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4월 27일부터 5월 7일까지 11일 동안 있었던 금강산 遊覽과 그와 관련된 사실을 기술한 柳正源의 일기이다.
그러나 이 일기는 유람을 시작하기 2년 전의 가을인 1813년 9월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유정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꿈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유정원에게 자기가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적은 시 한 편을 보여주었다.
9월의 가을 다되어 가니
서늘한 바람 유유히 불어오네.
내 한 마리 조랑말 채찍질하며
멀리 봉래산 유람하였네.
넓고 넓은 창공에 울리는 노래 소리
일만 이천 봉우리라네.
소매를 떨치고 돌아오니
한가한 산에 달 한 조각이어라.
유정원은 이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은 시로 응수하였다.
그대 아름다운 곳 구경했다는 소리 듣고
그 경치 글귀 속에 거두어들였네.
느낌의 크고 작음 같지 않으나
뜻과 취향 각기 구하는 것 있다네.
이미 吳門의 말 바라보았으니
다시 武陵의 배 띄우리라.
평소 유정원은 금강산 유람을 진정으로 염원해 왔었다. 게다가 이런 꿈을 꾸었으니 그로서는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여행이 마음만 먹는다고 이루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시들을 적어 상자에 넣어놓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런데 이듬해인 1814년 겨울에 館職을 재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자 그해 12월 26일 밤에 특명으로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通川郡守로 보임을 받았다. 이곳은 금강산 일부가 걸쳐져 있는 곳이다. 유정원은 친구인 趙季溫과 함께 임지로 가다가 멀리 금강산이 보이자 옛날 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함께 금강산 유람을 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고, 친구 또한 그에 동의하여 봄이 되는 4월에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4월 10일이 되어 조계온은 도착했으나 정작 유정원 본인은 공무에 바빠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정원은 꿈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은 가을이 되는 9월에 가겠다며 친구를 먼저 떠나보냈다. 그리고 조계온은 7일이 지나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유정원을 방문하였다. 그때 조계원은 금강산 유람이 "늙은 사람의 기력으로는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네."라고 말하였다. 유정원이 이 말에 문득 앞날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에 세월이 흘러 금강산 유람의 기회를 흘려보낸다면 한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4월 27일에 金城郡에 推鞫을 하는 것을 계기로 금강산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금강산을 다녀온 조계온으로부터 여행의 기록을 빌려 지도를 대신하여 봉우리며 골짜기를 표시해두는 등 미리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들 明休에게는 28일에 출발하라고 하고, 자신은 먼저 가서 長安寺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淮陽의 수령인 任珣이 함께 동행하기를 요청에 중도에 만나 함께 가기로 허락했다.
4월 28일 아침, 마침내 회양의 수령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이 날은 倉道에서 말에 먹이고, 저녁에 금성에서 죄수를 심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다음날인 29일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창도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通溝에서 말에 먹이를 먹이고, 斷髮嶺 아래에 있는 楸木亭의 마음에서 유숙하는 일정이었다.
4월 30일은 금강산 유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였다. 해가 뜰 때 肩輿를 타고 험준한 고개를 오르니 동쪽으로 흰 구름이 가려진 곳에 장안사 뒷산이 나타났다. 거기서부터 장안사까지는 30리 길인데, 도중에 민가를 지나 10리쯤에 이르자 부처가 마치 연꽃을 들고 있는 듯한 釋迦峯이 나타났다. 그리고 松亭에 이르러 견여를 갈아타고 노송과 잣나무가 우거진 숲은 지나 外圓通을 거쳐 앞에 飛雲橋가 놓여 있는 장안사에 이르렀다. 일기에 따르면 비운교는 丁酉年(1776) 때 홍수로 떠내려가 당시에는 횡목을 놓은 다리로 수레가 다니기에는 아주 위험하다고 하였다. 장안사 주변의 경치로는 절 앞에 있는 長慶峯을 비롯해 그 동쪽으로 觀音峯, 地莊峯, 釋迦峯이 쭉 늘어서 있었다. 유정원의 일행은 회양의 수령이 보내준 술을 마시고 절 구경을 하고서 그 날 밤은 僧堂에서 묵기로 했다. 그것은 산중에서 말을 타고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승려가 절의 옛 사적을 기록한 책을 1권 주기에 읽어보니 근거가 없는 허황된 것이라고 유정원은 평가하였다.
5월 1일, 지장암을 목적지로 아침 일찍 출발한 여정은 玉鏡臺를 거쳐 그 동쪽에 있는 오래전에 쌓은 작은 성에 도착했다. 전쟁을 피해온 사람들이 축조한 것으로 짐작되는 그 성에는 地獄門이라는 동굴이 뚫려있고, 그곳으로부터 15리쯤 우회하면 동쪽에 靈源洞이 있다. 이 골짜기에는 그 가운데에 靈源菴, 북쪽에는 아주 보기 좋은 燈明塔과 多寶塔이 있는 百塔洞, 그리고 지옥문 안에 있는 100여 장 높이의 암벽인 明鏡臺가 있다. 이곳을 떠나 表訓寺를 향하게 되면 영원동의 물과 합치는 百川이 나오고, 그 주변을 따라 水月菴과 彌陀菴, 그리고 安養菴이 나타난다. 안양암에서 개울의 다리를 건너 5~60보 떨어진 곳에 鳴潭이 있는데, 그 길에는 持平을 지낸 酉谷 權斗紀의 題名이 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어 유정원 자신도 그 곁에 제명하고 승려에게 그것을 새겨주기를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비스듬하게 기울어 길게 펴져 있는 거대한 바위인 裳巖, 절벽에 매달려 있는 靑蓮菴과 頓道菴, 그리고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우뚝하게 나란히 서있는 三佛巖을 지나왔다. 삼불암에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폐허가 된 白華菴이 있었는데, 그 뒤편에 7줄의 浮圖와 세 개의 큰 비석이 있다. 그 비석 가운데 하나가 바로 月沙가 지은 松雲禪師의 사적이다. 이곳을 지나 표훈사 다리 남쪽에 있는 普喜菴과 桂樹菴을 거쳐 표훈사의 凌波樓에 들어가 승려들이 내어주는 차를 마셨다. 오후에는 표훈사의 뒤에 있는 산을 올라 畸畸庵을 지나 三莊菴의 옛터를 바라보며 天逸臺에 올랐다. 그러나 높고 험한 산길을 건너오느라 다리가 피곤하여 북쪽의 放光臺와 정면의 陽後山에는 나아갈 수 없었다. 천일대에서 둘러보면 동쪽에는 須彌峯, 金剛臺라 불리는 靑鶴臺, 衆香城, 小香鑪, 大香鑪, 永郞嶺, 毗盧峯이 있고, 남쪽에는 望君臺와 穴望峯이 있고, 혈망봉 아래에는 隱寂菴이 있고, 암자 동쪽 층계를 점차 내려가면 五賢峯이 차례로 우뚝 서있다. 그 곁에 遮日峯, 白馬峯, 十王峯, 觀音峯, 長慶峯, 地莊峯, 釋迦峯이 있다. 유정원이 이곳을 방문했던 날에는 구름과 안개가 중향성과 비로봉을 겨우 드러내고 반쯤 둘러 있어 그것이 마치 백만명의 신선이 서있는 것과 같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표훈사 주변의 구경을 마치고 나서 그에 딸린 작은 절인 正陽寺를 찾아 歇惺樓에 앉았다가 절과 함께 그 주변에 있는 開心臺며 衆香城을 둘러보고 산을 내려와 萬瀑洞으로 찾아들었다. 거기에서 석굴을 따라 금강문을 지나 靑龍潭에 들어가니 조선의 삼대명필 중의 한 사람인 蓬萊 楊士彦가 쓴 그 유명한 "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 큰 여덟 글자가 있고, 그리고 조계온의 형제의 제명뿐만 아니라 晉鉉이라는 일족의 아저씨가 쓴 제명을 발견하고는 감회에 젖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가 질 때가 흠뻑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는 표훈사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절에는 함경도 鏡城에서 評事 李宜哲이 2월 10일 돌아갈 때 부친 편지가 도착한 것을 보고 유정원은 당시 편지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꼈다.
5월 2일, 지난날 찾았던 만폭동에 들어가 청룡담에 이르니 어제 유정원 자신이 제명한 것이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는 보고 개울을 건너 普德窟을 찾았다. 10걸음에 한번 쉬어야 할 만큼 길이 험준할 길을 따라 가니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쇠줄로 지탱하고 있는 암자가 나타났다. 그 암자들을 둘러보며 유정원은 무아의 경지에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불교의 진리에 대해 새삼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헤진 장삼을 걸친 승려며 초라한 살림살이가 무아가 아닌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정원은 보다 말고 계곡을 따라 내려와 噴雪潭과 眞珠潭을 구경하고, 조금 올라가 船潭, 龜潭, 化龍潭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못 위의 獅子峯을 뒤로 하고 摩訶衍을 지나쳐 곧장 彌勒臺로 들어갔다. 그것의 풍경은 얼음 아래로 물이 콸콸 흐르고 나뭇잎들이 싹을 틔우며 터질 듯 말 듯 한 꽃봉오리는 봄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층계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의 절벽을 기어오르려고 하니, 돌멩이가 떨어지는 소리에 손과 발이 부들부들 떨려 올라 온 것을 후회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하지만 용기를 정상에 오르니, 이곳은 바로 산 안의 진기한 볼거리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유종원은 이곳의 풍경을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해가 뜨는 곳에 있는 나무인 扶桑이나 해가 질 때 들어가는 못인 咸池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기묘하고도 장엄하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석 잔의 술을 마시고 취해 한동안 누워 있자니 종자가 해가 저문다고 재촉하여 일어나 내려왔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바다 가운데서 피어나던 안개가 산을 휘감았다. 수행하던 승려가 이를 보고 금강산 구경에 인연이 있다면 축하의 말을 건냈다. 왜냐하면 금강산 구경에서 대부분 골짜기에서 비를 만나거나, 극도의 피로에 시달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오르다가 안개에 막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날씨가 화창한 덕분에 충분히 구경한 유정원의 일행은 표훈사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승려가 절 왼편에 있는 白雲臺에 가면 금강산을 좀 더 가까이에서 대할 수 있다며 가자고 권했으나 피곤하여 나갈 수 없었다.
5월 3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佛智菴을 보고, 작은 고개를 넘어 般若菴에 들어갔다. 그리고 內水岾을 넘어 萬景臺를 지나 隱身臺에 오르니 동쪽에 12폭포가 있었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니 龍潭, 石門, 裳巖, 船潭이 나타났는데, 선담이 가장 아름다웠다. 앉아서 잠시 동안 시를 읊조리다가 祝壽窟을 거쳐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인 楡岾寺의 山暎樓에 들어갔다. 般若菴과 明寂菴이 오른쪽에 있고, 興盛菴이 왼쪽에 있었다. 승려가 법당에 소장하고 있던 成化 연간에 노비와 토지에 대한 면세의 교시, 왕후가 경전을 베낀 책 1권, 香鑪, 鸚鵡盃, 琉璃盞, 輦具, 珠絡, 燈籠 등의 유물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유정원은 이것들을 보고서 문서며 사경한 것들은 비공식적인 것이기에 믿을 수 없고, 나머지 유물들은 천하에 그 아름다움을 떨치는 금강산에 있는 절에서 소장하는 것으로는 그다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평가한다. 이것은 바로 조선 왕조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않은 증거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당시 유학자들이 불교에 대해 가지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후에 밥을 먹고 난 후에 博達古致라고 부르는 成佛嶺을 넘어 成佛菴을 거쳐 佛頂臺에 올랐다. 그 다음 행로는 길이 아주 가팔라서 가마를 버리고 걸었는데, 도중에 소름이 돋을 만큼 찬바람이 나오는 風穴을 만났다. 그 아래에는 五松臺가 있고, 그 왼편의 절벽에는 鶴巢臺가 있었다. 계곡을 건너 松林菴에 들어가서 그 주변의 굴에 모셔진 53개의 석불을 구경하고, 섬돌 아래로 내려서니 佛頂臺가 나타났다. 그 동쪽에는 만장이나 되는 절벽이 매달려 있었고, 위에는 神仙室이 있었는데 암석의 모양이 마치 지붕과 같았다. 그곳에서 조금 들어가 外圓通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유숙하였다.
5월 4일, 孝養嶺을 넘자 멀리 동북쪽에 유독 빼어난 봉우리가 있어 물어보니 紫霞峯이라 하였다. 개울가에 이르니 ‘蓬萊島’라는 3개의 큰 글자가 못에 있는 돌 위에 있었는데 양사언의 필적이었다. 그것을 뒤로 하고 瀑㳍菴에 들어가니, 輔仁이라는 사람이 속세와 단절하고 제자 15~6명을 거느리고 경전을 암송하고 있었다. 암자의 폭포에 있는 바위에 조계온의 제명이 있어 유정원 또한 제명을 하고는 바리때[鉢] 모양의 못인 鉢淵 근처에 자리한 鉢淵寺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그리고 다음날 九龍淵으로 유람하기 위해 30리를 걸어 神溪寺에 들렀다. 이 절은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몹시 쇠잔해 있고 몇 년째 중수하고 있지만 아직도 단청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거기에서부터 宗印菴, 中觀音, 童石臺, 龍穿 등을 두루 구경하였다. 지금까지 보아온 바에 따르면, 산봉우리가 서쪽으로 향한 것은 희기가 마치 은과 같았으며, 동쪽으로 향한 것은 상당히 검었는데, 내산과 외산이 모두 이러한 경향을 띄었다고 유정원은 기술하고 있다. 이 날의 여정은 용연에 돌아와 유숙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5월 5일, 해가 뜰 무렵에 출발하여 20리를 걸어 玉流洞에 이르렀다. 이 날의 여정에서 백미는 쇠줄을 타고 절벽을 올라 폭포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다들 복장을 간편히 하고 쇠줄을 타고 기어오르거나 바위에 난 틈을 딛고 올라가는 방식으로 폭포에 올랐다. 폭포는 동쪽 봉우리로부터 두 갈래로 흘러내려 3~40丈 되는 높이에서 석담에 쏟아져 맑은 무지개가 허공에 뻗치었다. 그리고 소리는 우레나 천둥처럼 빠르고 거세었으며, 물방울들은 비가 되어 100여 척 밖에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석담의 깊이는 25丈이나 되는 끈에 돌을 묶어내려도 끝에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 가끔 못 주변에 용이 솟구쳐 오른다고 할 정도라고 하였다. 폭포를 오르느라 힘을 소진하여 봉우리 위에 있다는 8개의 못은 더 이상 구경하지 못하고 옥류동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쉬었다가 신계사로 돌아왔다. 그곳에 오니 예조 참판인 이후(李 王+厚)가 永興에서 聖祖의 영정을 받들고 돌아가는 길에 금강산을 감상하고자 한다는 연락이 와있어 다음날 함께 해금강을 유람하자는 전갈을 보냈다.
5월 6일, 이후와 함께 해상으로 가서 배를 타고 남쪽의 七星峯에서부터 북쪽의 三日浦까지 둘러보았다. 그 봉우리와 절벽의 모습은 귀신이 깎고 조각한 듯 하나하나가 기괴하다고 기술하였다. 그 여행 도중에 이후가 유정원에게 산을 유람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유정원은 별다른 교묘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떨쳐내고 그저 산속에 머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후는, 옛사람들이 산수는 보는 것을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유정원의 이 대답을 들으니 평소에 독서를 어떻게 하는지 알겠다는 말로 대답했다. 그런데 이후의 일정이 급하여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어 여관으로 돌아와 작별을 하였다. 그 후에 雲巖의 서쪽에 百井峯이라는 아름다운 곳이 있다고 하였으나, 가마꾼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 그만두고 南涯津에서 묵었다.
5월 7일, 아침에 일어나 벽 위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고는 오늘이 庚辰日이고, 군의 관사를 떠나온 날이 庚午일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문득 朱熹와 張栻 두 선생이 경오일에 湘水를 건너 경진일에 前嶺에서부터 내려왔던 일이 생각났다. 여행한 날의 간지가 우연히 같다는 것을 알고 유정원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이 되었다. 하지만 두 선생의 여행에 비하면 자신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며 지나온 여행을 회상하였다. 그리고 즉석에서 두 편의 절구를 지어 이러한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여행의 일기를 마쳤다.
[자료적 가치]
이 금강산 유람일기는 유정원의 문집인 『三山集』에도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일기가 원본이며, 문집에 있는 것은 이것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일기는 조금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겠지만, 유정원이 금강산을 유람했을 그때의 심정이나 감정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