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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1862년 10월 13일 / _ / 壬戌
제 목 주학기가 찾아오다
날 씨 맑고 봄처럼 따뜻하였다.
내 용
새벽에 머리를 빗고 『주역』을 외웠다. 이웃동네에 사는 유생 주학기(朱學琪)가 찾아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동안 하였다. 이어 서울사람 첨지(僉知) 희룡(熙龍)이 이 땅으로 유배를 왔었다는 일을 이야기 하였다. 그는 서화를 지독하게 좋아하여 우유자적하며 이로써 한 해 한 해를 보냈는데, 이렇게 하기를 4년 동안 하다가 유배에서 풀려나 갔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서화와 시문을 보자고 부탁하였더니, 기옥(其玉 : 학기의 자다)이 자기 집에 있는 상자 속에서 찾아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다. 큰 붓과 작은 붓으로 그린 두 첩과 화제시(畵題詩)와 문(文)이 각 한 권(㢧)이었다. 이를 열어 보니, 그 필세는 천지의 조화(造化)에 참여하였고 시는 오묘한 경지에 들어가서, 글자 하나 말 한 마디가 모두 미산(嵋山)을 그대로 본 뜬 것으로, 참으로 소동파(蘇東坡)의 후신(後身)이었다.서울은 인재의 창고이다. 왕왕 많이 뇌락(磊落)하고 기위(奇偉)한 인물들이 문장과 경륜이라는 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끝내 한 번 펴지도 못하고, 저자거리에서 이름을 숨기고 있거나 혹은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대쪽 같은 분의(分義)로 세상을 굽어보면서도 불만을 가지거나 자신을 민망히 여기지 않는다. 이 조희룡 같은 이도 그런 부류에 속하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석양 무렵에 정언의 편지를 받아보았다. (또 장서章瑞의 편지를 보았다.) 9월 24일에 보낸 것인데 통영(統營)의 역말로 부쳤고, 통영에서 우수영(右水營 : 해남海南이다.)에 부친 것을 이 임자도 진의 종[鎭隸]편으로 부쳐온 것이다. 집안이 무고함과 두 손자가 충실히 잘 크고 있음을 알고 나니, 기쁘고 다행하여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잊을 만하였다. 밤에 화재 옹이 굳이 오라고 하여 달빛을 받으며 모임에 나갔다. 진장이 먼저 자리에 와 있었다. 드디어 기쁘게 몇 순배의 술이 돌자, 이어 운을 불러 시를 지어 회포를 담았다. 오언율시 두 수를 얻었다.

풍류는 달사에게 걸맞고
글과 술은 떠돌이 인생을 즐겁게 하네
멀리 강호에 와 있으나
마음을 여니 물에 비친 달처럼 밝아라
연하 낀 곳에서 주관하는 이 만났으니
피리와 북으로 태평성대에 화답하네
어느 곳이 유배지던가
무단히 한숨소리 들리네

어려서는 세월을 재촉하였지만
선비가 되어서는 일생을 그르쳤네
창랑의 물 어찌하여 흐리게 하는가
외로운 달 밝음을 싫어한다네
비분강개해도 쓸모없음 알지만
시와 술로 불평한다네
진중한 화재 노인은
곤궁해도 도리어 바른 음악 좋아하네

이미지

원문

十三日
晴溫如春。 晨 梳, 誦。 隣曲朱生學琪來見, 打話移時 仍道人趙僉知熙龍來謫是土, 癖於畵書 優游自適, 以是卒歲。 如是者四載 解配而去云尒。 余聞而奇之 求見書畵詩文, 其玉【琪之字】搜索家藏胠篋而來獻 大小筆二帖 畵題詩文各一張。 抽觀其筆 參造化 詩入妙境 一字一言 皆蹈襲嵋山坡翁後身也。 洛乃人才府庫也。 往往多磊落奇偉之士, 抱文章經倫之寶 而終不一售 或隱名市肆 或潛迹椽柱 簡分玩世而不慍无閔, 如若人者 種種焉 可勝悲哉? 夕陽 得見正言書, 【又見章瑞書】 九月二十四日出也 而遞付統營, 統營右水營海南】 此鎭鎭隸便付來也。 知家中無故 兩孫充茁 喜幸 可忘長沙。 夜 華翁强邀 乘月赴會, 鎭將先在座矣。 遂懽飮數巡 仍呼韻賦懷 得五律二首。
風流稱達士 文酒樂浮生 趣挹江湖逈 衿開水月明
煙霞逢主管 笳鼓答升平 何處長沙是 無端太息聲
幼㝱催三劫 儒冠誤一生 滄浪何害濁 孤月太嫌明
忼慨知無用 謳唫鬯不平 珍重華齋叟 窮猶好正聲

주석

첨지(僉知) 조희룡(趙熙龍) : 1789-1866. 첨지는 본래는 벼슬이름이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본다. 그는 조선 말기의 화가로 본관은 평양(平壤)이며,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우봉(又峰) 또는 호산(壺山)이다. 중인 신분으로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추사 김정희의 무리라고 하여 유배되었다. 저서로 뛰어난 중인들의 전기집인 『호산외사 (壺山外史)』, 귀양시의 기록인 『해외난묵(海外蘭墨)』, 회고록인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등이 있다. 미산(嵋山) : 소동파의 고향인데, 여기서는 소동파를 가르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