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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2년 8월 29일 / _ / 壬戌
제 목 종친을 방문하러 가다.
날 씨 _
내 용
이른 아침에 가마꾼 차돌(次乭)이 달아나는데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을 타고 정언은 걸었다. 또 마부 우상(又尙)을 부중(府中)으로 보냈다. 점심을 먹고 함평(咸平) 증산(甑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종친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20여리를 가서 사납촌(士納村)에 이르러 계곡의 입구로 방향을 돌려 들어갔다. 다시 동쪽으로 한 고개를 넘어 벼랑을 따라 풀을 헤치면서 동남쪽으로 갔다. 골짜기 입구에 도착하니 시냇가에 허물어져 가는 가게[店]하나가 있어 막걸리를 사서 갈증을 달랬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십 여리를 가니 지명이 자양(紫陽)이었는데, 회암(晦菴 : 주희의 호)의 사우(祠宇)가 우뚝 서 있었다. 사모하는 마음이 절로 이는데다가 사람은 피곤하고 말은 힘이 빠진 상태라, 마침내 죄 지은 몸임을 잊고 사우에 들어갔다. 정언이 강당에 앉아 쉬는데, 갑자기 어떤 파락호(破落戶) 부랑자 놈의 자식이 쳐들어와서 무단히 욕을 보이다가 마침내 기색을 떠보고 떠나갔다. 저물녘에 증산서원(甑山書院)에 당도하였다. 서원은 바로 영중추공(領中樞公 : 운보云寶)의 둘째아들인 좌명공(左命公 : 덕생(德生)을 모셔놓은 곳이다. 밤에 종친인 춘오(春五 : 채해采海, 갑자생)와 치도(致道 : 상현相炫, 갑술생)가 찾아왔다. 이들과 함께 집안의 계통과 근원을 따지고 이야기하였는데, 정의가 넉넉하고 정성스러웠으니 참으로 백대를 이어온 친함은 없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나와 같이 상산 김씨 22대 손이었다. 밤이 깊어서야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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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二十九日
早朝 轎夫次乭 逸不可止, 余奪騎 正言步, 又送馬夫又尙于府中。 食後發向咸甑山, 欲訪宗人故也。 至二十里士納村, 轉入谷口 東越一嶺 因緣崖, 披草向東南而去, 至谷口澗邊 有一殘店, 買醪沃渴。 因迤邐 至十餘里 地名紫陽 晦菴祠宇 巋然在, 感慕自興 且人困馬乏 遂忘罪累之跡 投入院邸。 正言坐憩講堂 忽何許破落戶潑皮漢子 突如來如 無端逼辱, 遂色斯擧矣。 乘暮抵甑山書院。 書院卽領中樞公【云寶】 次子左命公【德生】妥靈之所也。 夜宗人春五【采海甲子】, 致道【相炫 甲戌】來見, 與之講系譚源 情誼款洽, 信乎百代之親 不可泯也。 盖與我十二代同所蒙也。 夜分乃宿。

주석

영중추공 운보(領中樞公 云寶) : 김운보(1333 ~ 1402)의 본관은 상산이며, 자는 광국(光國), 호는 죽헌(竹憲)이다. 익대개국원종공신으로 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고려 말에 중랑장으로서 왜적을 토벌한 공훈을 세웠고 홍건적을 막아 경성을 수복한 공으로 원종공신이 되었다. 좌명공 덕생(左命公 德生) : 김덕생(金德生)의 생몰년은 미상이며, 본관은 상산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태종이 즉위하자 추충분의익대공신(樞忠奮義翊戴功臣)에 추봉되었다. 1436년(세종 18) 가정대부에 추증되고, 1445년에 다시 동지중추원사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