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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유정원(柳正源)의 금강산(金剛山) 유람(遊覽) 일기(日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8+KSM-WM.1815.4717-20160630.y161001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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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일기
내용분류: 개인-생활-일기
작성주체 유정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15
형태사항 크기: 34 X 21
판본: 필사본
장정: 성책
수량: 1권(20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주진 전주류씨 삼산종가 / 경상북도 안동시 수곡면 문중소개
현소장처: 안동 주진 전주류씨 삼산종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안내정보

1815년 유정원(柳正源)의 금강산(金剛山) 유람(遊覽) 일기(日記)
1815년 4월 27일부터 5월 7일까지 11일 동안 있었던 금강산 유람과 그와 관련된 사실을 기술한 유정원의 일기이다. 그의 금강산 유람은 1813년 9월 꿈에서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그 감상을 적은 시를 주고, 그것에 차운하여 시를 지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 후 1814년 12월 26일 금강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통천군수로 보임을 받으면서 친구인 조계온과 봄이 되는 4월에 함께 금강산 유람을 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한 날이 되었으나 유정원은 공무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조계온이 그의 형과 함께 금강산 유람을 떠났다. 그런데 조계온이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유정원에게 들러 금강산은 늙은 사람의 기력으로는 오를 수 없는 것이라는 말에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4월 27일 금성군에 죄수를 추국하러 가는 것을 계기로 금강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4월 28일 저녁에 금성에 도착하여 죄수를 심문하고 다음날인 29일에 금강산에 더욱 가까운 단발령 아래에 있는 추목정에 도착했다. 그리고 30일에는 본격적인 금강산 유람이 시작된 날이었다. 장안사를 중심으로 그 일대를 구경하였다. 유람의 이틀째인 5월 1일에는 지장암을 목적지로 출발하여 옥경대, 지옥문, 영원동 등을 거쳐 표훈사로 들어가면서 그 일대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다시 표훈사를 나와 그에 딸린 작은 절인 정양사를 비롯해 개심대중향성, 그리고 만폭동을 둘러보고 다시 표훈사로 돌아왔다. 5월 2일에는 다시 만폭동에 들어가 그 주변에 있는 분설담, 진주담, 선담, 구담, 화룡담을 둘러보고, 사자봉, 마가연, 미륵대 등을 구경하고 표훈사로 다시 돌아와 유숙하였다. 5월 3일에는 아침 일찍 표훈사를 출발해 불지암, 반약암을 거쳐 내수점을 넘어 만경대를 지나 은신대에 올라 12폭포를 구경하였다. 그러고 나서 용담, 석문, 상암, 선담을 구경하고 축수굴을 거쳐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인 유점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승려들의 접대를 받고 오후에는 성불령, 불정대, 오송대, 학소대, 송림암, 불정대, 신선실을 구경하고 외원통에서 유숙하였다. 5월 4일에는 효양령을 넘어 자하봉을 구경하고, 바리때[鉢] 모양의 못인 발연 근처에 자리한 발연사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그리고 다음날 구룡연으로 유람하기 위해 30리를 걸어 신계사에 들렀다가 종인암, 중관음, 동석대, 룡천 등을 두루 구경하고 용연에 돌아와 유숙하였다. 5월 5일에는 해가 뜰 무렵에 출발하여 옥류동에 이르러 쇠줄을 타고 절벽을 올라 폭포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폭포는 동쪽 봉우리로부터 두 갈래로 흘러내려 3~40丈 되는 높이에서 석담에 쏟아져 맑은 무지개가 허공에 뻗치고, 소리는 우레나 천둥처럼 빠르고 거세었으며, 물방울들은 비가 되어 100여 척 밖에까지 떨어졌다. 폭포 구경을 하고 신계사로 돌아오자 예조 참판이후영흥에서 성조의 영정을 돌아가는 길에 금강산을 감상하고자 한다는 연락이 와서 다음날 함께 해금강을 유람하기로 하였다. 5월 6일에는 이후와 함께 배를 타고 남쪽의 칠성봉에서부터 북쪽의 삼일포까지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후의 일정이 급해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어 여관으로 돌아와 작별하고 유정원남애진에서 묵었다. 5월 7일에는 아침에 일어나 달력을 보고 자신이 여행한 날과 주희장식상수를 건너 전령을 내려온 여행의 날이 간지가 우연히 일치한 것을 생각하고는 자신의 여행을 다시 회상하게 되고, 이를 두 편의 절구를 짓는 것으로 여행의 일기를 마쳤다.
이 일기는 󰡔삼산집󰡕에도 실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원본으로 문집의 것은 이것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일기가 문집의 것보다 여행의 감회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三山集』, 유정원,
『古文書集成 四十四』 -安東 全州柳氏篇 1(水谷宗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1815년 4월 27일부터 5월 7일까지 11일 동안 있었던 금강산 遊覽과 그와 관련된 사실을 기록한 柳正源의 日記
1815년 4월 27일부터 5월 7일까지 11일 동안 있었던 금강산 遊覽과 그와 관련된 사실을 기술한 柳正源의 일기이다.
그러나 이 일기는 유람을 시작하기 2년 전의 가을인 1813년 9월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유정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꿈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유정원에게 자기가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적은 시 한 편을 보여주었다.

9월의 가을 다되어 가니
서늘한 바람 유유히 불어오네.
내 한 마리 조랑말 채찍질하며
멀리 봉래산 유람하였네.
넓고 넓은 창공에 울리는 노래 소리
일만 이천 봉우리라네.
소매를 떨치고 돌아오니
한가한 산에 달 한 조각이어라.
유정원은 이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은 시로 응수하였다.

그대 아름다운 곳 구경했다는 소리 듣고
그 경치 글귀 속에 거두어들였네.
느낌의 크고 작음 같지 않으나
뜻과 취향 각기 구하는 것 있다네.
이미 吳門의 말 바라보았으니
다시 武陵의 배 띄우리라.
평소 유정원금강산 유람을 진정으로 염원해 왔었다. 게다가 이런 꿈을 꾸었으니 그로서는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여행이 마음만 먹는다고 이루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시들을 적어 상자에 넣어놓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런데 이듬해인 1814년 겨울에 館職을 재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자 그해 12월 26일 밤에 특명으로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通川郡守로 보임을 받았다. 이곳은 금강산 일부가 걸쳐져 있는 곳이다. 유정원은 친구인 趙季溫과 함께 임지로 가다가 멀리 금강산이 보이자 옛날 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함께 금강산 유람을 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고, 친구 또한 그에 동의하여 봄이 되는 4월에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4월 10일이 되어 조계온은 도착했으나 정작 유정원 본인은 공무에 바빠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정원은 꿈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은 가을이 되는 9월에 가겠다며 친구를 먼저 떠나보냈다. 그리고 조계온은 7일이 지나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유정원을 방문하였다. 그때 조계원금강산 유람이 "늙은 사람의 기력으로는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네."라고 말하였다. 유정원이 이 말에 문득 앞날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에 세월이 흘러 금강산 유람의 기회를 흘려보낸다면 한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4월 27일에 金城郡에 推鞫을 하는 것을 계기로 금강산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금강산을 다녀온 조계온으로부터 여행의 기록을 빌려 지도를 대신하여 봉우리며 골짜기를 표시해두는 등 미리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들 明休에게는 28일에 출발하라고 하고, 자신은 먼저 가서 長安寺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淮陽의 수령인 任珣이 함께 동행하기를 요청에 중도에 만나 함께 가기로 허락했다.
4월 28일 아침, 마침내 회양의 수령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이 날은 倉道에서 말에 먹이고, 저녁에 금성에서 죄수를 심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다음날인 29일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창도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通溝에서 말에 먹이를 먹이고, 斷髮嶺 아래에 있는 楸木亭의 마음에서 유숙하는 일정이었다.
4월 30일은 금강산 유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였다. 해가 뜰 때 肩輿를 타고 험준한 고개를 오르니 동쪽으로 흰 구름이 가려진 곳에 장안사 뒷산이 나타났다. 거기서부터 장안사까지는 30리 길인데, 도중에 민가를 지나 10리쯤에 이르자 부처가 마치 연꽃을 들고 있는 듯한 釋迦峯이 나타났다. 그리고 松亭에 이르러 견여를 갈아타고 노송과 잣나무가 우거진 숲은 지나 外圓通을 거쳐 앞에 飛雲橋가 놓여 있는 장안사에 이르렀다. 일기에 따르면 비운교는 丁酉年(1776) 때 홍수로 떠내려가 당시에는 횡목을 놓은 다리로 수레가 다니기에는 아주 위험하다고 하였다. 장안사 주변의 경치로는 절 앞에 있는 長慶峯을 비롯해 그 동쪽으로 觀音峯, 地莊峯, 釋迦峯이 쭉 늘어서 있었다. 유정원의 일행은 회양의 수령이 보내준 술을 마시고 절 구경을 하고서 그 날 밤은 僧堂에서 묵기로 했다. 그것은 산중에서 말을 타고 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승려가 절의 옛 사적을 기록한 책을 1권 주기에 읽어보니 근거가 없는 허황된 것이라고 유정원은 평가하였다.
5월 1일, 지장암을 목적지로 아침 일찍 출발한 여정은 玉鏡臺를 거쳐 그 동쪽에 있는 오래전에 쌓은 작은 성에 도착했다. 전쟁을 피해온 사람들이 축조한 것으로 짐작되는 그 성에는 地獄門이라는 동굴이 뚫려있고, 그곳으로부터 15리쯤 우회하면 동쪽에 靈源洞이 있다. 이 골짜기에는 그 가운데에 靈源菴, 북쪽에는 아주 보기 좋은 燈明塔과 多寶塔이 있는 百塔洞, 그리고 지옥문 안에 있는 100여 장 높이의 암벽인 明鏡臺가 있다. 이곳을 떠나 表訓寺를 향하게 되면 영원동의 물과 합치는 百川이 나오고, 그 주변을 따라 水月菴彌陀菴, 그리고 安養菴이 나타난다. 안양암에서 개울의 다리를 건너 5~60보 떨어진 곳에 鳴潭이 있는데, 그 길에는 持平을 지낸 酉谷 權斗紀의 題名이 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어 유정원 자신도 그 곁에 제명하고 승려에게 그것을 새겨주기를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비스듬하게 기울어 길게 펴져 있는 거대한 바위인 裳巖, 절벽에 매달려 있는 靑蓮菴頓道菴, 그리고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우뚝하게 나란히 서있는 三佛巖을 지나왔다. 삼불암에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폐허가 된 白華菴이 있었는데, 그 뒤편에 7줄의 浮圖와 세 개의 큰 비석이 있다. 그 비석 가운데 하나가 바로 月沙가 지은 松雲禪師의 사적이다. 이곳을 지나 표훈사 다리 남쪽에 있는 普喜菴桂樹菴을 거쳐 표훈사凌波樓에 들어가 승려들이 내어주는 차를 마셨다. 오후에는 표훈사의 뒤에 있는 산을 올라 畸畸庵을 지나 三莊菴의 옛터를 바라보며 天逸臺에 올랐다. 그러나 높고 험한 산길을 건너오느라 다리가 피곤하여 북쪽의 放光臺와 정면의 陽後山에는 나아갈 수 없었다. 천일대에서 둘러보면 동쪽에는 須彌峯, 金剛臺라 불리는 靑鶴臺, 衆香城, 小香鑪, 大香鑪, 永郞嶺, 毗盧峯이 있고, 남쪽에는 望君臺穴望峯이 있고, 혈망봉 아래에는 隱寂菴이 있고, 암자 동쪽 층계를 점차 내려가면 五賢峯이 차례로 우뚝 서있다. 그 곁에 遮日峯, 白馬峯, 十王峯, 觀音峯, 長慶峯, 地莊峯, 釋迦峯이 있다. 유정원이 이곳을 방문했던 날에는 구름과 안개가 중향성비로봉을 겨우 드러내고 반쯤 둘러 있어 그것이 마치 백만명의 신선이 서있는 것과 같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표훈사 주변의 구경을 마치고 나서 그에 딸린 작은 절인 正陽寺를 찾아 歇惺樓에 앉았다가 절과 함께 그 주변에 있는 開心臺衆香城을 둘러보고 산을 내려와 萬瀑洞으로 찾아들었다. 거기에서 석굴을 따라 금강문을 지나 靑龍潭에 들어가니 조선의 삼대명필 중의 한 사람인 蓬萊 楊士彦가 쓴 그 유명한 "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 큰 여덟 글자가 있고, 그리고 조계온의 형제의 제명뿐만 아니라 晉鉉이라는 일족의 아저씨가 쓴 제명을 발견하고는 감회에 젖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가 질 때가 흠뻑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는 표훈사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절에는 함경도 鏡城에서 評事 李宜哲이 2월 10일 돌아갈 때 부친 편지가 도착한 것을 보고 유정원은 당시 편지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꼈다.
5월 2일, 지난날 찾았던 만폭동에 들어가 청룡담에 이르니 어제 유정원 자신이 제명한 것이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는 보고 개울을 건너 普德窟을 찾았다. 10걸음에 한번 쉬어야 할 만큼 길이 험준할 길을 따라 가니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쇠줄로 지탱하고 있는 암자가 나타났다. 그 암자들을 둘러보며 유정원은 무아의 경지에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불교의 진리에 대해 새삼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헤진 장삼을 걸친 승려며 초라한 살림살이가 무아가 아닌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정원은 보다 말고 계곡을 따라 내려와 噴雪潭眞珠潭을 구경하고, 조금 올라가 船潭, 龜潭, 化龍潭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못 위의 獅子峯을 뒤로 하고 摩訶衍을 지나쳐 곧장 彌勒臺로 들어갔다. 그것의 풍경은 얼음 아래로 물이 콸콸 흐르고 나뭇잎들이 싹을 틔우며 터질 듯 말 듯 한 꽃봉오리는 봄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층계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의 절벽을 기어오르려고 하니, 돌멩이가 떨어지는 소리에 손과 발이 부들부들 떨려 올라 온 것을 후회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하지만 용기를 정상에 오르니, 이곳은 바로 산 안의 진기한 볼거리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유종원은 이곳의 풍경을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해가 뜨는 곳에 있는 나무인 扶桑이나 해가 질 때 들어가는 못인 咸池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기묘하고도 장엄하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석 잔의 술을 마시고 취해 한동안 누워 있자니 종자가 해가 저문다고 재촉하여 일어나 내려왔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바다 가운데서 피어나던 안개가 산을 휘감았다. 수행하던 승려가 이를 보고 금강산 구경에 인연이 있다면 축하의 말을 건냈다. 왜냐하면 금강산 구경에서 대부분 골짜기에서 비를 만나거나, 극도의 피로에 시달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오르다가 안개에 막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날씨가 화창한 덕분에 충분히 구경한 유정원의 일행은 표훈사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승려가 절 왼편에 있는 白雲臺에 가면 금강산을 좀 더 가까이에서 대할 수 있다며 가자고 권했으나 피곤하여 나갈 수 없었다.
5월 3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佛智菴을 보고, 작은 고개를 넘어 般若菴에 들어갔다. 그리고 內水岾을 넘어 萬景臺를 지나 隱身臺에 오르니 동쪽에 12폭포가 있었다.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니 龍潭, 石門, 裳巖, 船潭이 나타났는데, 선담이 가장 아름다웠다. 앉아서 잠시 동안 시를 읊조리다가 祝壽窟을 거쳐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인 楡岾寺山暎樓에 들어갔다. 般若菴明寂菴이 오른쪽에 있고, 興盛菴이 왼쪽에 있었다. 승려가 법당에 소장하고 있던 成化 연간에 노비와 토지에 대한 면세의 교시, 왕후가 경전을 베낀 책 1권, 香鑪, 鸚鵡盃, 琉璃盞, 輦具, 珠絡, 燈籠 등의 유물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유정원은 이것들을 보고서 문서며 사경한 것들은 비공식적인 것이기에 믿을 수 없고, 나머지 유물들은 천하에 그 아름다움을 떨치는 금강산에 있는 절에서 소장하는 것으로는 그다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평가한다. 이것은 바로 조선 왕조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않은 증거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당시 유학자들이 불교에 대해 가지는 일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후에 밥을 먹고 난 후에 博達古致라고 부르는 成佛嶺을 넘어 成佛菴을 거쳐 佛頂臺에 올랐다. 그 다음 행로는 길이 아주 가팔라서 가마를 버리고 걸었는데, 도중에 소름이 돋을 만큼 찬바람이 나오는 風穴을 만났다. 그 아래에는 五松臺가 있고, 그 왼편의 절벽에는 鶴巢臺가 있었다. 계곡을 건너 松林菴에 들어가서 그 주변의 굴에 모셔진 53개의 석불을 구경하고, 섬돌 아래로 내려서니 佛頂臺가 나타났다. 그 동쪽에는 만장이나 되는 절벽이 매달려 있었고, 위에는 神仙室이 있었는데 암석의 모양이 마치 지붕과 같았다. 그곳에서 조금 들어가 外圓通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유숙하였다.
5월 4일, 孝養嶺을 넘자 멀리 동북쪽에 유독 빼어난 봉우리가 있어 물어보니 紫霞峯이라 하였다. 개울가에 이르니 ‘蓬萊島’라는 3개의 큰 글자가 못에 있는 돌 위에 있었는데 양사언의 필적이었다. 그것을 뒤로 하고 瀑㳍菴에 들어가니, 輔仁이라는 사람이 속세와 단절하고 제자 15~6명을 거느리고 경전을 암송하고 있었다. 암자의 폭포에 있는 바위에 조계온의 제명이 있어 유정원 또한 제명을 하고는 바리때[鉢] 모양의 못인 鉢淵 근처에 자리한 鉢淵寺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 그리고 다음날 九龍淵으로 유람하기 위해 30리를 걸어 神溪寺에 들렀다. 이 절은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몹시 쇠잔해 있고 몇 년째 중수하고 있지만 아직도 단청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거기에서부터 宗印菴, 中觀音, 童石臺, 龍穿 등을 두루 구경하였다. 지금까지 보아온 바에 따르면, 산봉우리가 서쪽으로 향한 것은 희기가 마치 은과 같았으며, 동쪽으로 향한 것은 상당히 검었는데, 내산과 외산이 모두 이러한 경향을 띄었다고 유정원은 기술하고 있다. 이 날의 여정은 용연에 돌아와 유숙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5월 5일, 해가 뜰 무렵에 출발하여 20리를 걸어 玉流洞에 이르렀다. 이 날의 여정에서 백미는 쇠줄을 타고 절벽을 올라 폭포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다들 복장을 간편히 하고 쇠줄을 타고 기어오르거나 바위에 난 틈을 딛고 올라가는 방식으로 폭포에 올랐다. 폭포는 동쪽 봉우리로부터 두 갈래로 흘러내려 3~40丈 되는 높이에서 석담에 쏟아져 맑은 무지개가 허공에 뻗치었다. 그리고 소리는 우레나 천둥처럼 빠르고 거세었으며, 물방울들은 비가 되어 100여 척 밖에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석담의 깊이는 25丈이나 되는 끈에 돌을 묶어내려도 끝에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 가끔 못 주변에 용이 솟구쳐 오른다고 할 정도라고 하였다. 폭포를 오르느라 힘을 소진하여 봉우리 위에 있다는 8개의 못은 더 이상 구경하지 못하고 옥류동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쉬었다가 신계사로 돌아왔다. 그곳에 오니 예조 참판이후(李 王+厚)가 永興에서 聖祖의 영정을 받들고 돌아가는 길에 금강산을 감상하고자 한다는 연락이 와있어 다음날 함께 해금강을 유람하자는 전갈을 보냈다.
5월 6일, 이후와 함께 해상으로 가서 배를 타고 남쪽의 七星峯에서부터 북쪽의 三日浦까지 둘러보았다. 그 봉우리와 절벽의 모습은 귀신이 깎고 조각한 듯 하나하나가 기괴하다고 기술하였다. 그 여행 도중에 이후유정원에게 산을 유람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유정원은 별다른 교묘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떨쳐내고 그저 산속에 머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후는, 옛사람들이 산수는 보는 것을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유정원의 이 대답을 들으니 평소에 독서를 어떻게 하는지 알겠다는 말로 대답했다. 그런데 이후의 일정이 급하여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어 여관으로 돌아와 작별을 하였다. 그 후에 雲巖의 서쪽에 百井峯이라는 아름다운 곳이 있다고 하였으나, 가마꾼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 그만두고 南涯津에서 묵었다.
5월 7일, 아침에 일어나 벽 위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고는 오늘이 庚辰日이고, 군의 관사를 떠나온 날이 庚午일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문득 朱熹張栻 두 선생이 경오일에 湘水를 건너 경진일에 前嶺에서부터 내려왔던 일이 생각났다. 여행한 날의 간지가 우연히 같다는 것을 알고 유정원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이 되었다. 하지만 두 선생의 여행에 비하면 자신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며 지나온 여행을 회상하였다. 그리고 즉석에서 두 편의 절구를 지어 이러한 마음을 나타낸 것으로 여행의 일기를 마쳤다.
[자료적 가치]
금강산 유람일기는 유정원의 문집인 『三山集』에도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일기가 원본이며, 문집에 있는 것은 이것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일기는 조금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겠지만, 유정원금강산을 유람했을 그때의 심정이나 감정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三山集』, 유정원,
『古文書集成 四十四』 -安東 全州柳氏篇 1(水谷宗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全州柳氏大同譜』,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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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墨
遊金剛山日記

癸酉九月日山窩枕上爲金剛之遊遍踏毗廬龍淵而歸路中遇簑笠
人自言遊賞一洞壑絶勝處袖出五言十韻詩示余余卽步其韻 而中一
句以違韻不次只成九句曰呼而贈之俄而蘧蘧然覺則窓紙生白矣
衾中畵肚了了記得其詩曰九月秋將盡凉風吹脩脩我闋一款段遠作蓬萊
遊凌空歌浩浩萬二千峯頭拂袖而歸來山間月一鉤又聞君遊勝景物向裏
收大小雖不同意趣各有求旣望吳門馬更從武陵舟二者苟能兼何昇鶴又行
悠然起我興神迬洞府幽異哉金剛固所願遊而不得者然忽發宵寐至形篇章
未知是何祥也識之小紙藏棄箱篋日月浸久已入忘域矣甲戌冬除館職閱月私
逍臘月念六日夜特指補通川郡趙學士季溫同時得鶴林聯鑣作行途中
指點金剛忽記疇昔之夢語季溫曰萬事前定儘不虛矣此去當與君同
遊然何必遲待九月春和景明亟理筇屐可也季溫諾之到郡三月積雪未消
閉戶凌兢不敢發行謀四月旬季溫書來約行越二日與其兄思到郡齋要之偕
發而余拘於公務未可擺出臨別曰此行輪君先著鞭我則其將符九月遊之詩讖
歟越七日季溫歸路訪余誇詡勝賞且曰此給非老境筋力可登陟也余曰吾
方入山尋仙得金丹却老方而歸五十之年何可称老耶一笑而別仍自念吾之歸
期遲速不可預卜儻遷就未遂決宿債不酬則豈不爲百年恨耶
是月二十七日以推獄囚西走金城欲於歸路叩山門以省再動之勞將發借行錄於
季溫以代圖經則只記峰巒洞壑之名以示矣前此月會堂宗叔聞余有夢遊詩投惠
二絶句是之適有鄕山便次韻寄呈令兒子明休以二十八日治發待我於長安寺
蒼頭來告曰古有昇仙者鷄犬亦隨此行何可捨㒒隸也余笑而許之秣馬于
中臺舘距郡三十里通川地踰楸池嶺小憩于花川倉距中臺二十里淮陽淮陽倅任令公傳語
要其歷入淮陽明日同行蓋任令方兼金城縣事故也聞其程道當迂四十里辭
以往待中路遂馳到新安酒幕距花川四十里淮陽地日未暮而因留宿

二十八日朝淮令來並轡而行秣馬倉道距新安四十里金城地向夕抵金城距倉道四十里訊囚
于吾軒退入邸舍與淮令叙話夜分就寢
二十九日偕淮令早發憇于倉道遂與分路秣馬于通溝倉道二十里金城地投宿斷髮
楸木亭村距通溝二十里淮陽地夜令主家小僮吹洞簫啁哳不成腔調而亦足破寂矣
三十日日出時乘肩輿登斷髮嶺嶺之峻險倍於楸嶺上山脊少休輿人東指白雲掩暎
處云是長安後山矣到新院秣馬距楸亭二十里淮陽地自是抵長安寺三十里兩峽周遭路脩川廻雖
無勝致之可言而閒有五六茅屋傍水依山松蘿蔚翳幽閴蕭灑無亦有隱君子混
於峽裏氓庶釣鮮採美以沒身而不與世相聞者歟遇岸石淸蔭處下馬小憇忽
山頭黝雲坌聚細雨霏霏半餉而止行到山外十里則見山中釋迦諸峯突兀踴躍
而出如擎玉芙蓉倦僕皆聳發歡喜焉至松亭僧徒以肩輿來待小前則檜
柏參天不見雲日氣像蕭森怳若淸秋自此抵外圓通大抵圓然到寺前有飛
雲橋甚壯丁酉歲爲水漂壞今則橫木爲榷輿行其上然甚危入坐山暎樓
兒子已來待僕則病不果來水聲聒耳山光眩目對僧就於指頭問名不暇他
焉寺前特立者爲長慶峯其東稍下者爲觀音峯又其東地莊峯又其
東爲釋迦峯長慶地莊峯下俱有菴長慶廢已久地莊有一耆衲云淮令送
人齎酒蜜及人馬糧若干需以助遊裁書答之大酌數盃坐移時入見梵殿
甚壯麗僧寮則頗低矮或頹或空居僧亦少矣送騎僕擔任從灑嶺往待
於養珍驛蓋山中馬不可行故也是夜宿于僧堂僧進故蹟記錄一冊語多謊
誕不足觀
五月初一日早發尋地莊菴菴甚幽靜果有一衲率弟子五六人貌閑宇定無塵俗氣
焉下而迂入尋玉鏡臺臺卽巨石平衍可坐下有潭稱玉鏡潭或稱黃淸江以其秋後
爛楓照耀黃色滿潭故也潭西有古築小城橫截壑口蓋避亂者之所爲也鑿一
穴名地獄門入門迂回十五里爲靈源洞洞中有靈源菴後有澄明塔黃金塔百塔
甚勝云憚於陟險不果往地獄門內有明鏡臺巨巖壁立百餘丈面如鏡故名焉
還向表訓寺寺前水下與靈源洞水僉尊謂之百川洞右邊有古水月菴

茂樹荒草而已行未里有彌陀菴菴亦空捨輿渡水見山腰有菴名安養虛
無僧云傍水木棧僅通人行長可五六十步棧竆而有潭潭深五六丈名鳴潭巨石
當路而立有酉谷權持憲丈題名刻余亦題名其傍囑僧刻之小進則巨巖
斜陂長鋪稱裳巖左望靑蓮菴右望頓道菴皆在絶壁懸崖不得尋
渡橋見兩大巖屹然竝峙稱三佛巖前面有懶翁所刻三大佛像傍又刻兩佛
背刻五十三小佛矣行一里有白華廢菴菴後有浮圖壇列七浮圖三大碑其一卽月沙
所撰松雲師事蹟也普喜菴桂樹菴同在表訓寺橋南普喜空而桂樹有數
髡別無奇勝惟幽靜而已渡石橋入表訓凌波樓長安臺至此十里僧徒進茶官隸進食
午後從寺後上山山峻路險坐輿僂伏腰酸脚疼殆不可堪過畸畸菴不入望
莊菴
遺址上天逸臺北有放光臺在正陽後山脚倦難進大抵天逸最當山
之中央高處其東則須彌峯靑鶴臺或稱金剛臺衆香城小香鑪大香鑪
郞嶺
毗盧峯其南則望君臺穴望峯峯下隱寂菴菴東層級漸下
而次第秀立者爲五賢峯其傍遮日峯白馬峯十王峯觀音峯此以下卽長安寺所見者也
長慶峯地莊峯釋迦峯皆環列於左右一擧目而可盡儘觀山之總會處也
是日雲霧衆香毗盧僅露半腰正如百萬仙人倂肩連袂而霞帔蒙首羽葆
障面者焉入正陽寺歇惺樓樓之觀與天逸等而風吹霧褰夕陽照之玉峀銀
嶂璀璨奪目樓前有眞歇臺址不高且就荒蓋有樓則不必更須臺也索
小板題名付之樑上入寺門門內有三層石塔及光明燈以六觚無樑閣庇石佛藥師
殿舊有吳道子畫今亡矣寺之左有開心臺衆香城尤襯其仙則似讓於天逸歇
惺矣下山直尋萬瀑洞輿從石竇過稱金剛門靑龍潭楊蓬萊所書
蓬萊楓嶽元化洞天八大字刻在潭邊盤石上趙季溫兄弟題名水邊石余亦
戱題其傍令僧刻之稍進四五十步忽見佳野上舍族叔題名在路傍令
人驚喜摩挲躕躇久而不去其上有洗頭盆石自成料深可尺許圓圍數
尺有水而坎不盈坐石移晷醉酒酩酊以蜜和水分饋隨行僧長安主持

表訓僧信海僧等說內圓通在西邊大香鑪上有坐禪五六頭松蘿菴望君臺
現佛菴在其背云日暮還歸表訓坐凌波樓鏡城書緘自安邊到本郡郡吏齎送蓋
評事宜哲歸時所付者而發以二月十日矣遠地傳信之難若此且前此已承三月
晦閒書此乃其前消息然欣倒欣倒懷示以我坼該時而有聞也忽見樓北隅有
題名板余亦呼僧具板書附其左
初二日早起復入萬瀑洞泝溪而進至靑龍潭見昨日題名處果已深刻塡朱矣
其上黑龍潭其上碧霞潭皆以容名也越溪尋普德窟路甚峻十步一休抵菴
則一銅柱數十丈竪於崖下以承柱二鐵索維之側身循砌以入軒楹穿穴瞰之下臨無
地窟中安小佛其上僧室甚窄一辟穀弊袖迎拜於前默然不語
形似枯木噫坐忘入定終何所悟悟亦何用而自苦如是耶觀已復下循溪見噴雪
眞珠潭水簾甚奇盤陀平鋪可坐百餘人稍上見船潭龜潭化龍潭
之上爲獅子峯峯之上有獅子菴故址過摩訶衍不入直向妙吉祥有寺基
石壁佛像高可六七丈云是懶翁所刻或稱彌勒臺運中入洞自表
訓至摩訶衍十里而近或輿或步自摩訶衍毗盧二十里而遙十里以後則輿
不可進矣兒子在後余問曰倦乎曰倦矣欲休乎曰耽於勝賞不可暇休也余笑曰
汝讀書未甚倦而輒休何也兒子不答洞中積雪五六丈延袤數里水㶁㶁鳴
冰底履其上有崩陷之憂兩崖樹葉初萌躑躅綻蘂恰似仲春旬望間
景物焉壑盡攀崖崖皆巨石堆積崚磳側柏雜卉轇轕蒙覆無蹊可
尋仰視絶頂政如上壁抱石驀硿手脚慌亂前人履後人頂後人捫前人
踵如是者七八里艱苦無比中途頗發悔心而忽記邵康節欲向上層嘗脚力
更於高處看人寰之句不可以中輟也行得五之四導行者已上峯頭大叫曰海霧
蒸涌將蔽山矣可惜徒費筋力耳余念默禱開雲非余敢擬而業已至此何
可徑還耶遂振袂而上忽東風獵獵霧氣度嶺皆卽消歇俄頃之閒
海天廓然淸明端倪呈露倚巖四眺一聲長嘯飄然有遺世獨立

之意蓋山內奇觀盡入膝底可見者惟歷歷峯巒而已西望三角後巒
依俙於五雲之閒其外更無障礙可通交河高陽以及西海而眼力不及南則隱
隱周遮若城堞者可是太白以及竹鳥二嶺也北則黃龍一峽隔之自其稍東地
角尖入處望之則山之纍纍橫亘或高或低者似爲長白以南而無人識得指
示可恨東臨大海只以沿岸首尾程道計之已二千餘里扶桑咸池固非可論
然非如上培塿而眺者纔數百里外便覺水與天接也儘壯觀矣石上題名
或舊或新比他處甚少遊人不能頻到可知也遍山皆側柏而冬春壓雪仆地多
枯死其他草木五月展葉七月隕蘀一年所長不過分寸而已呼酒酌三觥醉臥一餉
從者以日晏來促起而將下則海中霧氣處處噴涌或如麾蓋或如虹霓或連
或斷狀態奇怪行未數百步已騰集蔽山面矣緇徒來賀曰毗盧之遊所以難者
或入洞値雨或半途倦極或旣上而霧塞矇無所見而歸如是者十常八九今日
之遊天借半日淸明可謂有緣矣余笑曰自有玆山遊人之値天朗氣淸者
何限山釋學誦語耶脚酸危慄倍於躋登之時嘗聞遊此山者獘盡一
袴以其蹲石磨轉而下故也適見從隷新袴露肌不覺失笑到壑中雪積處
僧具飯來待置器雪上剝冰和喫亦一淸快也還入摩訶衍室小而甚淨堂
前一樹似柏指謂桂樹而未可信也坐禪十餘皆以松葉和粥充飢遊客炊爨皆自
表訓送僧供具焉官使告目來到步出屋西七臺臺雖七而景則一仰見白雲臺在寺
左僧云可以襯對衆香而倦不可前仍留宿
初三日早發見佛智菴踰小峴入般若菴在僧五六有一髡絶穀八年夜入窟中
眠云踰楡店中站過萬景臺不尋上隱身臺東望十二瀑一水自山頂懸崖成
瀑凡十二層沿洞而下見龍潭石門裳巖船潭船潭最勝坐吟半餉歷
祝壽窟楡岾寺山暎樓般若明寂二菴在右興盛菴在左僧徒出示梵殿
所藏故蹟成化年閒奴婢田畓免稅敎文王后寫經一冊其外香鑪鸚鵡
盃琉璃盞輦具珠絡燈籠等物云是內賜而無籍可驗寺左邊有
夫以玆山之勝鳴於天下而三百餘年之閒僅有此事我朝之不
崇異敎從可知矣寺中佛像皆以楡木根糾結而庇之五十三小佛著

在其閒僧云佛來東國時休于楡木下故以像之寺亦以楡爲號夫
釋氏有三宿桑下之戒今以一憇之故纏縛如此可謂反其道矣
御榻閣後有烏啅井井無甚異午飯訖踰成佛嶺或稱博達古致東崖有成佛菴
廢址稍東登佛頂臺臺極高截編木橫數丈朽而將壞履之危懔自此路
甚峻急舍輿而徒歷見風穴風自窟中出以木葉投之飄揚不下立須臾渾身
生粟其下有五松臺左邊絶壁有鶴巢臺巢空鶴不來者累歲云豈仙人
乘去不復返耶渡溪入松林菴菴邊有窟窟中有五十三石佛步出庭除仰見來時所陟
佛頂臺縹緲雲際殆不卞吾之足跡曾到於斯也其東懸崖萬丈上有神
仙室巖石狀若屋宇屋中門開門傍小軒有人岸幘佇立凝睇遙望久益
疑眞噫使秦皇漢武視此能不敢然庶幾遇之哉行一里到外圓通曾聞題額
是金生筆而僧徒不知矣日暮留宿而室隨蛟聚不能成寐
初四日踰孝養嶺嶺之高不及博達而輿不通者亦過半矣望見東北一峯尤
秀意其爲紫霞峯詢之果然到溪邊蓬萊島三大字在潭石上楊蓬萊
筆也其下巖上有題刻云朝玄圃暮蓬萊山鉢淵洞淸風桂樹臺東臨大海
揖麻姑六六壺天歸去來僧言世傳亦蓬萊筆也入瀑㳍菴有上人名輔仁
率弟子十五六誦經其中見余官卒語頗款曲怪而問之乃本道通川人也嗟乎旣欲離世
絶俗而終不能斷懷土之念爾有父母爾有兄弟而獨甘心棄背而不之顧何哉
敬兄從弟去下人來傳鏡城書札此弟去時僕痛中路慮念萬端矣主是得
無擾扺達政衛平康之報展讀數回喜可知也出坐瀑㳍上觀兩僧馳瀑令
人哄笑趙季溫題名在石上余亦題其僧刻之入鉢淵寺小歇肩輿渡石橋
見所謂鉢淵者廣袤不過五六丈深可數仞狀似鉢故名之出洞行二十里路甚平衍
有馬則可以騎矣路上見毗盧在眼前明日九龍淵之遊又將行三十里入其下
毗盧峯下一脊如劒刃南走爲嶺其西者爲內山其東者爲外山自內山
而尋者逶迤百餘里非好遊耽勝者儘難到矣入神溪寺寺甚殘佛殿重修有
年而不施丹雘有兩僧廬之陋且弊此僧數十皆是貧丐者焉自西溪越小峽

宗印菴數僧架漏留住云寺後峯最尊者名中觀音西望層厓一石孤立稱
童石臺南有一穴俗稱龍穿西邊列嶽奇峻而潔白不如內山大抵峯
巒西向者白如銀東面則頗黝黑內外山皆然矣日尙早而不可往返龍淵故止宿
初五日日出時治發行二十里沿溪而進左右驀越其閒曲曲成潭淸勝無讓於內山諸
潭者甚多而俱無名無乃至此則遊人已倦來者甚稀故不爲之命名歟到玉流洞
澄潭瀑㳍左右盤石果符昔聞久坐忘起留輿僧于潭邊下隷之㥘弱者
亦止之指路僧及遊山僧俗數輩皆脫笠著短衣余與明兒亦去上衣以防罣罥
行數里石崖十餘丈其下潭深不測懸垂鐵索二十餘尺斜引攀緣而上同行者皆戄
懼聞季溫到此別設一索又以一索繫腰令僧挽之自稱老子觀井法余笑曰
獨不得大車輪以覆潭面且股慄視矍已傷生矣老子政不爲此也余則手攬
鐵索傴僂而進回視明兒此余尤加捷矣行數百步又抵一石崖如
前垂鐵索十四五尺頗有石罅可以著足不如向者之危而隨行者尙有戰掉不敢
下須人扶掖者焉至淵邊盤石布數頃許仰見瀑㳍自東峯兩角中飛
流三四十丈瀉于石潭宛若晴虹亘空䨓霆迅激噴沫成雨灑於百餘尺之外
潭之圓徑可數十尺洶涌靑黑僧言用繩懸石垂之下二十五丈而猶不至底
或有見龍夭矯潭邊者每遊人喧鬧則輒不時雷雨之未信其然否也水
溢下注又成深潭潭邊石甚膩滑傾斜易於蹉跌不特巖墻之危而已
題名盤石上 囑僧刻之 瀑㳍兩角 峯上又有八淵 欲觀之者 更從峯背而陟
然後可至 度脚力不耐更進 故不見而歸 歸路仰見西嶺 瀑㳍自山上懸垂 高
則三倍於九龍 而奇壯則太遜 然以其在九龍之傍故名不著矣 還至玉流洞
午飯已來待令從行者唱樵歌臥石而聽之起廻神溪寺日過午矣人
馬之送留養珍者皆來聞禮曹參判李(王+厚)奉審影幀于永興歸路欲賞
金剛戛過東岑外溫井暮將宿高城郡余旣兼高城任到此咫尺地不相面有
嫌送兒子使宿南涯津而先歸余踵禮堂之行馳入郡館見之約以明日同遊

海金剛
初六日偕禮堂往海上乘舟沿洄南有七星峯羅列海中北則海金剛
三日浦迤走入海來峯巒崖嶂大小不齊而神剜鬼鎪面面奇怪令舟人刺蛤釣
魚而觀之禮堂語次問遊山之法余對曰遊山別無巧法但余五日留山中
而身縻簿領不敢恣意探討况令公馹程尤促九龍毗盧似不可尋惟
得上正陽寺山內之觀可擧其槩循洞而下不待勞力而八潭次第寓目矣
且世人所共由所共見處自有超然獨得之樂不必極幽遐詭怪之觀
然後爲勝耳非但遊山爲然也禮堂曰是說誠有理令人發省矣還入館叙
別卽發聞雲巖西有百井峯絶勝而當一舍乘肩輿就貢僧例當擔輿云
憚於勞人遂輟不往暮宿南涯津
初七日朝起見壁上帖付曆日今日是庚辰而離發郡館之日爲庚午
忽記朱張兩夫子南嶽之遊以庚午渡湘水庚辰由前嶺而下日之支干
偶然相似因此竊有慨然興歎者夫兩夫子仁智之樂固非後生末學所可
窺測而對床之話朗吟之興旣使人想像懷仰於千載之下其隨事省察
交相勉勵之至意於錄詩後序可見矣今余抽身朱墨假步山扃
而一旬輿馬不過爲役志耳目放浪遊遨而已則豈不深
可懼哉口占二絶以識之促發秣馬于童子院午後還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