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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C+K01+KSM-WM.1845.4717-20090831.00631020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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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0년 4월 1일 / 哲宗11 / 庚申
제 목 승려들의 횡포로 장지(葬地)를 쓰지 못하다.
날 씨 맑다.
내 용
새벽 일찍 회객(會客) ․ 제족(諸族)들과 함께 발인(發靷)했다. 부석사(浮石寺) 동대(東臺)를 따라 올라가서 보니 점혈처(占穴處)에 근처에 법당(法堂)이 가로막고 있어서 결코 의례를 도모하기에 용이하지 못한 곳이었다. 향도(鄕道)의 유생들은 종각(鐘閣)에서 개좌(開座)하여 먼저 향유(鄕儒)들을 예장집사(禮葬執事)로 임무 분담하여 정정언(丁正言) 집교(集敎)가 도집례(都執禮)를 맡았는데, 갑자기 뿔피리 소리가 산하에 일어나며 한 무리의 승도(僧徒)들이 떼를 지어 올라왔으니, 이는 각화사(覺華寺)의 총섭(總攝)이 인근의 산의 모든 승려들을 많게는 4~50명을 이끌고 올라온 것이다. 이들은 진영(鎭榮) 및 본관(本官)의 금난장교(禁亂將校)를 구타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 그 상황이 위험하고 두려워 곧 권교리(權校理) 영하(泳夏)와 함께 상주(喪主)를 보러 갔다가 총섭을 불렀는데, 그가 도착하자 그에게 입이 닳도록 좋게 말했음에도 만무하고 순순히 돌아갈 뜻이 없었으니 부득이하게 물러나자고 의논하여 회객들이 일시에 각자 흩어졌다. 이윽고 모든 친척 가족들과 함께 상여를 따라 하산하여 죽전동(竹田洞)에 해좌지원(亥坐之原)에 임시로 장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본가가 입은 낭패는 고사하고 멀거나 가까이의 이목에 큰 해악이 아닐 수 없었다. 산하촌(山下村)에서 유숙하니 매우 피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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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初一日【乙丑】
晴。曉頭發00020與會客諸族。随上浮石寺東坮。占穴處壓近法堂。決非容易儀圖處也。郷道儒開座于鍾阁。先爬郷儒禮葬執事。都執禮丁正言集敎俄。而吹角之聲起於山下一隊僧徒。簇擁上來。乃覺華寺摠攝。率近山諸僧多至四五十名。敺打鎮榮及本官禁乱將校。幾至死境。爻象危怖。卽與權校理泳夏。往見主喪。招致摠攝。多費唇〖脣〗舌。萬無歸順之意。不得已遂發退步之論。會客一時各散。仍與切戚諸族。随轝下山。權窆于竹田洞亥坐之原。本家之狼狽姑舎。遠近瞻聆不勝駭愕。留宿山下村。困憊特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