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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2+KSM-WM.1823.4728-20100731.900110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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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28년 7월 0일 / 純祖28 / 戊子
제 목 손철갑이 아산으로 귀양을 떠나다.
날 씨 16일 눈이 많이 내리다. 29일 또 눈이 많이 내리다.
내 용
7월 4일에 손철갑이 아산(鵝山)으로 귀양을 떠났다고 한다. 늦게 많은 비가 왔고 일찍이는 가뭄으로 벼가 대부분 주저앉고 자라지 못해 올해농사가 흉년이 들것으로 추측된다. 금제(金堤)에 있는 막내 외삼촌이 6월 23일 묘시(卯時)에 돌아가셨는데, 마침 홍수가 나서 물이 크게 불어 안타깝게도 부음(訃音)이 전하지 못하였다가 6월 그믐에 이르러서야 부음을 받게 되었다. 다만 우리 외숙부를 생각해보니 혼자 외롭게 계시었고 하나 아들도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미성년인데 갑자기 돌아가시니 집안일이 아득하고 창망하고 의지할 곳이 잃게 되었으니 그 처지가 안타깝고 서럽다. 지금 어머님께서 년세 70에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애통한 심정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부음을 받은 즉시 달려가야 하지만, 한 달여 전에 앓았던 다리의 부종(浮腫)이 아직 낫지 않아 가지를 못하게 되었으니 나의 정성을 다 하지 못하여 비통한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다. 올해는 날씨가 오래 가물다가 장마가 심하여 팔도가 모두 가히 흉년이라 하겠다. 경기지방은 곡식이 그런대로 영글었지만, 영남지방은 극심한 병충해를 입어 수확의 감소가 아주 많았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쌀 한 되 값이 1전2푼이었고, 콩은 한 되 값이 8~9 닢이었고, 감은 1접에 8~9전이었고, 목화는 12~3근이었다. 날씨가 동짓달과 섣달 초에는 봄날처럼 따뜻하다가 섣달 초6일에 한길 가량 큰 눈이 내려 마침내 추위가 아주 극심하였다. 16일에도 큰 눈이 내렸고, 29일에도 큰 눈이 내렸는데 이때 사람과 동물들이 혹 얼어 죽기도 하였다. 이해에 영남의 고을으 수령들이 많은 구휼하였는데, 동래(東萊)의 정기선(鄭基璿)이 우리 도백(道伯)의 되어 이재민 구호를 열심히 하여 도내 백성들이 큰 은혜를 입었으니 여러 해 가운데 가장 밝게 다스려졌다하겠으나, 우리 고을의 목사(牧使) 오치형(吳致馨)은 학문은 잘 하였으나 백성은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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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七月
初四日
哲甲定配鵝山發程云。晩雨早旱。禾多坐損。秋事歉凶。可以預占矣。金堤季舅主喪事出於六月二十三日卯時。適爲大水所阻訃音。戚然未通。至六月晦日承訃。第念吾外家舅主。巋然獨存。而有子一人。尙未勝冠。蘧然棄背家事。蒼茫竟無依附。慟哉慟哉。今吾母氏年今七十。割愛之慟。尤不忍裁制情。當承訃卽趍。而自月前病脚部大瘇尙未快。疊未遂餘誠。悲悼不任。蓋是年先旱後潦。八路可謂歉凶。而京畿登稔。嶺南酷被蟲災。坐損自秋。及冬米一升價至一錢二分。太一升價至八九葉。枾一貼價至八九錢。木花則十二三斤。日氣則及至月臘初若春和日暖。至臘初六日大雪丈許。卒寒叩酷。十六日大雪。二十九日又大雪。此時人物或凍死。是歲嶺南守宰多賑恤。是時東萊鄭基璿爲本道伯。救活災民。一道蒙惠。自年來最尤明治。本州牧吳致馨氏有學文上工夫。未能治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