 축시(丑時)이고 하관은 초4일 자시(子時)이다. 막내 조카가 금년 여름에 순흥에 사는 김상사(金上舍) 집에 가서 수업을 받다가 이번 달 초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집에서는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금년 여름에 거행된 초장시험에 응시한 사람이 4백 여 명에 이른다하니 열심히 공부한 결과라 할만하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은 종장시험에 합격을 위해서지만 날짜가 정해지지 않아 기약한 날언제가 될지 걱정이다. 이 날 정동(正洞)에 가서 농사 상황을 보았는데 결실이 풍성치 못하여 그 느낌을 가설(稼說)로 지었다. ‘맹자는 농기구가 있더라도 때를 기다림만 못하다고 하였고, 소동파(蘇東坡))는 사람들을 재촉하여 때 맞춰 씨를 뿌리니 나는 농사의 때가 대단히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농사는 해마다 봄이면 논밭을 갈고 여름에는 김을 매며 가물면 물을 대고 물이 많으면 말리는 등 적당한 때를 대비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이웃 사람의 곡식보다 영글지 않은 것은 혹 너무 가물어서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혹 때가 너무 늦어서 잘못된 것인가? 혹은 벼농사를 지으며 흙의 성질을 잘 말리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관개(灌漑)를 돈독하게하지 못하여 모래밭을 만들어 손실이 된 것인가. 내가 땅의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한 것이 마치 흙의 성질상 햇빛을 쬐지 못한 탄식 같다. 내년부터는 의도하여 일찍 농사일을 도모하여 물의 근원을 따라 물을 끌어들일 것이요. 그 습한 것을 말려서 일찍 논밭갈이를 해서 말릴 건 말리고 물댈 건, 물을 대어 논밭을 잘 관리하여 남보다 먼저 하지도, 남보다 나중에 하지도 않고 종자를 뿌린다면 하늘이 나의 농사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가소롭고 가소롭다. 의흥(義興)에서 추진한 족보가 이미 인쇄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동산파(東山派)가 스스로 족보에 누락되게 되었으니 또한 후인들에게 무슨 한이 되겠는가? 지난 날 수단(收單)이 미진하여 일치되지 못한 것은 모두 친족간의 정의가 돈독치 못한데서 연유되었으며, 세상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이 점점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정리가 잘된 족보는 함창파보(咸昌派譜)로서 우직하게 신분을 지켜 겨우 가문의 명예를 잃지 않음으로서 선조의 덕업을 보존할 뿐이었다. 족보란 대개 한 집안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널리 칭찬해야 하는데 칭찬치 않은 것이 있고, 폄하해야 하는데 폄하치 않은 것이 있으니 칭찬과 폄하가 모호하고 공과 사가 가려졌다. 내가 날카로운 말로 설화(舌禍)를 일으키기보다 차라리 입을 닫고 귀를 막으며 말없이 지내리라. 내가 저들보다 이른바 박식한 군자인가? 내가 그런 걸 말할 바인지 알지 못할 뿐이다. 오호라! 선비가 어렵고 곤궁한 처지에 다다라도 흔들지 않고 위태롭고 불안하여도 스스로 편안해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공자는 춘추시대의 말기에 도덕이 무너진 걸 크게 탄식하였고, 맹자도 전쟁이 치열한 세상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쌓은 덕을 베풀지 못함을 두려워하였다. 덕을 베풀지 못한 것을 끝내 성현이 이것을 마치하지 아니한 것 같은 헛된 말을 후세인에게 전하려하니 만백성의 한이 된다. 하물며 궁벽한 곳에서 태어나 초야에 묻힌 사람으로 주공(周公)과 같은 재목이 되어 공을 세울 수 없고, 관중(管仲)과 제갈공명(諸葛孔明)같은 공을 이룰 수 없는데 어찌 제왕의 조정에서 몸을 바쳐 뜻을 펴고 높이 날아 패연히 큰 명성이 있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두루 천하를 살펴보고, 세상 사람들을 은연중에 바라보며 자기가 처한 곳에 국한되어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 것을 스스로 통탄하지 말지어다. 훌륭한 문장가나 재주와 덕이 빼어난 사람들 대부분은 하찮은 가문과 가난한 가정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므로 모두 자신을 가지고 구차스럽게 눈앞에 닥친 일로 움츠려 형세만 살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권문세가를 찾아 그들 아래서 기예나 팔고 지위 높은 관리들 앞에서 굽실거리는 것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까닭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저들이 세력만 믿고 빙자하여 관리에 등용되고 이름을 드러낸 것이 모두 자기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문장을 빌려 궁문(宮門)에 들어가 벼슬아치가 되고 좋은 관직을 얻어 정사(政事)를 결정하고 다스리는 사람모두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것이 아니다. 팔도(八道)의 지방수령으로 막부(幕府)에 들어가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 모두 위로는 육조(六曹)에서 아래로는 지방관청까지 그렇지 않는 데가 없다. 가지가 무서워 뿌리를 파는 이른바 속된 선비의 무리들이며 남의 권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는 마음속에 품은 경륜(經綸)을 베풀지 않고 쌓은 덕업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 국한된 처지로 불안하게 되고 구차하게 되어 끝내 속박되는 선비가 되는데 그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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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三日
錫汝氏芙老氏。往 本府。叅王世子因山哭頒。則發靷及初三日丑時。下玄宅乃初四日子時也。季侄兒今夏往興府金上舍家做業。而今月初還巢云矣。尙今不來。家心卽悶。今夏渠之所做。初場至於四百餘首。可謂篤課。而其未還者倘爲終場下三。而期逝不至不日。是日往正洞。觀稼事之未穰。因爲稼說曰。孟子曰磁器不如待時。蘇子曰屬人之因種之以時我知農事之時義大哉。而我稼年來。春耕夏耘。旱灌水曝。則其時之不爲不待。而玆不稔於隣人之禾。倘或太旱而爲失歟。抑或太晩而有失歟。或以水耕而土性未曝歟。鋪沙而無敦長漑。而消損則吾未其知。其以田恩之旣熟。似爲土性未曝之歎。自明年。則意欲早鍤後。跡其源而導之水乾。其濕而早其耕乾之曝之。屢耕釋釋。不先於人不後於人而種。則庶幾天有助於我稼也。笑呵笑呵。義興譜事已爲印出云。而東山派之自漏於譜中。亦何恨於後人也。嚮日之未盡收單之不一。皆由於族誼之未敦。而世道之漸乖。則宁爲一咸昌派譜。而僅守拙分。無失家聲。以保祖先之德業耳。譜者。旣曰一家之春秋云。可則其中。亘有當褒而不褒者。當貶而不貶者。褒鉞糢糊。公私蔽障。吾不欲災舌而銳說之。寧緘唇而膠聰之嘿嘿乎。余乎彼所謂愽識者君子歟。吾不知其云爾。嗚乎。士之處厄窮而不聞。當臲甈而自怡者。世有幾人也。仲尼浩歎於春秋之末。孟氏不豫於戰旺之世。懼塞莫施蘊德。未布者不竟若聖賢之爲此。而終至於空言垂後。爲生民百世之恨。矧乎生晩窮巷淪沒草萊者。材不如得功。不如。而更何望致身於帝王之庭。翼然高飛。沛然大漎哉。然周觀四海之內。黙契八域之人。則局於所處未展其志者。自不可以慟數。文章高手。材德秀美。多出於寒門賤産之類。故皆自知其苟且不伸。每每衒技於高門勢閥之下。趍膝於貴人仕客之前。所以知其然也。彼所以席勢藉柳。摘科顯名者。皆非自爲也。借華假文於宮門之客。佩章操印。決政听理者。皆非自爲也。委任沿道於入幕之賓。上自諸曹。下至列府。莫不皆然。則其所謂懼枝售材者。倘所謂賤士之徒也。笻勢之客也耶。此內卽其懷經綸而無施。蘊德業而不行。局於其地。自不安於苟且而終然爲纏縛之士而止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