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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원사실(玉院事實) 부잡실(附雜實)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10+KSM-WM.1852.4713-20180630.Y18501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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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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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일기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일기
작성주체 경주 양동 여주이씨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길
작성시기 1852
형태사항 크기: 29 X 22.5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3책 278면 중 제2책 99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길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길

안내정보

옥원사실(玉院事實) 부잡실(附雜實)
『옥원사실』제2책(총3책)은 1852년(철종 3) 5월의 망알례부터 1853년(철종 4) 추향때까지 원임 선정 및 제향의 주도를 두고 적서간의 시비를 시간 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1852년 적서시비의 원인에 대하여 먼저 분석하고 있다. 즉 1823년의 계미사목를 계기로 서류로 대표되는 신향들의 향임직 참여 요구가 수용되었다. 당시 이들의 요구는 구향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면서 좌절되었다. 그러나 1851년 신유 최제경 등의 상소로 다시 향임직 진출을 요구하는 신향들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신향들은 관권의 지원에 힘입어 경주향교를 장악하고, 나아가 부북의 옥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요구하는 통문을 1851년 6월과 8월에 보내왔다. 1852년 봄에는 부윤 김양근의 도움으로 서악서원을 장악하였다. 이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옥산서원 내 소통문제를 둘러싼 신구향간의 분쟁이 본격화되었다. 이때의 향전은 경주지역 신향들의 총공세로 이어지면서 관졸이 파견되는 사태로 발전되었다. 특히 이 향전에서 주목되는 점은 여주이씨 내부의 서파뿐만 아니라 향내 신유들이 대규모로 참가하였고, 신유들이 자체적으로 임사를 선출하는 등 그들의 요구가 직접적으로 표출되었다. 5월 망향례에 신유들이 입원한다는 도색의 고목이 전해지자 본손과 향인들도 입원하여 수백 명이 대치하였다. 이때부터 1853년 8월까지 약 15개월에 걸쳐 삭망 분향례와 춘추 향사 때마다 양측 간에 충돌이 계속되었다. 양측은 감영과 경주부를 사이에 두고 문보와 상서를 통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이 책의 말미에는 비슷한 시기에 발발했던 손이시비와 병호시비와 관련한 내용도 부록으로 기재되어 있다.
「18-19세기 경주 옥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사간의 향전」,『고문서연구』16·17집, 이수환, 한국고문서학회, 2000.
「도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사간의 향전-1884년 <서류사변시일기>를 중심으로」,『민족문화논총』12집,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8.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9~20세기 영남지역 향촌사회와 경주 옥산서원의 동향」,『한국서원학보』제4호, 이병훈, 한국서원학회, 2017.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옥원사실(玉院事實) 부잡실(附雜實)』은 경주 양동마을의 여주이씨 무첨당에 소장된 필사본 형태의 시비(是非) 관련 일기 3책 중 1책으로서 1856~1859년 사이에 발생한 적서시비(嫡庶是非)와 손이시비(孫李是非), 병호시비(屛虎是非) 등에 대하여 기록한 성책(成冊)이다.
개괄
『옥원사실(玉院事實)』은 총 3책의 필사본으로 구성된 경주 양동마을 여주이씨 무첨당에 소장된 적서시비(嫡庶是非) 관련 기록이다. 19세기 이후 옥산서원을 둘러싼 적서(嫡庶)간 향전(鄕戰)의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각 책마다 향전이 격화되었던 시기별로 구분하여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제1책(총 73면)은 1883년 7월 15일부터 1884년 5월 15일까지 옥산서원에서 신향(新鄕)들에 대한 원임(院任)직 소통이 허용되는 과정에 대하여 날짜별로 정리하였다. 제2책(총 97면)은 1852년 5월 15일부터 1853년 9월 2일까지의 사실과 부록으로 「잡실(雜實)」이 기재되어 있다. 잡다한 사실을 기록한 잡실은 18세기 초반의 적서시비와 1854년 발발한 손이시비(孫李是非), 안동의 병호시비(屛虎是非) 등에 대해서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제3책은 적서시비가 처음 발발했던 1826~1827년 당시의 사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06면이다. 이번에 정리된 제2책은 1852년 5월 15일의 망향례(望享禮)부터 1853년 9월 2일까지의 기사가 핵심 부분이다. 특히 당시에 감영과 경주부에 올린 상서, 문보와 뎨김(題音) 등을 등서(謄書)하고 있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5월 15일 이전에 진행되었던 신유들의 경주향교(慶州鄕校)와 서악서원(西岳書院) 장악 과정과 그들이 옥산서원 소통을 요구하며 보내온 통문(通文) 등을 기재하였다. 9월 2일 이후의 부록에는 1852년 용인(龍仁) 충렬서원(忠烈書院)과 영천(永川) 임고서원(臨皐書院)간의 서얼허통에 관한 통문, 1859년 년 계정(溪亭)의 서손들이 부윤에게 보낸 첩정, 1833년 영남 적서시비 관련 국왕 전언, 연대미상의 신유 상서에 대한 감사의 뎨김 등을 수록하였다. 또한 1856년과 1857년 경주의 가암 최씨와 영해 재령이씨, 대구 연경서원, 계정 옥산이씨 등이 보내온 손이시비와 안동 병호시비 관련 통문이 수록되어 있다. 적서시비와는 상관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던 옥산서원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시비들이었기에 부록으로 첨부한 것이다. 이처럼『옥원사실』은 19세기 중반 옥산서원을 둘러싼 내외부 환경의 변화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그러나 적파 쪽에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서파쪽 관련 자료와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상세 내용
『옥원사실』제2책(총3책)은 1852년(철종 3) 5월의 망알례(望謁禮)부터 1853년(철종 4) 추향(秋享)때까지 원임(院任) 선정 및 제향(祭享)의 주도를 두고 적서(嫡庶)간의 시비(是非)를 시간 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1852년 적서시비의 원인에 대하여 먼저 분석하고 있다. 즉 1823년의 계미사목(癸未事目)를 계기로 서류(庶流)로 대표되는 신향(新鄕)들의 향임(鄕任) 참여 요구가 수용되었다. 당시 이들의 요구는 구향(舊鄕)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면서 좌절되었다. 그러나 1851년 신유(新儒) 최제경(崔濟京) 등의 상소로 다시 향임직 진출을 요구하는 신향들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신향들은 관권(官權)의 지원에 힘입어 경주향교(慶州鄕校)를 장악하고, 나아가 부북(府北)의 옥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요구하는 통문을 1851년 6월과 8월에 보내왔다. 1852년 봄에는 부윤 김양근(金穰根)의 도움으로 서악서원(西岳書院)을 장악하였다. 이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옥산서원 내 소통(疏通)문제를 둘러싼 신구향간의 분쟁이 본격화되었다. 이때의 향전은 경주지역 신향들의 총공세로 이어지면서 관졸이 파견되는 사태로 발전되었다. 특히 이 향전에서 주목되는 점은 여주이씨 내부의 서파뿐만 아니라 향내 신유들이 대규모로 참가하였고, 신유들이 자체적으로 임사(任司)를 선출하는 등 그들의 요구가 직접적으로 표출되었다.
5월 망향례에 신유들이 입원(入院)한다는 도색(都色)의 고목(告目)이 전해지자 본손(本孫)과 향인들도 입원하여 수백 명이 대치하였다. 이때부터 1853년 8월까지 약 15개월에 걸쳐 삭망분향례(朔望焚香禮)와 춘추향사(春秋享祀) 때마다 양측 간에 충돌이 계속되었다. 양측은 감영과 경주부를 사이에 두고 문보(文報)와 상서(上書)를 통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1852년 8월 17일 추향사에 신유 700여 인과 구유 200여 인이 회집한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이날 서원측은 서류들의 분위기로 보아 향사를 행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본부에 문보를 보내어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
문보에 의하면 서류 2인이 문(文) 20민(緡)으로 쌀을 사서 서원 아래에 운반해 두었으며, 또한 신유들은 누차의 향교 회의에서 패장(牌將) 60인을 뽑아서, 각각 10인을 인솔하여 올 것을 약속하였다고 하는 등 이러한 대치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이날 해가 저문 후에 이진안(李眞安)이 도당을 거느리고 서원에 난입하여 감영에 정서한 향유(鄕儒)를 구출(歐出)하는 등 소요가 있었다. 또한 원장 전참판(前參判) 이효순(李孝淳)이 서원이 도착하여 공사(公事)를 설행하려고 하자 신유 여럿이 난입하여 도기(到記)를 주면서 집사에 혼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수용하지 않자 신유들은 집사판목(執事板木)을 던지고, 집사기를 찢었으며 원장 이효순을 비롯한 헌관(獻官)을 위압하였다.
이처럼 상황이 급박하게 되자 서원측은 계속 관에 문보를 보내었고, 이에 관에서는 장리와 나졸을 파견하여 난동을 부린 신유 주동자 3인을 압송하고, 향사를 마칠 때까지 참제관을 제외하고, 신구유 모두 서원 내에 있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로도 신유들의 반발은 계속되어 18일에는 신유들이 문을 부수고 난입하여 수직하고 있던 관졸들과 충돌하여 서로 간에 피해가 컸다. 그 과정에서 원장과 헌관 등 제집사가 피신하였으며, 신유 주동자 7인이 관아로 잡혀갔다. 다음날 19일에 부윤 김양근이 서원에 도착하여 수헌(首獻)을 맡아 향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신유들은 통임(通任) 요구를 계속하였고, 서원측은 이 사건 주동자 중 일부가 석방되는 등 처벌이 미흡하다면서 경주부와 감영에 상서를 올려 엄히 징벌할 것을 계속 요구하였다. 이 시기 향전에서의 쟁점도 이전과 같이 입천(入薦)과 통임 문제였다. 신유들은 정유절목, 계미사목, 이진안·최제경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 등에 대한 조정의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는 명목을 내세워 서원 측을 압박하였다. 이에 서원측은 '원유(院儒)의 입록(入錄)은 반드시 삼참(三參)에 흠이 없는자를 입천(入薦)하고, 입천 후 또 설강(設講)하여 입록(入錄)하고, 입록 후에 임사(任司)를 권출(圈出)하는 것'이 규례라고 했다. 그렇기에 신유는 원참(元參)을 범하였기에 입천할 수 없고, 임사는 더욱 될수 없다는 종래 입자을 견지하였다. 나아가 정조대의 성명은 묘내 집사 1~2자리이지, 입천·입록·통임은 아니며, 이진안의 상소에서도 옥산과 도산서원은 윤허를 얻지 못하였고, 또한 최제경의 상언에 대한 비답도 사환로에 대한 허통이지 원록(院錄)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묘내 집사에 대한 허통도 도산서원 등 여타 서원에서는 불통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더 이상의 허통은 있을 수 없다고 맞섰다.
이들의 대립은 1853년에 다시 격화되었다. 1월 15일의 망향례에 신유 17인과 서파 수십 인이 관의 제음을 보이면서 임의로 옥산의 이진전(李眞銓)을 임사로 차출하여 향례를 감행하고, 묘문(廟門)과 경각(經閣)의 열쇠를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감영과 경주부를 중간에 두고 양측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이때의 향전에서는 신유들의 폭력을 문제 삼아 신유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관에서는 신유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신유들의 다짐도 받아서 이러한 사실을 옥산서원에 하첩(下帖)하였다. 이때의 향전에서는 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신유들을 압박하였지만 그들의 입장을 전혀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2월 10일에는 부윤이 참석한 가운데 판진설(判陳設) 이진채(李眞寀), 봉향(奉香) 이기원(李紀元) 등 서파에게 집사를 분정하였다. 8월 8일에는 서파의 동천(同薦) 주장 속에서 관이 집사 가운데 1과를 허락한다는 선에서 향례를 거행하고, 동시에 천강(薦講)하는 일을 설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는 관의 힘을 빌린 임시방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에 29일에는 타협안 마련을 위한 구향 측 회의가 구강서원(龜江書院)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향유들은 간임(刊任)을 허통하자고 주장했으나 본손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수집사(首執事) 중 1자리를 허통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신유들에게 이 안을 제안하였으나 신유들은 계속 동천(同薦)을 주장하면서 거부하였다.
이후에도 양측간의 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1859년 4월 1일에는 향알시 신유 수십 인이 강당을 점거하고, 도색을 때리는 등 당시 설행하고자 했던 입격천(入格薦)을 무산시켰다. 15일에는 재임의 재복과 건화(巾靴)를 탈취하여 재임을 쫒아내고 멋대로 향례를 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서원측은 이전의 재임을 도집례로 선발하려고 했으나, 신유들이 단자를 찢어버리는 등의 방해가 계속되었다. 이때의 분쟁에서도 서원측은 자체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본부와 감영에 계속 정서(呈書)하여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에 관이 신유들의 과격한 행동을 문제 삼아 구유 편에 섰지만 분쟁을 진정시키는 효과는 미미했다. 옥산서원의 신구향간의 향전은 구강서원·용산서원(龍山書院)·명산서원(明山書院) 등 경주 내 여타 서원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까지 파급되어 영천 임고서원에서도 분임(分任)을 둘러싸고 신구향간에 폭력이 동반된 향전에 전개되었다.
한편 이 시기 향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화되어 경주권 전체 신유들의 총공세로 이어지면서 서원 자체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서원측은 관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원장으로 천출 하였다. 실제 1847년 이후 원장은 대부분 부윤이 천출 되었다. 또한 서원측은 원장으로 예안·안동·상주·성주 등의 유력인사를 선출하여, 이 문제에 대한 영남지역 남인계 사족들의 공동대응을 모색해 나갔다. 이처럼 『옥원사실』은 19세기 후반 옥산서원에서 있었던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서시비의 구체적 실상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또한 당시 조정과 지방관아의 입장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어서 영남 남인계 서원과 노론계와의 입장 차이도 확인이 가능하다.
「18-19세기 경주 옥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사간의 향전」,『고문서연구』16·17집, 이수환, 한국고문서학회, 2000.
「도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사간의 향전-1884년 <서류사변시일기>를 중심으로」,『민족문화논총』12집,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8.
「경주지역 손이시비의 전말」,『민족문화논총』42,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9.
「19~20세기 영남지역 향촌사회와 경주 옥산서원의 동향」,『한국서원학보』제4호, 이병훈, 한국서원학회, 2017.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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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원사실(玉院事實) 부잡실(附雜實)

玉院事實
附雜實
癸未十二月。
下道儒生金凞鏞等。䟽後事目。
一。我國庶流之枳塞。卽古今天下所無之法也。有國用人之道。立賢無方。惟才是用。豈可以地閥之微卑爲拘哉。况雨露之草木。不擇旁枝之下。王者軆天行政亦此道也。今因下道儒生䟽籲我聖上。特推矜怛之仁。有令廟堂從長禀處之批。因大臣諸臣之收議。又下講定節目之敎。猗歟盛哉。此誠國家導和解鬱之大一機會。而此輩之感戴慰悅。猶屬餘事也。謹稽列聖以來。每欲䟽通累陳辭敎。而未果。自先正臣李栗谷主通仕路之論。 儒賢名碩。 多有登諸章奏而力論者 然屢百年國俗已成。 有難卒改。 世宗朝限品收用之法也。 仁廟朝啓下節目。我域先朝丁酉定式。終未能通同間隔而用之。盖亦難愼之中。亦有挈碍之端故也。今承聖敎。對揚之道成憲。則監先而有所損益實效。則後而期有永久。盖限階則遵倣通典原典。淸顯與選職之不許。亦遵原典及丁酉定式。追述而增續之。此有國朝初有之大䟽通也。苟使秉銓之臣。奉承德意。無或如前之廢閣。則法如何。仍舊事若將待今。而齎志抱材之士。必無枯坎老死蓬蓽之歎。立品用材之道。限品存階之典。可以兩全而不悖矣。謹與吏兵曺長堂方議酌定條。列于左爲白齊。
一。文之分舘武之始薦。謹遵丁酉節目。依前以校書舘守副薦施行爲白齊。
一。文官限以從二品。許左右尹及左副工參議。外任限以牧使。通淸依英廟時例。只許臺通。此外不通。選無薦圈之該各司。並勿拘爲白齊。
一。假注書若無三望。則依典籍奉常主簿直講例。只與成均並下通爲白齊。
一。蔭官限以牧使。初仕府都事監役守奉官皆無碍。若廟社陵殿宮官及桂房敎官所職。謹遵丁酉節目勿許。外各該司並勿拘爲白齊。
一。武官限以從二品兵使。如訓鍊正副正等通望之職勿許。其各司及參下武兼四山參軍。皆勿拘爲白齊。
一。無論文武官。如摠管西北閫亞將。自是卿宰重選之職。不可以已經左右尹及兵水使。仍無階限。並勿施爲白齊。
一。我國用人。旣出門地。謂之均是庶流無所分別。非愼惜之急。隨其家閥。以爲差等之地爲白齊。
一。文識行誼之卓爾者。材器政績之著顯者。宜有不遵常規。拔例甄用之道。必待一世公議所許然後。廟堂銓曺禀旨施行爲白齊。
一。十室必有忠信。豈可以地處獨爲拘挈。自今各道道薦。以庶流加定一窠。博採士論。另擇孝悌力田。經明行修之人。自邑報營。自營聞于朝庭。以爲收用之地爲白齊。
一。各邑校院及校任。任之監司守令。另加着念於䟽鬱之政。首任通用之邑。則依前通用。若不爲通用之邑。則亦存階限。而益加䟽通。以爲慰悅之道。如或因此而有分外起閙之端。則依丁酉節目。隨現重繩爲白齊。
一。今於仕路䟽通之後。或因嫡派之弱殘。乖亂名分之罪。依丁酉節目。繩以以孽凌嫡之罪爲白齊。
事目後新儒一倍層嶝。敺逐校長南鳳陽。仍爲設公圈出渠輩。校長孫萬九。掌議辛。因作窠窟。
其後二十六年戊申。有李眞宅上䟽。而未蒙允兪。
粤三年辛亥。又有崔濟京上言。
右謹啓臣矣等 伏以均是天地間所稟賦化育中物 矧以世篤忠貞之裔 家傳詩禮之緖 獨抱千萬 古所未有之切寃至痛者 自父祖以來 本無罪辜於朝廷 又無釁累於門閥 胡爲乎生而爲棄物 長而爲庶人 死而爲不瞑之鬼 子子孫孫 隨出隨錮 不得顯用於世 父不得視以子 故子不得繼序於父 於其鬱則四百年之久 而計其數則半一國之衆 昔在憲宗大王在宥之時 臣矣身等 以窮人無所歸之踪跡 敢暴疾痛之私於慈覆之下 其䟽若曰 惟我東方自箕聖設敎 歷羅麗幾千載 至于我太祖康獻大王立國之初 未嘗有庶名區別之規 官而惟才之用 家而惟子之繼 一遵典禮 少無間焉 不幸而有一徐選者 挾其私憾 刱爲悖倫 繼以姜希孟傅會其餘意 轉至軹塞之境 然此非當初廟議朝令之永錮者 故世廟朝聖敎若曰 天之生民 本無貴賤 豈拘本係 予無私也 宣廟朝聖敎若曰 葵藿傾陽 不擇旁枝 人臣顯忠 豈必正嫡 仁廟朝聖敎若曰 舊制狹隘 隨才擬望 肅廟朝 特下門閥用人 爲我國痼弊之敎 英廟朝 以先王遺意文之持正武之宣傳 一時許通而累下恩旨 若曰 切勿拘碍以存國初之風 正廟朝聖敎曰 年前臺閣䟽通 實出於先王苦心 而有若無實 許多庶流 豈無才俊之士 爲國需用乎 又曰 參下序陞 初無區別 則獨不可通瀜備擬於參上窠乎 至以䟽通親題策士 聖意所在 庶可仰度 逮夫純廟朝癸未 臣等之䟽龥 聖批曰 爾等之可矜 予亦深知 令廟堂從長稟處 翼考代理之初 睿敎若曰 庶類許通 卽我大朝 曲遂萬物之盛德大惠 而許通多年 尙無實效 是豈對揚之道示信之政乎 自今大政爲始 外而守令 內而通淸與廊署 擬望以入 俾無寃鬱事 分付兩銓 且列朝諸名碩 莫不力主䟽通之論 期欲矯革 故文正公臣趙光祖 首建擢用之議 文成公臣李珥 又爲䟽通之論 文簡公臣成渾䟽曰 庶孼禁錮 通天下所無之事 文烈公臣趙憲䟽曰 謀用大臣 不爲萬世失人之憂 文正公臣宋時烈䟽曰 庶孼防限 初非祖宗之定制 文純公臣朴世采啓曰 內變常規 正合變通 故相臣李恒福李元翼柳成龍金尙容李敬輿崔鳴吉張維沈之源金壽恒崔錫鼎崔錫鼎吳允謙尹昉趙顯命金相福 諸宰臣李袤元景夏李周鎭李秀白金南重金壽弘李景容 以䟽以啓 陳請恳至 有曰 新化之日 不可無䟽通之擧 有曰 爲臣而不得親近耿光 則君臣之義疏隔矣 爲子而不敢呼其父 則父子之親 亦乖謬矣 甚至於舍己之子而取繼於已成行路之同姓 傷人紀蔑天理 莫此爲甚 有曰 卑薄庶類 殊欠王者立賢無方之道 有曰 鄕曲賤流之子時或顯仕 而世族名家之裔永錮而棄之 用舍之際 顚倒極矣云云 聖批若曰 此豈徒爲爾等之寃鬱而已 實有欠於王者立賢無方之義 况有列聖朝前後聖諭 又如是勤摯者乎 䟽辭令廟堂從長稟處是自如乎 臣矣身聚首相慶 恭竢廟議之稟處 臣民無祿 遽抱弓釼之痛 廟啓未覆 星霜屢變 臣矣身等痛寃情實 則癸未收議時 二品以上文武宗臣 五十餘人 無一貳岐 而至於永安府院君忠文公臣金祖淳議曰 庶類之枳塞 不惟歷代萬古所未有 卽亦國家所未嘗然也 語其始請枳塞之由 則不過碌庸無識之人挾憾報復之計 語其後議疏通之擧 則非東方之大賢 皆不世之名臣碩輔 塞之與通之之間 其是非得失 自有不待卞而可知者矣 且人之貴賤窮達 皆有生以後事 而至於此人 則其身未生而已賤 其命未賦而已窮 豈天地生物之理固若是乎 至若爲子弟而不敢稱父兄 爲血屬而不得承繼序 尤天下古今非常反經之事云 尤爲恳惻剴切矣 盖此事若不更張 則雖有漢之衛霍宋之韓范晋代之陶侃王珉唐朝之蘇頲李愬之才德全俱者 皆將以庶類薄之 而不過潦倒於冗仕末品之列而止 則齎忠悃而無自效之階 抱經綸而無可展之路矣 或以爲累百歲邦禁 不可猝變 而此有不然者 雖先王之良法美制 法久而弊生 則亦隨時變易 故忠之弊以質救之 質之弊以文救之 歷代之因革損益 不可枚擧 而司馬光宋之賢輔 當哲宗之初 盡變舊法曰 先王之法 善者 雖百世不易 可也 如惠卿安石等 所建改之 如救焚極溺 今此廢棄庶類 卽徐選姜希孟所建 而非聖朝所刱之法者哉 竊惟我主上殿下 承寶位拊育群生 凡域中百翹蠢動之物 莫不感恩昭蘇 擧望 湔濯於一初淸明之化 臣等復以忍痛含寃 萬不得已之情不避 猥屑冒瀆崇嚴蹕路 呼籲罪合萬死 大抵臣等枳塞之端 揆以天理人情 有究說不得者 列聖朝䟽通之聖敎 不啻丁寧恳惻 而至今闕而不行 諸名碩以議以奏苦心於䟽通之論者 並歸空言 而夫何一險人逆天理蔑人倫之議 則輾成沉痼 反成金石之典 古今天下 寧有是理乎 伏望聖慈特垂憐察 臣等窮天地亘萬古所未有之寃狀 仰禀東朝 誕敷明命 凡係䟽通之政 軆我列聖朝哀矜惻怛之辭敎 先從人倫而明 則繼序正矣 繼序正 則仕宦通矣 通仕宦 先自文蔭武初路而始之 使匝城之內廢棄之類 䟽洩寬鬱 導迎祥和 則上自朝廷 下至鄕黨 臣等含生之備擧皆鼓舞交欣於熙熙之中 抑亦抱寃長逝之魂 庶將歡欣感頌於冥冥之際矣 玆敢冒死控籲 特下正論通鬱之命
領相權敦仁筵奏
卽見禮曺啓目 則粘連京外幼學崔濟京等上言 以爲年前上䟽 未蒙稟處 而有此備擧䟽辭 而更籲云 請今廟堂稟處 夫以一徐選而能枳半一國於四百年之久 以我列聖朝憫恤惻怛之敎 先輩名碩至公至正之論 尙不能痛革於四百年之久者 非但庶類之不幸 臣竊爲國事慨惜之也 夫王政圖洽 敦倫爲先父子人倫之始也 若夫父而不子其子 子而不父其父 甚傷倫而悖理者 何如 今乃寧取他人之子而謂之子 不以己之子爲子 是可曰父而子其子乎 生無以稱謂加於父 死無以祭祀奉其父 是可曰子而父其父乎 通編卽不刊之典 而有妾子者 不許立後 則我聖朝敦倫正俗之化 嗚乎至矣 然而不恤血氣之重 甘心國法之外者 彼其人 亦豈無父父子子之恩與義也 姑息門戶之計 遂成蔽誤之痼 使人倫輕於仕宦 典則閼於俗習焉 有無罪錮人於四百年淸明之國 而坐致倫日傷而法日壞也 癸未節目 未嘗非廣 其規模務盡䟽鬱 而纔設艮限 枳塞猶前 顧安有䟽通之實 而弊原之可革乎 夫坐枳者 累積而成痼 議通者 因循而未斷 臣今以寂廖之言 亦何敢望一朝之效 而第念我朝用人 專尙門地 士夫進退 皆有高下之稱錘 而名以庶類 則初不問本地華閥冷族 渾歸於所謂校書 而無所分別 豈其門閥之稱錘 在於士夫 而不可在於庶類歟 且名賢故家之裔 卿士大夫之後 名雖庶類 較之遐鄕卑微 當羞與爲伍 而彼遐鄕卑微者 朝家多選入於槐園國子 一冒庶名 反出其下 此豈但庶類之齎恨 抑朝家綜覈之政 恐不當若是偏也 文而分舘武而始薦 癸未節目 雖則仍舊 加於此之階級品秩 亦多變通於舊典 則不必獨靳於發軔之初 若隨其族姓之門閥 斟酌槐園宣薦 而姑先許通 則亦可謂䟽鬱導和之政 至於立後之法 倫理之大閼 國典之著禁 嚴勅春曺 有妾子者 竊勿成給禮斜 以爲申明舊制之地 而熙朝官人 多記先故大夫登庸 毋籍遺蔭 旣承其嫡 則豈獨先蔭之不可籍乎 若其有蔭家永嫡者 一視本閥而收用 無或拘於界限 則彛倫不期正而自正 典憲不期遵而自遵矣 且有一合當變通 如廟宮東西陵寢祭官例 不得以庶類差遣 夫國之所尊 莫如杜稷 渾差遠邑陵寢 守令差祭 而庶類守令 多爲獻官 陵寢豈有遠近之別 社稷本及廟宮之重哉 卽雖知班駁而未及雅正也 臣意自廟宮以至各處寢祭官而拘差 見不害 爲䟽通之一端 凡此緖条 皆係通變 臣不敢擅斷 仰奏下詢祭延大臣及諸宰 處之如何
左相金興根筵奏
云云庶類䟽通 自有列聖朝大哉之敎 且有先輩名碩迭陳之論 而今且領相所奏 又備盡無餘 臣無容更贅 而第念朝家之前後軫念 非不至矣 輒因不克對揚 命令每致失信 規式徒歸空言 其所齎寃累瀆 未必不由於此 今番筵稟之後 又復與前無異 則卽其事軆 極不成說 從今以往 別般提勅 期有實效恐好矣
右相筵奏
云云庶類事 不但渠輩之稱寃而已 列聖朝以來 憫其堙鬱 許其䟽通 前後飭敎 不啻申複 而只緣習俗膠固 下之所以對揚 不能悉遵 著令挽近 雖有如干變通 而猶有齎鬱之歎 今此首相所奏 視以門閥 別加調用 如其承嫡 俾繼世蔭 則綜覈之政 恢蕩之道 兩得其宜 臣無容他見 而若又因循抛置空言而止 則非所以而解積寃也 另加飭勵 俾有實效恐好矣
上曰 旣有列聖朝受敎 而自下不能對揚 今大臣所奏又如是 凡於仕宦 各別收用 俾無如前抑鬱之歎可也
辛亥六月初七日
鄕校會中通玉院文
右謹通諭 伏以變革因時天理之自然也 䟽通合典 朝廷之盛儀也 今夫朝家處分 實出於明天理正人倫率舊章革弊俗之一大典禮 而不但爲此等半一國寃鬱之䟽洩 又有關於聖朝億萬年 和氣之導迎 猗歟盛矣 明良際會 都兪贊衰 上承列聖朝受敎 下遽諸名碩奏議講正通典 領議政奏曰云云 左議政奏曰云云 右議政奏曰云云 至於登筵文武諸宰 無一岐貳之論 而大王大妃殿傳曰 此豈自上不施而然乎 自下不能對揚之致也 天地間豈有如此抑鬱之事也 聖批若曰 旣有列聖朝受敎 而自下不能對揚 今大臣所奏又如是 凡於仕宦 各別收用 俾無如前抑鬱之歎可也 又若曰 其母則賤 而其父則一也 此乃骨肉而何取他人之子乎 大哉王言 盛德涵燾 無物不遂 擧皆湔濯於一初淸明之化 而繼序之正 本乎天倫而明之 仕宦之通 先自文蔭武初路而始之 於乎至矣 夫人倫明於上 則敎化行於下矣 設爲庠序學校以敎之 所以明人倫 學宮 先師之廟皃而多士之所關也 則生此王國 均被菁莪之化 而欲明人倫之至者 斯可依歸之所也 竊伏念生等俱是名賢忠貞之裔 卿士大夫之後 本無罪辜於朝廷 又無釁累於門閥 而酷被一徐選挾私感報復之悖倫 倡出古今天下所未有之事 毒流萬姓於四百年之久者 旣爲甚矣 亦已窮矣 窮則變 變則通 亦理之常也 伏願僉君子勿以異類別人之看也 皆我族類 皆我姻戚 有如埋沒之鑑 一拂拭 則垢蠱明全 還得當年之照膽 何汚之有 何擯之爲 同閈之塾 一鄕之黨 生長絃誦之門 觀感詩禮之庭 而徘徊於宮墻之外者 于今閱幾載而積幾禩哉 良可歎也 訖可休矣 復豈有甚麽未盡之意耶 夫子曰 己欲立而立人 其欲達而達人 服習先聖訓之賢人君子者 都將一例看 大小大快活也 盖我君上紀法之宗 卿相紀法之穿也 議紀法而修諸朝 著之上 則恪謹而遵行者 亦鄕曲間士林事也 其在軆禮 恐不當如前膠固 用建確論 厠容於講明彛倫之地 而周旋於奉將俎豆之獻事 千萬祈懇之幸
崔蕩京 孫養國 辛仁輔 權學悅 李壎 韓珪 任致明 鄭來吉 金最振 李震基 李基鎭 辛載鎔 鄭志韶 權必? 崔思崑 韓相良 孫時演
同年八月二十日
鄕校會中抵玉院單勅
伏以天地之中 率降衷之性 禀秉彛之心 而三綱五常 由是而立焉 四端七情 在玆而發焉 凡有血氣者 無不知君父之尊親 稍有知覺者 亦能達事物之變通 上下承官 無堙鬱之氣 遐邇一體 有過化之妙 則人道至矣 人事極矣 惟我東土 本以禮義之邦 又被仁賢之化 多士所關 莫大乎大學 先賢所過 無不起書院 東序西膠 聞絃誦之聲 圓冠方領 習俎豆之事 時則有若圃隱鄭先生益齋李先生 爲其師表 而每以揖讓推引爲先 不以拘碍排塞爲務矣 屆我聖朝 險人徐選 倡俑不經之論 晉山姜希孟 更綴無倫之辭 使半一國庶名之儒 作數百年寃錮之黨 此乃前古未聞之事 祖宗所無之制 而衛誣之防口 甚於防川 侂冑之禁學 苛於禁錮 至於天倫歝敗人道滅絶 則玆豈非君子歎世之時 而志士滿矜之淚耶 粵我宣祖大王 始降許通之敎曰 葵藿仰陽 不擇旁枝 仁廟朝 又下敎曰 三曹各司 隨才擬望 肅廟有勿循常規之旨 英廟有前平無碍之批 于時乎 名碩趾拇仰答天意 揚休而倡論之 晦齋李先生嘗曰 庶孼防塞 前古所無 文烈趙先生奏曰 專廢庶孼 則李仲彪之徒 不用於世 西厓柳先生箚曰 不拘門地 文正宋先生對曰 庶孼防塞 非祖宗之制 仙源金先生䟽曰 痛革舊弊 及夫趙靜庵李大憲李梧里趙重峯諸先生 亦莫不恳恳於許通 泛泛寰中 悠悠海內 俱是一王之臣民 又多先賢之子孫 則可愛非君 吾君之令 不可不奉 僉念我祖 我祖之言 不可不遵 然而或恐徐選之輩 復生於此世 姜希孟之類 亦存於今日 枳塞朝令違越先議 故生等宣誦聖敎之廣前 輪告朝論之恳惻 使有耳有目者 旣同其聽聞 雖無知無覺者 亦咸爲曉諭 稍待許通之有日者 卽生等之本心也 夫敎學院祠 乃儒林之所章甫俎豆 亦士子之事 而生等已通於鄕校首善之地 則各院各祠 不可以新儒排之也 以享以祀 不可以一名塞之也 而况聖批新降 詢謀僉同 陵寢通獻官之任 家廟定繼序之典 生等淺慮 以爲國君之廟 猶能參奠 則鄕賢之院 想必無碍宗嫡之序 尙且繼緖 則儒林之所似或不拘 夫以僉尊愛國之悃 旣知朝令之如此 則其祠院許通之效 當在生等恳通之先 而逡巡推頉 坐送時日者 無或有待於僉議之沕合耶 抑亦無意於朝令之遵奉耶 如或無意於朝令之遵奉 則生等抑鬱之痛 已無可言 而先賢陟降之靈 庶鑒朝令之防止 則亦豈不慨歎於冥冥耶 大抵生等之通塞 有關於氣數之運回 而今年下敎之後 風不鳴條 雨不破塊 五穀登 庶物蕃 玆乃吾君䟽鬱之化 感應天地之和 而亦僉君子觀象玩變之時也 且前以階限二字 便作拘碍 寒草未盡於發榮 幽谷未洽於陽春 而今玆新䟽之後 永無階限之別 則其爲我國校學祠院 想無許通之異同 而不須睥睨於他邑之先後也 伏惟僉尊 諒止鑒止 千萬幸甚
辛仁輔 李基肇 崔世觀 李圭燮 金最說 孫世觀 權學悅 韓相良 孫星赫 崔世夏 金最永 鄭斗一 李奎永 金永熙 李魯冕 鄭憙 李寅和 朱陽復 孫宙敏 孫時侃 權仁錫 崔世彦 韓錫璉 辛載鎔 李圭祥 李世輔 金宰坤 權必? 李浩錫 李錫魯 鄭志韶
壬子
春 新儒又奪西岳書院 新任李綺壽 當時用干本孫 抱劒矢死 沮遏不得 竟被官家金穰根扶抑岳院 遂爲新儒所據 其後傳聞 以爲且將作閙玉院牌 抄聚黨 名下排錢 南北相應 氣焰凜怖
五月十五日
香謁新儒入院之意 都色告目來到 故本孫及鄕人一齊上院 雜處講堂 彼此到記數 多至數百員 朝夕 則以初頭之故 一幷院供 而罷會時 與新儒言及曰 院力凋殘 苟若陸續聚會 則此後供饋彼此間 不可自院辦供 當以各自齎備云云 而歸
新儒呈本府題音 原狀未得見
不奉朝令四字 無乃妄發乎 聞甚怪且訝矣 益加恳乞 豈有不許之理向事
六月初一日
香謁又如前聚會 朝夕支供 自門中辦備輸上糧米饌物 設施於院村中秒廣家 新儒入院者 亦數十人 供饋之不以院供 不無恐喝 而終不施行 朝後罷歸 鄕儒十員 本孫九十一員
新儒呈營題音 原狀未得見
許不許姑勿論 不奉云云 果有屋下酬酢是喩 姑爲勿論 院事從公議歸定事
新儒營題到付邑題 原狀未得見
營題如是至嚴 從當下帖向事 下帖終不出來
同月十五日
香謁又如前聚會 朝夕支供 更以架家爲之 而每員一時料五分式 收料四分式 朝後罷歸 鄕儒十一員 本孫六十八員
七月初一日
香謁又如前聚會 會中僉意 皆云 彼輩旣以呈狀 則死守本意 不可無一番對卞以呈營邑 收議而罷 鄕儒十三員 本孫六十七員
院儒幼學李在誾李翊儉權鳳運 呈本府狀 七月初七日 本尹 南性敎
伏以本院之有新儒閙端 今至三數朔之久 以我明府公明聰察 夫豈無關聽於其間哉 院中訖無息閙之望 則一者就正法司不容但已者 而自有此閙以來 民等愚見 以謂儒林間事 當以士論爲正 君子之爭 不可客氣相乘 故逐朔朔望院會時 彼來則我往 務以和顔 眞情以卞以諭 若望其回心改圖矣 近聞鄕新儒辛在鳶孫世麟李奎永輩 倡率徒黨 遽然擧狀於營府 則於是乎訟端已成矣 民等今雖欲杜口無卞 得乎 然而彼之所呈原狀 累欲求見 則諉以留狀 尙未得見 雖未知如何搆揑 而自己上區區卞白 猶屬細故 不必呶呶汲汲 而至於本院之不許庶流通任一款 盖有三百年一定不易之規焉 民等請畧陳之意 我東儒賢 未有盛於晦齋退溪兩先生 而本院乃晦齋先生主享之所也 建院之初 退溪先生 特爲講定取士之規 以作圈任之階 今其節目防限 森嚴昭載於院案 民等又焉敢一毫爽實於呈狀中耶 盖其爲規 必以士族中 本參外參妻參俱備者 擇取然後 各書薦者之名於甁上 輪次取點 三參中無欠者 方許入薦矣 入薦者 方通院任矣 圈點中 如或一有犯參於庶流 則雖以先生後裔舊鄕名家 而一切擯不入薦 又不通任 是乃本院之遵行古規 惟彼新儒 本無元參 故旣不入薦 則通任與否 尤非可論也 不意今者 一鄕新儒 不有賢規 罔念階限以初 則校宮之作變橫奪 看作熟手能事 而岳院英齋次第專據 此之不足 而甚至作閙本院 踰時閱朔 必欲一軆幷據而後已 嗚乎此何變怪也 此何風習也 其所以作變起閙之端 姑不可一二枚陳 而最其恐動之際 必以不奉朝令四字 作一脅制之術 而此亦有不然者存焉 粤自癸未䟽通以後 彼輩急於躁進 而猶知本院院規之移易他不得 故戊申年間 陳䟽中表擧玉山陶山兩院 而未蒙允兪 又於前秋上言 自上裁處 惟在於通仕路一款而已 未嘗有一言以及於學校者 則今以仕路之幸蒙調用 而一軆欲通於院任者 是果奉朝令乎 抑以陶玉兩院之未蒙允兪 而本院之不許通任者 是爲不奉朝令乎 民等俱以鄕曲微踪 㤼於新儒之指無謂有 而苟相肯諾 欲加濶狹於古規 則非徒負罪於大賢而已 民等之死守古規 不敢通任者 前後事實 如上所陳 伏願城主閤下 細垂鑒燭 仍取新儒之今番營府狀辭參考 民等之相持可否 而亟賜公正斷案 俾院閙自息 士論得伸焉 復有一說 本院之爲本院 無一非名公賢相 從前顧護之賜也 始則金黃岡先生 狀請於院宇創建之日 後則李梧里相公 劃助於干戈搶攘之時 繼以守土按道之諸先輩 隨事眷念 矯弊救閙者 至今載在院案 歷歷如昨日事 而不幸輓近以來 學政全頹 院力漸殘 且當暯荒灾歲 本院之凡百需用 沒無其策 而被他無端起閙 逐月兩次煩費 實非細憂也 更伏乞特擧六事中一政 嚴明處斷後 新儒之三度留狀 幷爲出示 民等以爲卞厚誣 保賢規之地 千萬恳祝之至
題曰 許通與否 惟在公議之如何 何必張皇煩訴事
同月十五日
香謁又如前聚會 營狀適値 營家有事 未得實狀而歸 退待營門事淨 更送儒生一員 鄕儒十二員 本孫六十一員
院儒幼學李達祥權鳳運李晦脩呈營狀
七月二十五日
巡相洪說謨
伏以本州之玉山書院 卽先正文元公晦齋先生主享之所也 盖本院刱設計今三百年之久 而上自朝家營府 下至韋布與儓 莫不崇奉而尊仰之 逈異他院者 豈有他哉 誠以晦齋先生 卽吾東方之考亭 而書院古規 別有可敬可尊者耳 不意去五月十五日 香謁時 一鄕新儒 倡率徒黨 欄入書院 其風聲氣焰 不知有何樣變怪 故生等聞 卽齊進 究問其所以來之意 則新儒盛氣大言曰 朝令之下 本院何獨無奉行之道乎云云 生等始以遜辭而曉諭之 中以義理而分析之 終以一部賢規 不可移易之意 申明說破 則其中辛在鳶孫時夏孫世麟李奎永等四五人 以不奉等語 把脅之恐喝之 生等蹙然正色曰 此何等妄發也 新儒䟽通 已在癸未 而新儒亦知本院院規之移易不得 故戊申年間陳䟽中 表擧玉山陶山兩院 而未蒙允兪 至於前秋上言 則自上處分 惟在於通仕路一款 而今以仕路之幸蒙調用 一軆欲通於院錄者 是果爲奉朝令乎 仕路儒宮 固不可一例言 而且以仕路觀之 翰園瀛選 未聞通擬 太學卽一國矜紳首善之地也 而亦未有並許而混施 則新儒今日之計 無乃不思之甚者乎 以此卞責 則卽地恐脅無所不至 而如是三朔逐月兩次 此誠世道之極變風化之大關 生等俱以本院章甫 旣不可以力勢抵敵 又不可以義理解釋 不得不齊聲仰籲於當世主風敎之君子 以俟其裁處 惟閤下細垂察焉 盖玉山書院院規學令 卽退陶文純公李先生所講定者也 以文元妥靈之院 守文純講定之規 則伴伴條例 何者非謹嚴何者非敬重 而就其中薦士一款 爲第一莫重莫嚴之規 盖其薦士之法 必取士族中 有家閥地望者 從公議取舍定 取舍之例 必以三參爲主 先觀父參 次觀母參 又次觀妻參 三參無欠然後 方許入薦 入薦然後 方通院任 故圈點中 如有一參犯於庶流 則雖以先生後裔簪纓望族擯 不與論於院錄 自外於院任 此乃金石不刊之典 而本院三百年遵守不替者也 往在丙戌年間 先生庶孫之居院底者 亦有院中紛䟽之端 夫先生庶孫 有異於凡他新儒 故士林不無顧惜之心 當時本家亦或有曲念之道 而惟以一部賢規移易 他不得軒輊焉 不得故前後營敎中 有曰 玉山藏修之所 尤非他院之比 有曰 薦規固難毁劃 有曰 以先正之誡 本院之規 爲防塞之端 則雖有前後朝令 亦難强而行之 有曰 書院事軆 較之鄕校 不無公私之分 則固難以令甲從事云云 終不能濶狹於其間 則此其爲更無容議之一證案耳 如使生等不念賢規 輕自毁劃 則何不許通於先生庶孫 而苦爲此死守 血爭於三十年之久乎 今者新儒非不知此箇事實 而一邊作閙於書院 一邊呈訴於管邑 生等求見其狀辭 則稱以留狀 掩匿不出 第未知狀中所措者何辭 所誣者何語 而閤下題敎下者 盖嘗得之於傳聞矣 誣辭付之屋下 院事任之公議 閤下之敎 豈不誠正大而嚴明哉 夫公議者 不咈乎人心 而擧世同然之謂也 環嶠南七十州 圓冠方領之論 其誰曰 毁劃大賢講定之規 而許通於庶流乎 大君子一言之敎 正所謂先機豫斷 而不嚴而威者也 彼新儒輩 亦宜改慮屛息 知所畏戢 而一向勞攘 什百爲群 計熟於盤據校宮 手滑於脅奪岳院 東西聚散 左右恐動 或脅之以生事於來朔香謁 或怵之以作變於八月大享云 生等雖不敢預以爲必然 而以今日擧措觀之 則亦不敢不以爲必不然也 一鄕士林 方惴惴恐㤼 無敢誰何 而見今百年 重地駭機 迫在朝夕 秋丁禋薦 難保其肅穆從事矣 此豈可看作細憂 不思所以禁防之道哉 伏願閤下軆國學之重 念賢規之嚴 前後作梗於院中 搆誣於營邑者 特賜嚴懲 使院閙自息 士論得伸 則本院幸甚 斯文幸甚
題曰 蹴以與之 乞人不食 蹴與之物 乞人尙爲不食 豈可換而取之乎 在物如是 况名器乎 必爭之心 必出於爲名器也 則力取 亦可謂名器耶 力以取之 則有何名器之貴乎 校院卽禮讓之地 而無禮讓之風 有爭競之習 至於遠近駭聽之擧 爲新儒誠萬萬寒心 亦不可使聞於人者也 卽爲招致曉諭 而如或不修禮讓之敎 更有駭悖之事 則亦不可以責之 以士子當有別般嚴處之擧 須悉此意 先勉自修 後待公議 宜當事
院儒幼學李達祥權鳳運李晦脩 營題到付狀 七月二十七日
伏以新儒輩不有官題中 惟在公議之敎 去望日香謁時 如前作閙於本院是去乙 民等聯俯狀 仍呈議送 則題音內 所以惜名器禁爭奪之義 節節簡當嚴正是乎旀 末乃以招致曉諭 而更有駭悖之事 則亦當有別般嚴處之擧 申嚴題敎是乎 乃近聞今十八日 新儒校會時 排鋪做措 則其前輯名成案 逐類爲隊者 必有不遵題勅 逐次作閙之慮 伏乞參商敎是後 招致新儒中辛在鳶孫時夏孫世麟李奎永等 主事作閙者 依營題嚴加曉諭事
題曰 營題若是嚴明 更何敢紛競也 如有起閙之端 斷當別般禁飭事
八月初一日
香謁又如前聚會 新儒以大享時 聚黨作梗傳聞洶藉 鄕儒二十四員 本孫六十一員
同月十五日
香謁時 値兩戱 而享禮在近 故本村數員 冒雨上院 院中只有新儒二人 午後雨歇 近居院儒 稍稍來到
十六日

長少咸集後 合席收議曰 今番享禮 異於他時 參齋儒生外 無論鄕儒本孫 不爲院供之意 書掛院壁 朝夕如前 買食於架家宿所 通于院村 以爲內外相應之計 鄕儒四十一員 本孫二百一員
十七日

是日入京日 無論新舊儒 彼此會集 殆近千數 舊儒二百餘員 新儒七百餘員 第觀彼中之傳播恐動爻象 似無安過享祀之慮 故自會中修文報 入送本府
文報
伏以本院院會 今至七次矣 曾前士林所以逐次來會者 明知其必有新儒之大變怪 而意謂今番 則享禮迫近 雖以彼輩之冒沒跳跟 猶未敢他時太無嚴之爲矣 自今望日香謁 彼輩中所謂名不知 孫龍庄孫時夏二人 以文二十緡貿米 運置於院底 從以自東自南自西自北者 無慮數百餘人 爲先見到於今夕 分據堂齎之房 又其風聲明又明 且爲躡後者 將至六七百人云 此非虛言也 盖前此渠輩 累次校會時 抄出牌將六十人 每牌各率十人 約以享禮時 齊到作變 則其所排布設計什伍成隊 長驅於俎豆禮法之場 則未知三日淸齋時 何樣變怪出於何座何人矣 民等生長於先生之鄕 崇奉我先生 尊事我玉院者 計今三百餘年之久 而不幸遭此無前罔測之擧 則區區身計之箭胸杖脛 顧不敢恤 而至若享禮 不能如禮將事 又或執事諸員 無以備位 未免廢闕之端 則向後事勢 不但未安而已 玆敢先事 罔夜馳報 伏乞別遣廉摘 以爲先機懲戢 安過享禮事
題曰 先事題飭 不啻裁嚴 而有此紛競 極爲駭然 况今享禮 所重自別 而不有軆禮 是豈士類論哉 別遣將吏 以送隨其作梗 提來首從宜當
出來將吏二名 羅卒五名
傳令出使將校
玉山書院秋享之禮 今方致齋設行 而卽聞新儒攔入齋所 使不得行祀云 故一邊帖諭 使之警飭 一邊發校 使之禁戢 而猶不悛悔 自成徒黨 至於四百餘人之會集齋所云 此非士子 明是亂類 會中許多人員 不可一一等責 而其中主魁者數三人 卽爲捉來 以爲照法嚴勘之地 而事係時急星大 擧行至踈虞失錯之地 宜當
是日晩後 李眞安率其徒黨 攔入庖舍 曳出鄕人一員 拳踼訴辱 無所不至 會中諸員 蒼黃扶出 又修文報 入送
文報
伏以本院享禮 今當齋日 而新儒輩左右突集 不知其幾百數矣 講堂廳房兩齋前樓簇立 無餘地開座 設公差定執事之員 而姑未知何以爲之 而新儒輩忽地生風 以月前呈營事 歐出鄕儒狀頭之一族 一員捽䯻踼脇 自房齋曳之門外 卽地氣塞 昏仆之狀 若將難保其命者 數少院儒 冒死突入 極力救獲 僅能脫出院邸 方在療治之中 而似此景色 萬無設公備官之道 亦無致齋將事之望 莫重享禮 將何以如禮安行耶 此莫非民等疲劣誠薄之罪 惶窘逃遁無地 而第伏念國學享禮 所係甚重 而彼此拳踼作閙 終未免廢闕 則抑恐重得罪於有事無聞之地 玆敢不俟前報回敎 隨機輒報 伏乞亟賜處分事
題辭遺失未謄 自官又送將吏三名 羅卒十五名
是日午後 院長到院 紫垂金鬢 倍生座中光色 進茶後 少須臾日至晡矣 設公事席於講堂 會員接膝環坐 外又簇立新儒數三人 突入座中 與之同坐矣 公事員李彛祥李在進出座後 彼向院長 畧陳區處等說 院長答言 終無毁規云云 彼輩又授渠到記於公事員 混入 執事之說 多般咆哮 而亦不聽施書 掛執事牌之際 在外新儒 橫奪板木 裂破其紙 座中整齊 呼齋直告罷座 忽地風浪 左右衝突 三獻官 初獻參判李孝淳 亞獻校理李凝祥 終獻承旨李晉祥 遂入上房 彼輩因圍匣 亂作齊聲大唱 此時風色 便成一番戰場 于時祭需 已至內松坊 而院中爻象 如是罔蒼 故祗延等節 實難暇及 招致洞任 將以作架家 守直達夜之意分付 初更量 又具由修文報入送 至二更量 閙端稍熄 而莫重祭需 路邊經夜 竊非道理 故會員更議 祗延於亦樂門外 新儒之具巾幷立者 至十餘人
文報
伏以世降俗弊 無變不有 而孰有如今日之本院事變哉 民等自昨至今 凡三次呈報矣 俄者伏承出將吏 作梗者捉來之嚴敎 而所送將吏 日暮不到 未知緣何中滯 而見今莫重祭需將到 祗延等節 萬分時急 故日晡時 始設享禮執事公事之座 自獻官以下 數十餘將事諸員 次第圈出 揭板壁上 則前所謂孫龍庄辛天應孫深彦輩 率其黨五六百人 數匝圍立 首席李參判 卽退陶老先生之後也 位躋鄕宰 年德何如 軆貌何如 而始也脅持之 終而恐喝之不足 而揭壁莫重執事板 片片毁破 大聲呼首席姓名 便以不道之說加之 或將挺身扶執者 或將偸隙曳出者 然打破窓戶 以裂盡首席四脚之說 其所唱辱 聲動溪山 民等冒死防遮 僅免毆曳 而本孫之衣冠裂破者 頭髮捽逐者 難以枚陳 公席鄕儒 則見逐四山 一無存者 自有本院事變以來 曾所未聞見之罔測光景也 此姑勿論 莫重祭需見到松坊 而掌牲掌饌諸執事者 旣無備員 三獻官亦不能祗延於門外一步地 故祭需 則權奉於松壚依幕中 畧而本孫呼聚村氓 與之往宿 以待處分 爲計是乎 第以緣由 罔夜馳報
題曰
莫重享需 尙未入院 享事不得按禮擧行 亂類作梗 胡至此極 亦一怪變 文報中三人 爲先星大捉送是遣 隨其作梗者 這這捉來是矣 前後將吏 緩不及事 尙無擧行之形 止爲先別附過是在果所捉諸人 先卽放報 以法從事 這間事狀 消詳報來宜當
傳令出使將吏
玉山書院享禮時 作梗是在孫龍庄孫深彦辛天應 卽今出去將羅 先爲押上是遣 汝矣留在院底 限畢享 各別禁斷是矣 應參祭官外 無論新儒舊儒 使不得一人留接於院中爲旀 前帖中 縷縷措辭 開諭道理 非不申複 而其所擧橫 去益駭悖 誠爲痛惋 當場光景之如何 就中主論之誰某 消詳馳報而繼後 又有突出作挐者 隨卽捉上是遣 前送將吏 緩不及事 尙無如何之報 連有垂激之奇 其所擧行 極爲駭然 以別附過之意 爲先嚴飭 汝矣眼同擧行 無至失錯之地宜當
將校金根洪孫赫基告目
告目 矣等奉承嚴令 日暮到院是乎 則前此院中之兩次變怪 已悉於文報中 而且非矣等目覩是乎矣 新儒來會者 多至五六百人 祭需祗延時 幸無大段生梗是乎 乃新儒彌滿齋房 萬無齋儒之留宿是乎旀 新儒中二三人 挺身突入 直呼院長姓名 詬辱萬狀 幾至捉執之境 矣等百般防遮 僅得息亂是乎乃 大享重禮 使不得安奠儀 退出將羅 嚴加禁斷是乎等 以緣由詮次
十八日

齋儒具巾服整坐 新儒混入者 亦至十餘人 官卒持傳令 大告堂前曰 新儒一倂出去 雖舊儒參齋外 亦不參座云云 食後新儒數百 謂以恳乞講堂前南壯上房前布席入伏 院長傳喝曰 今日正齋之席 有此紛騷 揆以軆面 不可冒蹲行事云云 於是渠輩次次盡出 椧谷居崔世簡入上堂 移時酬酌 後末段語云 以行祀之平安 而祀後不無閙端 而出在院將吏 依官牌 捉送文報中作梗者三人
將校河南斗告目
告目 以玉山書院享禮時 作梗者禁斷次 今日午時量 馳到院底 採探來歷 則昨日先出將吏 未到前光景 已悉於院報 而同日日晡時 將吏得到 不得息閙是如可 同夜二更量 享需方奠院中 而祭官祗延等節 一依古例是遣 昨暮下直將羅十八名 今日卯時量 得到院底 則新儒四百五十餘人 退出院外 以無事過祭之意 恳乞是遣 仍不作挐是乎 乃終不散去 而隔門隅語者 似有行祀時作挐之慮 故院之各門 使羅卒等各別守直是遣 應參祭官外 毋論新儒舊儒 使不得擅闖於院中是乎旀 新儒中孫龍庄辛天應孫深遠等 姑爲趂 今押上是乎矣 至於息閙之境 似不得威力 故開諭押上是乎旀 其中主論之誰某另加 探察是乎等 以緣由詮次
是日午 養士等節 無事行之 夕飯後羅卒數十餘名 封鎖洗心兩夾門及亦樂門 各自守直矣 俄而彼輩之來集杏壇者 不知幾百名 一邊放火於壇上 數百衆口 齊聲大唱曰 此門速開 內守門卒 終不聽施 在外聲氣 漸至高竣 或搏擊門板 或撑碎門樞 畢竟破門衝突 遂與官卒相接 咆哮之聲 詬辱之說 雜糅震盪 折臂者 傷足者 血豆破冠者 裂衣者 捽䯻者 不知其數 先鋒一隊 大呼捽入 乍進旋退於光明臺下者 凡三次 當前七人 竟被官卒捕捉攔打 縛轉於場下門外 爻象尤倍 棚蹬投瓦投石 越墻踰屋 卽地光景 會人戰怖 將校河南斗 密告上堂曰 院長主貴人也 如此危地 不如暫避云云 座中僉意 亦以爲然 遂引院長及獻官 出庖舍夾門 至院底下處暫休 乘轎部隨一員 送於良洞 餘外諸員 嚴令院隷 謹守祭需等物 推覓廟門開金 隨後出院門外 于時景色 姑不可言 而明晨大享 似難如禮 僉員憒愴 當何如哉 步至大浦市店 夜已深矣 告變官前不可少緩 故使年少者數十員 乘夜送府 待曙後 又有稟目
院儒稟目
伏以本院新儒之變業 已洞悉 而獻官與諸執事 俱爲避座 今日不大禮 幾至於廢闕之境是矣 今日旣是丁日 則從權行祀 惟在於城主 親臨本院後 可免廢享事狀
題曰 勸入行祀 關係非細 不計挈碍 今方奉依 知委各執事 及令將事之地宜當
傳令出使將校
昨因本院文報 新儒之聚黨作梗事 各別禁斷之意 出送汝矣 果能着意奉行是隱喩 享事所重自別 豈敢紛挐於此際 若有犯者 官當以法從事 須以此意捉喩 俾不得攔入齋所 以爲安享之地爲旀 事過後 院長行次時 或有侵逼之弊是良置 汝矣等亦爲陪後 各別捍禦 以爲無事行次之地爲乎矣 若有一毫踈虞之端 汝矣等難免重繩 倍加着念宜當
將校鄭再佑告目
今二更量 新儒四五百名 各杖石破碎書院三大門 踊越垣墻 禁斷羅卒披打 幾至死境 故將校河南斗擧理言之 則下杖攔打 一身難屈 而二十餘名 校卒沒數披打 至於死境 院長與祭官 散在各處 重享禮已爲廢祭 如逢亂離 當場光景 死生居半時刻 萬無全生之道 故緣由詮次
將校鄭再佑李宅信告目
告目新儒作梗之狀 已悉於前報 而昨日四更量 就中作梗者七人 鄭之河居菊堂 李樹權居山臺 孫相牧居山峴 鄭龍一居席洞 安孝永居虎鳴 李宇復居根谷 李宗脩居楊月 捉得保置是在果 披打校 卒爲先救療 享需及院門 各別守直是乎 則新儒五百餘人 退伏是乎 乃院長及祭官 仍避不見 故莫重享禮 至於違時之境 姑待祭官還到是乎等 以緣由詮次
十九日
在市店諸員 勿論老少 接膝經夜 而向曙後 近地人員 稍稍來集 到記數百七十餘人 食後入府一員來言 官家今方出來院中 期以難鳴 前權行祭祀 而西岳書院 以舊儒更乙事之意 下帖出去云云 會員無不爽快 捉食午點 齊上防築 一邊敦諸院長 一邊支得官行 至晡時 官行到迫 會員隨後上院 所謂新儒前捉七人外 巷無一人矣 進夕飯後 更設公事席 書掛執事板 首獻官府尹金穰根 亞獻參判李孝淳 終獻承旨李晉祥 因行大禮 畢退坐仁堂 燈燭煌煌 庭燎晰晰 罷座就寢 朝後官家捉飯發去 前捉七人 羅卒眼同捉去 院長及會員 從容隨後下來
二十日

村中老少及院長 咸集書堂談笑 向日怯累 治送官家回謝人二員 午後院長出琴湖 約以明日更會于景山書堂
二十一日

午會景山 院長已來到矣 半日談話 遭雨仍宿新祠 供億淡薄 其味亦一勝事也
二十二日

不得已送人良洞 各領奴馬 待少歇 越來齋會宗堂 供罷一場酒肴
二十三日

院隷下來 治送院長行次 使承旨令而言族隨後 護送於世德祠 又搆變後呈文 定送年少十五員於本府 晩後聞 自官推去李眞撤李平叟兩人
二十四日
入府儒生出來 而昨日推去兩人 幷與孫深遠辛天應孫龍庄 及押上七人 同致官庭 詰問元魁 終未得正 龍庄平叟各嚴刑 一差放送眞撤白放 孫深彦自獄移囚奴房 七人自奴房移囚獄中
院儒幼學李彛祥李在誾李在晉等呈本府狀[八月二十四日 本尹金穰根]
伏以院事呈卞 而門族聯訴 似違軆禮 而鄕內士林 旣以作頭營狀 被他毆打罔測之辱 則勢當爲子孫者 不得不冒死陳情 事面近私而所言實公 伏惟恕察焉 今番院變之前後事狀 已有民等之累次文報 及將吏之逐次告目 更不必架疊枚陳 而當此無前極變怪之地 幸得安行享禮於幾廢之際者 莫非我城主爲賢院誠力 逈出於尋常萬萬也 民等方感荷仰祝 無地攸謝 所以於臨院之後 一方士林 惟知攢賀歸美之不暇 而未遑及於向後懲處之如何者也 然彼輩跳踉之習 若不依律痛懲 則未知末稍之復做何等劻勷也 盖此事變 誠荷城主之力 雖得正於旣傾之後 而論其前後做措 則使莫重大享 不免蒼黃窘窄 至有城主親屈之擧 其罪已不容貸 百年宮墻無難犯 手破門毁瓦 無所不至 享禮執事錄 尊重何如 而裂紙投板 任其所爲 亞卿洞主 位望何如 而攘拳噴舌 少無顧藉 鄕儒被打 本孫毆曳 非不爲罪 而甚至奉令將吏 亦皆成捽或打 傷頭騫足 見者慘慄如上 種種罔測 負犯 我城主公廉威明之下 從輕重勘斷 固所難逭 而民等愚見 竊以爲國學 事軆所係甚重 此等變怪 恐不可不上告方伯 伏乞從實這這論報 以爲護重地杜後弊 千萬祈恳之地
題曰 新儒作梗 極爲痛惡 今方嚴覈査 得首從斷 當報營重繩事
二十五日

治送呈營儒生一員
二十八日

營題來到 院儒幼學李禮祥李樹章徐克仁等呈營狀[八月二十六日 巡相洪說模]
伏以生等 以新儒作閙本院事 月前控于節下 題敎嚴明 旨意簡當 諭之以名器之重 威之以嚴繩之敎 生等一方章甫 攢手欽歎 仰誦大君子公平正大之量 非凡腹所可窺涯 而相幸以謂本院閙端 亦可以自此靖熄矣 迺今無前罔測之變 竟作於大享將事之日 使莫重享禮 幾至廢闕 幸賴我本官城主極力禁斷 躬臨院齋 權宜行事於當日三更 此莫非生等疲軟 誠薄於冒死受箭之致 何敢抗顔措辭於閤下之庭哉 然而事在於不得不告之地 則亦豈敢以死累惶窘 而自外於法司按節之下乎 盖自五月以後 六次閙端 已悉於前狀 而今月十九日 乃大享丁日也 淸齋三日 齊遫一心 猶惧夫或愆於薦祼威儀之節 而自十五日香謁時 遠近新儒 稍稍攔入 至十七日 則蜂屯蟻附 塡塞院門者 無慮七八百人 盤據於講堂廳房及西齋門樓 爲先曳出鄕儒一員 捽䯻踢脇 毆之蹴之 昏仆氣塞 其僅保性命 幸也 此一變也
設公備員 乃薦享規例也 方設席 書揭執事板之際 忽地風浪勢若飜河 簇於堂上者 隳突之匝於四面者 咆哮之 裂去執事板 直呼首席姓名 而一齊大唱曰 曳出首席 裂盡四肢 或將挺身扶執者 或將乘隙毆出者 然鄕儒及本院在傍者 左右防遮 僅免歐曳 盖本院首席 乃禮安李參判令公也 以七旬齒德 亞卿位望 方在重地首任 則渠輩何敢凌辱之如是 迫蹙之如是耶 此二變也
大享隔晨 擧措愈怖 故卽爲文報于本府 則自官以帖 以令嚴飭禁斷 差送將吏數十名 使之一倂麾斥 而其所屯據作閙 一向危怖 十六日夕後 忽有斫破門闑之聲 俄而咆聲動地 狂叫震山 持椎者 投石者 排門而突者 超墻而衝者 又無慮數百餘人 毆打官吏 迫逐齋儒 數十官卒 沮搪無路 累度官令施令 不得生死 當場呼吸危地 難保性命 猶屬餘事 卽地爻象 旣至於好禮將事之無望 則坐齋諸執事之奉身自退 事勢所使 軆禮亦然也 於是乎長席 則呈單自處 諸生 則徘徨中途 卽以事狀 馳告本官城主 則大加驚惋 聞卽到院 一邊敦起首席 一邊招聚執事諸儒 乃行享禮於當日之內 此新儒作變中最大 第三變怪也
嗚呼近日新儒之變 無處不有 無變不作 而孰有如本院之三大變怪者乎 生等生長先生之鄕 奉承我先生 尊衛我書院 世世人人 詔授遵守者 殆將三百餘年之久 而至於今日 被他非常作閙 幾廢大享 則生等死罪 無所自逃 而噫彼新儒 抑何人哉 其平居自處 則曰我衣冠儒耳 言語儒耳 行止儒耳云 而今於儒者事 一切相反 儒宮盛會 全沒廉隅 國學重地 徒事踢拳 士論公體 一無所措 營題官令 亦無所行 則此輩果何人哉 生等遭此極變 而幸賴本府嚴明 恪勤大享 幾廢而不廢 士氣欲喪而未喪 其中從初作梗者三人 枷囚本圄 當日先犯者七人 縛致法庭 向後勘處 第有當律 而生等區區隱憂 竊以爲變怪之起 謀變者 作變者 各有所自 前此新儒 所以屢設大會 聚黨爲謀 已有所狼藉難掩者矣 有財主焉 有牌長焉 什什成隊 募召之衆 達於隣境 夫夫懸錄 聚斂之多 及於甁儲 至於乘機作變 隨手逞圖 則俄忽之間 百年宮墻 一望頹破 早晩之頃 莫重享禮 頓失節次 而惟彼特地深處 藏踪匿面 堪作根窩者 偃然自在主謀排布 如前自若惹閙伎倆 尙不知戢此而勿問 則竊恐後殿之揶揄不絶 本院之整疊無月 仍伏念國學事軆 所係甚重 有此三大變怪 而不有一大懲創 則又不知何樣變怪踵起於何日也 伏乞閤下 另加愍恤 別岐調摘 痛繩主謀 依律現捉 永以爲護重地 戢悖流事 千萬祈恳血祝之至
題曰 向題聯狀之後 意謂各必自修 庶更無駭聽之事矣 今見此辭 誠爲驚悚 繼以駭歎 彼新儒 亦士流家人也 處身行事 宜無遜於人 而莫重院內 捽踢毆蹴 享事幾至廢闕之境云 是何等變怪也 駭悖之事 聞之 枷囚嚴査嚴懲宜當事
二十九日

搆到此狀 治送三員於本府 而逮囚諸人 期欲報使營門 則官家之言 以無報來二字 終不快許 揆以事面 不可强請 又營營狀
院儒幼學李在進鄭厚載李碩輔等營題到付狀[八月二十九日 金穰根]
今番玉院事變 城主旣已賢勞矣親鑒矣 又有數十官卒目擊而身當者 故日前狀題下者 以爲査得首從斷 當報營重繩云云敎是乎矣 其在事軆 不得不上告方伯 故呈營門到付狀題者 非敢有槪於處分之前也 民等情私 庶可洞悉是乎旀 今伏聞院報中前後首倡者三人 或放或囚 彼招中追後捉致二人 亦皆放送云 伏未知所犯首從 皆已覈得是乎隱喩 前題昔中旣承覈報之敎 營題音中 又有嚴査嚴懲之敎 故玆敢不避煩猥 更此齊訴爲去乎 伏乞當日作變梗槪首從誰某 一一枚報營門 以處斯文之貸 千萬祈恳之至
題曰首從今方嚴囚懲 後之道斷 當重繩事
九月初一日
香謁 新儒二人 又入院中 袖示太學舘秋享執事謄書 此盖留京南溟翼所送者也 相對時 雖無如前雜說 其所設心 則不可掩置 故又修士林文報 送于本府
文報
新儒之於本院享禮 作變極矣 法庭勘處 尙未決案 而今月初一日 香謁時 近地碧溪南山居 名不知 姓以孫鄭者兩人 又到本院 袖示留京渠輩中 私相往復者一片小紙 而顯有凌轢窺点底意思 盖其排鋪嗾措 莫非潛伏主謀人所使 而强欲低着於通任 滋後圖於參享也 然而新儒之所以通任不得者 以退陶先生薦規中 庶參不入故也 參享不得者 以正廟朝榻前定奪時 止及於先生庶裔故也 則爲新儒者 非不知本院之有此箇一定鐵案 而今於無前貪犯之後 不思所以求無過 於有過之中 反欲復犯罪於勘罪之前 顧其設計 則巧 而要其爲弊 則大矣 苟不趨此査得主謀 置之當律 則來春享禮 又未知不有加於秋享之變怪也 玆敢先事預圖 隨現輒報 伏乞逮囚諸人 嚴加調査 主謀謀變者 從實報使 後新儒之逐朔依前院行 亦爲下帖當禁 以杜目前院弊事狀
題曰 未知何件私札 而來示於院中 此固病風喪性 何必疑慮之有 初無名字 不得捉來査問 消詳指名報來 所謂魁首段置 亦無不知之理 指的來報 以爲懲治之地宜當
院儒進士李在伋幼學崔元復南有洙等 呈營狀[九月初八日 巡洪說謨]
伏以本院事變 至此而極 故生等之干凟威嚴 亦已屢矣 一呈而承嚴處之題 再呈而承嚴査嚴懲之題 吾閤下尊衛之誠 懲戢之方 可謂盡之矣 使新儒少有嚴畏之心 則前題之下 固已斂戢久矣 而何至又有此無前悖亂之變乎 若負犯如許 而懲治少緩 則變生亂滋 必至無院而後已 此生等之所以不避煩屑而重爲此來者也 仍伏念近來新儒之變 無處無之 而本鄕爲甚 本鄕新儒之變 無歲無之 而至於向日之變 尤極矣 夫聚黨起鬧 隳突校院 自是朝家之嚴飭也 爲新儒者 所當知戢 而乃若本院事變 則不可但以隳突言也 院長彼他迫逐 院儒攔加敺打放 莫重享禮 未及大昕 凈肅門墻 多至毁傷 是則建院後三百年來 所未有之極變怪也 若夫奉令官卒 將以禁變亂安享事者 而無難犯手 杖之蹴之 略不顧忌 此又新儒事變以來 尤是所未聞之大變怪也 彼雖千跳萬踉而進於此 則更無可作之變矣 惟其如是也 故俄者題音 有嚴査嚴懲之敎 而目今見囚者 皆新儒中奴指僕使之流 而眞魁巨憝 方且從容拊掌 陰長其氣勢 是豈無營家彈壓催促之敎而動其毫毛哉 伏乞閤下深察事情 更飭査報 而凡輕重勘處 使系營門 則彼之醞釀主張 昭布人耳目者 必將現捉 而後弊可杜矣 竊惟風俗盛衰 可驗士習 學校興廢 有關政體 生等雖愚迷 非不知閤下嚴査嚴懲之敎 將有所大處公大懲創 而彼旣負犯如是 而前習未悛 今番香謁 又有新儒依前到院者 此皆潛伏主謀人所使者也 更伏乞深加體諒 逮囚諸人 飭令嚴加盤問 査得主謀者 而上使嚴處依施當律事 千萬祈恳之至 謹昧冒以陳
題曰 旣令査懲 則又胡至來訴是喩 依前題施行宜當事
同月十五日
香謁
院儒幼學李彛祥李翌儉鄭儒儉等營題到付狀[九月十八日 尹金穰根]
伏以民等 以新儒事奔走營邑 計已三呈三到矣 是豈得已而不已哉 査懲之前 又請査懲 非不知極涉悚惶 而蓋此事變 係是本院無前之事 則爲賢院終始尊衛之道 專靠我城主 故前此誤聽由還之傳 而便做遑汲之擧 眞情所在 冀蒙俯諒是乎旀 今伏聞枷囚諸人 幾皆懲放 而其一尙存 則不審首從誰某 果已査出是乎喩 當初題音內 有査得首從斷 當報營之敎是乎 則今於旣査之後 必有報使 故玆敢到付營題 更此干凟 伏乞嚴査報營 快施懲勵事
題曰 業已重治 足懲後弊事
十月初一日
香謁 新儒五人 入院
同月十五日
香謁 新儒三人 又到本院
十一月初一日
香謁
同月十五日
香謁 營邑勘處之後 彼輩尙不知戢 而又或往往入院 且新官下車之初 不可不一番呈訴其前後事變 故議呈府狀 新尹南性敎
院儒幼學李述祥崔世應權致福登呈府狀[十一月卄四日 金穰根]
伏以玉山書院 則文元公晦齋李先生妥靈之所 而院規節目 乃文純公退溪李先生所講定者也 典守勿替 已至三百年之久 而不意今年秋享時 被他新儒輩 無前作變 幾至闕享之境 而幸賴前城主尊賢衛道之誠 躬臨齋席 權行享禮 刑囚附從 畧施懲治 而巧値遞歸之際 竟未得依律勘斷 此民等 所以不避煩猥 具由仰訴於下車之初者也 大抵退陶所定院規 莫非嚴正 而其中薦士一款 尤係愼重 必以本參外參妻參爲取士之限 而三參中 一或犯於庶流 則雖先生本孫名家後裔 不敢與議於掄選者 便成金石不刊之典 故新儒疏通 前後不一 而猶未敢生意於本院 正廟朝筵敎中 先生庶孫之居在院傍者 有特許廟內執事一窠之敎 則他新儒之不敢混入 卽是榻前定奪 而彼新儒輩 猝生非分之望 成群作黨 惟意恐喝於逐月香謁 及至秋享時 則募聚徒衆 益肆跳踉 奇奇怪怪之無限作變 雖不可一二枚陳 而就其中最乖悖者言之 則執事板之裂破也 院門戶之打毁也 鄕儒之拳踢也 本孫之敺曳也 甚至亞卿院長地望何如 而乃敢呼名而稱漢 且將排戶而手犯 卽地禍色迫在不測 所以隔晨享禮 萬無安行之勢 而長貳以下及參齋諸儒 不得免一時被逐而出 盖此梗槪俱登於其時奉令官校之隨機馳報 而實前城主之所洞悉無餘者也 當日率先作亂者 幾人略有所刑囚之擧 而至於終始主謀陰作窩窟者 則藏頭匿面 偃然自在排布指揮 少不知戢 故其後逐月香謁 仍復如前到院 或以恐喝 或以詬辱 期於圖破院規 逞其所欲而後已 嘻唏遐鄕士族 以尊奉先賢爲世業 以遵守賢規爲家計 而此規一毁 則鄕曲名分 自此掃地矣 大賢學令 從此廢閣矣 環東都一區絃誦之地 化作新儒輩橫行世界 而古家儒紳 將不免惴惴屛息之境 則此豈但爲民等今日之憂而已哉 玆敢畧陳顚末 齊籲於新政之初爲去乎 伏乞洞悉事端 嚴加處斷 俾此三百年遵奉之地 無至於一朝蓬蒿之場 千萬祈恳
題曰 秋享時 新儒之作梗 實施無前之變怪 營邑之題辭與推治後 宜有畏戢感化之心矣 若又不悛 則斷當窮査 其犯罪者 報營痛繩事
同時新儒呈本府狀題[原狀不見]
父母慈愛之心 固無間於嫡子庶子 故列聖朝受敎之每下惻怛之意 此是父母之心也 然而我東方立國規模 專尙地閥 仕路通塞 皆有定限 故尙今奉行 良以此也 至於外邑之事 一依朝廷之近例 校院之事 皆有先賢之定規 則今此新儒 亦先賢後裔 遵守先訓之心 宜無彼此 而夫何挽近以來 是非多端 京鄕間貽羞不少 無論曲直之如何 此豈非不幸之事耶 從今以往 除却前日之嫌怨 各自蕩蕩期於保合 然後宜有公議之莫遏 以此退待事
十二月初一日
香謁
同月十五日
香謁
癸丑正月初五日
正朝香謁 本刊任單刺入院 故更爲設公圈望 新齋任酉谷權進士載衡 刊任草題李澈 當日會員 不過數十 溪亭之人多至 三十餘 鄕新儒五人亦入來 而雖無相對悖說 其設心 則終始有不悛前習之意 又呈士林文報 是日新尹會契南郞廳云者 宿廣明家 乘轎越嶺 往章山甲宴官客之際 此行色不無衆疑 晩後以院中所用浮費收刷 議賣本洞田庫 而逐庫定價 發文而歸矣 未數日 溪亭鎭安輩 沮戱賣田事 投牌院中 所謂牌辭之悖辱 不可形言
文報
伏以本院之新儒作變 至於前秋享禮時 極矣 城主下車之初 本院士林 已爲具由齊龥 特蒙嚴敎是如 意謂自承此敎以後 雖以渠輩劻勷 庶歸浸息之境矣 不意今月初五日正謁時 彼輩中前秋之率先作梗至被捉囚者 孫深彦孫龍庄二人 率其黨六七輩 來到院中 雖無大端作梗 而稱以恳乞 復踵前習 有若去年享禮前逐月來喝之爲者 然噫彼亦儒也 而不念往轍之知懲 不思嚴題之畏戢 肆然復來 更起宿鬧者 不知末稍 又有何等擧措也 玆敢據實仰報爲去乎 伏乞申加嚴勅 使彼輩更不敢接跡院宇 永杜駭機之弊事[未呈 故無題]
同月十五日
新舊任到院 傳與將行 香謁之際 新儒孫世麟孫時夏孫逸敏孫世昌孫宙敏孫政一孫相健孫相孝孫時演徐禹範柳原祚孫相玉孫鍾健孫永馹鄭五弼鄭奎一孫秉謨等十七人 及溪亭人數十人 忽地突入 扶執新舊任 出示渠輩呈官狀題 仍爲差出溪亭李眞銓 爲任司 脫着齋服 敢行香禮 又奪行匱及廟門經閣開金 卽地憤惋 當如何哉 朝前院奇下來 故食後通于附近各處 村中老少 一齊入府 口告事變 又遍告西南各處
十六日
呈門狀 又呈士林文報 是日孫世麟孫時夏鄭涬一 並刑推一差後 鄭涬一着枷牢囚 餘皆放出
化民幼學李鼎修李馥祥李在仁等 一百四十員 本尹南性敎
伏以民等 以玉山書院新儒作變事 齊聲陳訴于城主閤下 (下)車之初 城主閤下洞悉事變 嚴飭禁斷 諄諄題敎 先明嫡庶之分 繼開悛悔之路 雖以新儒之無知悖妄 猶知懲畏 稍見退沮 民等一方章甫 聚首莊誦 相以謂重地 自此寧靖賢規 賴以保守 將使閤下衛道鎭物之盛德美事 永有辭於南州矣 不意今者 變怪愈極 昨日香謁時 齋任二員 偕往院中 則玉李十餘人 先據仍宿 趂曉焚香之際 玉李數人 或出或入 有若招呼相應者然 俄而鄕新儒數十餘人 忽地突入 扶執任司 解脫旣着之齋服 搜奪所佩之開金 恐喝威脅 以奉行官題爲欛柄 差出玉李一人 稱以有司 一邊環執齋任 使不得措手 一邊開門攔入 擅行香禮 噫嘻 新儒亦人耳 其在尙禮讓尊體貌之地 此何擧措 此何變怪 莫重國學 將付荊棘之場 而三百年金石奉守之退溪定規 一朝爲新儒手分中壞了 則民等之抱差齎恨 得罪於天下後世 無地可說 而城主閤下按法下莅之適當 此會 亦未必不爲不幸也 秋享作鬧 已是極變 而其時鬧端 不過曰許通也 參齋也 比之今番之作變廟中 猶是細故耳 微愆耳 前城主以士林共憤之心聞 卽馳到躬行享禮 其中作魁者十餘人 枷囚刑推 將施嚴懲之典 而適値解歸 未就究竟 則今日懲勵之道 亦豈非閤下責耶 昨日民等之庭下口訴 心膽失於驚遑 言辭迫於憤惋 官民相孚之地 猶有所未盡洞陳者 玆敢抱狀更龥 大抵本院此變 根窩有在 指使寔繁排布 自我排布作變 從佗作變 而今則情跡已綻 手脚盡露 其所謂自稱有司 擅行香謁之李眞銓 卽秋享時 犯科被刑之李平秀也 誣餙文報 憑藉作梗之孫世麟鄭五弼徐禹範孫時夏鄭涬一柳原祚等諸人 卽鄕新之同時嚴懲者也 伏乞洞加裁察 夬施禁斷 以上諸人 一一捉致 嚴査報營 一以治作變廟內之罪 一以懲瞞眩官聽之習 使莫重國學 不至亂鬧之場 而大賢定規 無致廢壞之地 則閤下尊賢衛道之誠 豈不誠正大嚴明 而民等一方之受賜 亦豈不多且厚哉
題曰 此輩之昨年秋享時作變 已是朝野共憤之事 而今又瞞報官家 有此悖習 實不可彛常處之 其在杜弊之道 嚴治次 今方發差 推捉向事
文報
伏以本院事變 近古所無 昨於本孫赴訴 伏想已爲洞悉是在果 附近士林 只自廻遑痛泣是乎旀 第伏念國學爭奪之際 何事孰非關重 而其中御書閣 最爲尊重 正廟朝煌煌雲章 其外列聖朝內賜書籍 及院中世守文牒 無一不在 而際當傳受之時 未及封標門扃 而開金據爲彼邊奪取 則日後右件文籍 有無閪失之患 未敢測度 而所謂士林無路厠跡其間 故玆以仰報 伏乞自官定送色吏 嚴加封標後 開金卽速推上官莊事
題曰 開金之私自攘奪 極爲駭然 當査實推覓向事
十七日
呈鄕狀後 有官下帖 自官出送將吏於院中 封標經閣門鎖 推覓開金後 眞銓捉上官庭 嚴刑枷囚
院儒幼學權政福李樹章李翊儉等 呈府狀 一百九員
伏以民等於城主下車之初 首訴本院新儒作鬧之端 盖以國學之有事變 不但爲一方士林之責而已也 城主閤下軫世道之憂 念賢規之重 諄諄題諭 旣嚴且明 雖以新儒悖妄 必不敢復踵前習 而豈意嚴明之敎 纔降於多士陳訴之日 而罔測之變 又作於明官捻香之晨 噫嘻亦甚矣 此輩擧措 雖無所不至 而豈有如今日者乎 當場作變 已悉於良洞李氏門狀 民等不欲復事煩累 而第伏念本院創建 今至三百年之久矣 朝家崇獎之典 前後何如 大賢取士之規 截嚴何如 而今不免爲渠輩攘竊呑據底器物 已是無前極變 而究其因 則實由於城主卽爲改遞之題敎矣 堂堂國學之薦望圈任 自是院中規例 而一朝爲自官差遞之窠 則是又豈前古所有底事耶 民等典守 不謹之責 無所容逃 而抑不無仰竊慨惑於城主題敎之下者也 如使新薦任司 果有疵累 如渠所誣 則觀參備望之席 初何以圈出也 旣以圈出 則又何以呈報也 卽此誣狀 可認嫌人傾陷之計 而不問委折於本院 一筆斷題 依訴改遞 以付書院於官差之場 而一中渠輩潛計 則渠輩何煩 而憑藉跳踉 不至於是耶 且若以彼輩構誣 而信而遞之 則許多士林 夫焉有一箇完人 而窃恐城主改遞之題 將不勝其煩矣 然而此則猶屬一有司之事耳 一有司之誣不誣 寃不寃 姑置不論 惟我玉山書院 以大賢主享之所守大賢講定之規式 至今三百餘年之久 而其所以崇奉而扶植之則 實由於前後營府之極力共尊 隨事衛護之力也 班班往蹟 昭載院案 而不幸今日之變 實係本院存亡之會 重地將至荊棘 古規終付芭蘺 則民等之憂傷痛迫 將不欲生者 不惟深得罪於吾林淸議 而實無辭自白於異日歸侍父兄之日矣 以城主衛道尊賢之誠 適當此土 亦豈晏然而已乎 大抵今來主魁之孫時夏孫世麟 卽前秋作變被囚之人也 由其懲治不嚴 又有此變 而乃若今日變怪 實由於改遞題敎 則玉院一區 已非士林之所敢知 而取奪與受 城主已自任之矣 惟恭俟城主區處之如何 民等更何敢言哉 情迫辭蹙 語不知裁 伏乞栽處之 千萬恳祝
題曰 被輩之誣訴 俄者査實 已爲綻露 故各施嚴刑 枷囚其魁矣 豈敢復事作梗乎 亦已下帖於本院 則自然妥帖 勿復爲慮宜當事
下帖玉山書院士林
府尹爲相考事 本院卽一邑首善之地 其齋任之圈薦 士林之崇奉顧何如 而乃於日昨新儒輩 自成偏黨 誣訴官家 論駁齋任 攔入院宇 自薦有司 少無敬謹禮讓之風 徒肆紛競悖戾之習 不意俎豆之迄有此無前變怪 新儒中主論作挐者 及所謂自薦有司者 並爲嚴刑 其誣呈文蹟 亦爲勿施 此固橫逆之來付之一場過㥘是遣 前者自院中薦望之齋任 幸勿以此引義 卽卽行公 無使宮墻之所 一時曠闕 爲宜向事
十八日
又呈門狀 自會中定大鄕會於二十日 而西南各處 以會中發文 北面各處 自龜院發文
化民前承旨李晉祥前參奉李博祥副正字李能燮等 呈府狀[一百六十八員]
伏以民等 忝爲賢祖之孫 不肖無狀 備見先院之無前極變怪 不謹典守之責 不但爲一道章甫之所共唾罵 至於館學通文 前冬來到 以莫重國學之致此鬧端 大有論過之擧 然尙未克報答者 城主下車之初 彼此狀題 不啻嚴明 故庶幾彼鬧之自歸浸息 院宇之得保寧靖然後 方可以措辭遣答矣 近日彼輩 更何窺覘憑藉之端 而誣官得題 作變至此 及其發差推捉也 惟冀有痛懲杜後之道矣 畢竟魁首李眞銓 不惟不加刑囚 白地誣告 一任聽受 其餘孫世麟孫時夏 最是作梗之魁 而畧施刑推 旋卽放送 所謂枷囚者 卽無賴附從之鄭涬一而已 如是而反令 彼輩一層增氣 則民等更安敢接跡於先院一步地耶 噫本院薦規 出自退陶講定 而列聖朝崇獎之典 炳若日星 先文老遵守之勤堅 如金石 今因城下題決 而一朝許付於新儒手分 則民等雖萬被誅戮 復何暇避忌諱而不爲之煩訴哉 盖前秋作變之主謀窩窟 卽先祖庶孫李眞銓李眞慣李綺壽等所爲也 享禮時 率先作變 手打鄕儒 乘夜破門 沮戲享禮 皆此輩事也 此輩以出入京鄕 締結官客爲能事 醜口咆喝 誣辱鄕族 爲伎倆於是乎 嘯聚鄕新 援作血黨 頭會箕斂 聚積數千財 一以叨肥已之利 一以媒橫行之資 忍以先祖之孫 作變先祖之廟 而今日變怪 尤其眞臟盡露 便作晝出之魍魎矣 迺若作變梗槪 略陳於前狀 今不必架疊 而竊伏念書院之興廢 斯文之氣數 惟係於城主按法興化之治 若使作梗首從之孫世麟孫時夏輩 更加刑囚 痛治懲戢 前後主魁之李眞銓李眞慣李綺壽諸人 則以刑以囚 一倂報使營門 依律嚴繩 永杜後弊然後 方可以保守先院 勿替賢規 而閤下嘉惠之澤 其將莊誦於無窮矣 不然 以昨日之略施刑訊爲已勘 而官庭之敢肆誣瞞爲可信 則只令資彼輩跳踉之習 而玉院一區 自此爲官差遞之窠矣 如此 則朝家崇獎之典 由城主題決而墜地矣 退陶講定之規 由城主題決而廢閣矣 士林三百年恪謹遵奉之所 亦由於城主題決而永歸蓬蒿矣 由是而異日院中之傳故案者 書之曰 與奪賢院 付與新儒 自城主始云爾 則抑未知爲傳示後人之美事也哉 民等更不敢措手院事 而國學事體 斷不可私自廢棄 只當具此顚末 遍告道中 通諭太學而已 至於書院區處 惟城主處分是俟耳
題曰 此非自邑蒼卒間決處之事 今方報營 以俟處分向事
十九日
呈新舊齋任所志
化民幼學李澈民 猥以無似 忝膺玉山書院齋任 今月十五日 早朝香謁次 方具巾服 進入之際 新儒數十人 勤令還坐 出示官題 稱以奉官令改差是白遣 袖出一丈紙 差出李眞銓爲任司後 環坐恐喝 使脫齋服 而民終不肯脫 則其中一人 直前執袖 自渠手解脫而去 民之疲劣罪悚 自無所逃 方惶蟄訟愆 卽伏聞李眞銓所招內 謂以公論如此 不得不讓與齋服云云 噫彼邊人之構虛捏無 做出千不當萬不近之說者 每每如是 當日舊儒 不過新舊齋任二人 則公論之說 不言自白 至於讓與巾服之說 民雖無似 旣在其任 旣着其服 則重地將事之服 豈可以自脫讓人乎 此而不卞 則民之情事 無所容身於士林之列 故玆敢從實仰訴
題曰 彼輩之誣告 人孰信之 而渠輩亦已自服 則其所荒說 何足爲嫌 雖士林中 亦豈有不知之理耶 有此紛疏 反涉昌披 愼勿介意宜當事
化民幼學李在潗 民卽玉山書院舊齋任也 以傳與次 今望日上院 而被他鄕新儒敺脅 所佩開金 卽地見奪 方羞憤欲死 疲劣自訟 而卽伏聞李眞銓誣招內 有曰 齋服開金 以公論傳受云 噫眞銓之計 亦窮矣 自知㥘奪齋服 力取開金之罪犯不輕 而做出無理之說 便欲自掩其罪者也 民雖無似 豈忍以渠輩瞞報官家 私自唱酬者 謂之公論 而遽以齋服開金讓與乎 拘執新任 俾脫齋服者孫時夏 而此有新任從實卞呈是白遣 至於開金 則佩在民衣系 而四面圍坐 或以恐喝 或以弄誘 使之解給 而民諭以義理 示以抵死不給之意 則孫世麟手自搜索於民所佩囊中 而竟爲解去 則當日座上 豈有公論之說 公論之事乎 民之被誣 固不足惜 而事當從實 而後庶有究竟法 故玆敢具由仰訴
題曰 彼輩之悖擧 洞悉無餘 則其所誣告 自在其中 何足爲屑屑卞白乎 勿以爲嫌 宜當事
二十日
當日到記二百二員 鄕席官意 不欲開座 故停止 會員抱狀盡入 以論報營門仰訴 自官有敦請齋任下帖 孫時夏孫龍庄 更捉推庭 各施笞杖四十度 捧侤音後 着枷嚴囚 出報草
院儒幼學李在晉崔世應李晉元等 呈府狀[二百三十八員 南性敎]
伏以民等 以新儒作鬧玉院事 聞變驚惶 後先齊集 留連累日 抱牒號訴之擧 已不勝煩猥矣 題決聽施之勤 極知其厭聒 而窃伏念彼輩乖悖之習 有非尋常處斷之所可知戢 則今日之略施刑杖 適足以增彼輩跳踉之擧 而向後事變之愈往愈甚 已可逆覩矣 窃伏念民等生長文元之鄕 遵奉文元之院 于今三百年之久 而一朝委之於渠輩手分 則列聖朝崇獎之典 自此墜地矣 退陶講定之規 自此廢閣矣 不謹典守之責 無以自逃於一道一國之縉紳章甫 其將復何顔歸見父兄於地下哉 盖本院之有此事變 亦且三十年於其間 而民等之呈官呈營 不知幾度 彼輩之或刑或配 亦不知幾次矣 語其變 則未有甚於作變朝庭 而城主所以推治之政 太不及古 其中數輩之略施刑杖 曾不過草草懲例之科 至於枷囚獄中者 橫行出入 恣意無忌云 如是則彼輩悖習 曷由懲戢乎 書院鬧端 何時寧靖乎 況今春丁享禮 迫在不遠 而一方士林 方惴惴恐㥘 不敢向院門一步地矣 民等到此 且將控訴於何地乎 國學事體關係甚重 則廢興存亡 只當與一國共之 書院首貳 旣在道內 則凡有事變 且當通告 而民等疲軟無狀 致此變於莫重之地者 將不免四面之責 故欲言梗槪 則措辭之已覺羞澁 而且俟處決延扡 而未免待後者也 到此地頭 不得不頻煩仰龥於閤下之庭 以冀其痛懲杜後之道 廟中作變之李眞銓 聚黨作梗之孫時夏孫世麟 誣官呈狀之鄭涬一 一一更加刑囚 上報營門 期於依律重繩 俾不敢復肆前習 使書院重地 得保三百年舊規之地 實城主衛道嘉惠之一大政也 伏惟城主閤下裁處焉
題曰 彼輩之昨秋作亂 今春作變 實是無前之變怪 則人有秉彝 孰不憤惋乎 魁首數三人之嚴刑枷囚 亦非勘律之 只此而已 彼輩亦以不敢復踵前習之意 納侤官庭 則渠雖豚魚木石 豈無畏戢退縮之理乎 更勿爲慮 可也 至於報營一款 亦當爛商處之向事
當日追題
彼輩之誣訴文狀 已於官庭燒火事
下帖玉山書院士林
府尹爲相考事 今番本院香謁時 作挐新儒等 倂爲嚴刑後 更無敢如是之意 捧出侤音 以送是右果 院中圈望齋任 不必張皇引義 卽速行公 無使莫重國學暫時曠闕之地 爲宜向事侤音
安康孫世麟 年五十一 孫時夏 年四十八
各白等矣身等 俱以鄕新儒 罔念國學所重 攔入玉山書院 駁逐焚香有司 嘯聚徒黨 無難作鬧是白如可 査實之場 情跡已盡綻露 略受刑推是在果 從今以後 十分悛悔 俾各自新 更無敢率黨作鬧於宮墻之側爲乎矣 如或復踵前謬 行此悖擧是白去等 矣徒等依律刑配敎事
報營草
爲枼報事 卽接本府江東面良洞居幼學李鼎修李馥祥等聯名呈狀 則以爲民等 以玉山書院新儒作變事 齊訴于下車之初 諄諄題敎 先明嫡庶之分 繼開悛悔之路 雖以新儒之無知悖妄 猶知懲畏 稍見退阻矣 不意變怪愈極 今十五日香謁時 齋任二員 偕往院中 則玉李十餘人 先據仍宿 趂曉焚香之際 玉李數人 或出或入 有若招呼相應者 然俄而新儒數十餘人 忽地突出 扶執任司 解脫旣着之齋服 搜取所佩之開金 差出玉李二人 稱以有司 一邊環執齋任 使不得措手 一邊開門攔入 擅行香禮 新儒亦人耳 其在尙禮讓尊體貌之地 此何擧措 此何變怪 莫重國學 將付荊棘之場 而三百年金石奉守之退陶定規 一朝爲新儒輩手分中壞了 民等之抱羞齎恨 得罪於天下後世 無地可說也 昨日庭下口訴也 心膽失於驚惶 言辭迫於憤惋 猶有未盡洞陳者 大抵本院此變根窩 有在指使寔繁 其所謂自稱有司 擅行香謁之李眞銓 卽秋享時犯科李平秀也 誣餙文報 憑藉作梗之孫世麟孫時夏等 卽同時嚴懲者也 伏乞洞加裁察 夬施禁斷亦爲 置院宇尊嚴之規 儒賢崇奉之節 自是名敎中大頭臚 則齋席將事何等敬謹 齋任薦剡 何等鄭重 而今此孫李諸人 不顧先賢之定規 不待章甫之公議 攔入宮墻 行此悖擧 其所謂自薦有司者 初非籩豆存焉之訓 擅行香禮者 實犯玉帛云乎之戒 其在衛國學正士趍之道 不勝驚愕 多發將差 一倂捉致 另加査實 那時同參諸人中 出於隨從者 自邑懲治 而至於孫世麟孫時夏之作爲魁首 罔知禮法之場 齋服開金之無難奪取 李眞銓之投入廟庭 擅自焚香 非但大損體貌 重地作變 依律嚴懲 斷不可已是乎等 以同孫世麟孫時夏李眞銓爲先枷囚 枼報爲臥乎事
二十一日
自官定禮吏 封送開金 而又有下帖 會員將罷會 各歸之際 以廣北鄕員之參會 零星發通輪告
下帖玉山書院齋任
府尹爲相考事 本院開金堅封出送 照數考捧後 卽爲報來 以爲憑信之地 爲宜向事
府會所抵廣北通文
伏以玉院新儒鬧端 未有甚於今日之作變廟庭者也 三百年遵守之所 一朝至此 則其爲憤惋痛迫之情 寧有間於吾鄕士林也哉 鄙等聞變 驚惶後先齊到 冀有一席議處之擧 而至於僉尊 其在宮墻咫尺之地 承聞想不後於鄙等 而指日敦會之席 廣北參座者 止於先到幾員 外更無後繼而至 或有一門全闕處 此不但有怪瞻聆 亦非吾黨所望 此後此會 想不止一再 故玆以仰告 望須各自惕念 更勿如今日會之寥寥 千萬幸甚[此亦中 今番浮費 合爲七十餘金 故自鄕中折半擔當 區處排定 南北各院祠 雖未免從略 此亦斷不可已者 諒之亦望 廣南二十兩 廣北十三兩五戔]
二月初一日
香謁 新圈齋任 終始引義 辭單來到 而朔朝常禮 不可闕焉 故本孫六七人 依士林例 從權上香 新儒三十餘人 又入院中 生梗於朝夕之供 攔入廟庭 混列拜禮 此亦年來始有之事 玆以修文報送呈
文報
伏以民等 卽本院之後孫也 而通言之 則士林也 故院有事變 不得不依士林例 文報是如乎 盖前月望謁時 新儒作鬧 卽一無前之變 而幸伏蒙城主累次處決 齋任則有下帖敦勉之敎 彼輩則有刑囚捧侤之擧 故意謂先院自此靜帖矣 昨日乃朔朝香謁之晨也 民等五六人 爲觀齋任行公 以晦日夕相率入院 則齋任終始引義 辭單來到 而所謂鄕新儒 名不知 孫久逸李乃兼云者 率其黨三四十人 來據講堂是如 齋任旣以辭遞 則朔朝常禮 義不可闕 故民等敢以私情 不得已入廟上香 則渠輩亦攔入廟庭 混列本孫 初無分限是如乎 大抵莫重國學 子孫私謁 未免闕禮 民等罪悚 亦所難逃 而第伏念官令之下 渠輩已以更不敢厠跡納侤 而略無顧忌 復肆前習 且歉歲院力 當春漸窘 朝暮塩薤 于嗟不承 而彼三四十口作鬧踪跡 累次取食乃已 究厥所爲 正所謂毁劃求食者也 民等疲孱 雖理喩不得 而城主前後嚴令 彼旣冒觸之慢忽之 殆若有所恃 而不恐者 然則本院士林 擧將斂手閉戶 終不欲攖其鋒 而爭與列矣 見今享禮 至迫有司不存焉 而聚士圈任 非子孫一門所可恳圖 則實非細故也 玆敢披盡私意 痛泣陳報 伏乞特垂軫念 今番作鬧頭人孫九逸李乃兼等 嚴加刑囚 解慰多士之憾 因以爲圈任安享事狀
題曰 懲治納侤後 意以謂感化知戢矣 孫九逸李乃兼 又是何許新儒 而有此起鬧云耶 眞所謂化外之氓也 從當査處 而院任旣已呈單 則何不更圈可合人 以爲妥安之道也 本孫亦是士林 則從長善處 宜當向事
初五日
官下帖到院
府尹爲相考事 學宮卽士林之學宮 公議乃百世之公議 齋任之地 望有無 官不必擬議 則惟當付之士林 竢之公議 而顧今享日 只隔舊任 一向執拗 有難仍存 則莫重宮墻之曠日闕直 終欠崇奉之典 惟望多士到卽齊會 設圈行公爲乎矣 新儒輩 如或更事携貳 有所作鬧 則必當有別般處置之道向事
是日依官下帖 齊會院中 設公圈任 都執禮府尹南性敎 刊任李在巖
初六日
定儒生一員 封上望記紙 官家之意 雖不肯諾 亦無孤望士林之公議也
初九日

治送典祀官 刊任以家有 劇憂呈單 彼邊之作鬧 風聞甚於秋享時 故門族會議 通告各處 期以一齊上院而支供 則參齋儒生外 一倂依前夏例 各就架家
初十日

參齋諸儒 一齊上院 官家行次 私通先到 而聞彼輩李綺壽李眞慣入府 以爲今番 則將有大變怪極難處之端 沮尼官行 一邊通告渠邊以爲大會云
是日晡時 官行到院 亞獻官參奉李博祥 終獻官正言崔斗錫 繼到座定後 在院若而人見官退出 眞安仍又入見 則官曰 俄到松壇 有五六儒生 執轎子遮路 士習爲敢如是云 鄕新儒之後先聚入者 多至數三百 而皆在眞安眞慣家云 鄕員則畏彼 不能出見 到者 不過三四員 本孫爲六十餘員
是日向夕 設公事席 薦出曺司大邱朴 本孫李在應 公事員李在欽李在海 爲先圈出齋有司李能洙 眞安眞銓眞慣輩 參座大言曰 今番則有別般區處然後 方可無事 醜口恐喝之 其意在於禮祝首執事 而鄕新儒辛天應云者 亦以渠輩末執事一窠 肆然請 聒本倅在座 而此輩之無嚴若是 公事員出座後 進執事版于初獻官 本倅之前書愼禮祝 謁者後依正廟朝延敎已例 將用玉李一執事官意以爲如是 則可參用 眞安輩一人爲言 此輩之近日作梗 雖已例有難許施 而官意難違書 李眞宷於判陳設 李紀元于奉香 書訖揭板之際 眞安輩復入 官前多般求恳 官家卽以廢客責之 不敢更肆 夕後李紀元呈辭單 盖以眞安輩 引入鄕新儒作變先院之類 而羞與同列之意也 官曰 彼中亦有如許人乎 義而許副
十一日

朝後鄕新儒數百餘人 屯聚杏壇 俄而齊入 官前奉進朝令謄書冊子 而裹紅袱擎小盤 仍齊伏南上旁前 官家卽令諭退 不出又使書納 居前者李奎永李錫老二人姓名 後仍令敺出 彼乃退 妥朝令冊子求仁堂上 伏其前官 又招入納名二人 卽令奉出 使吏奉冊盤出給 渠輩又退 妥冊盤于無邊樓下門間 仍伏其外 如是頑拒 日幾向晨矣 自官使吏招渠輩 奉冊以入 於是彼輩一齊入官前 官卽勵聲責詰曰
汝輩之動稱朝令 果有書院許通之敎乎 若有許通書院之朝令 則事當頒敎道臣 道臣行關守令 然後吾當下帖學宮 以爲奉行之道 汝輩雖海隅癡昧之類 不知事體莫嚴 而藉重亂聒 乃敢如是耶 若以列聖朝大臣箚奏中 略有仕路許通之敎 而刪節謄出 稱以朝令 裹以紅袱 則仕宦家許多疏批及朝報 亦將裹紅袱 藉重乎因摺袱子 投之地 予執冊出之日 一向如是 則斷當嚴治云 彼輩遂戢退出
夕後 聞渠輩恐動之言 以爲享禮安行後 將做大變怪 聲言極其危怖 眞安輩又來 言於亞終獻官 有侵辱說話 而且當待明日 言之而去
十二日
鷄鳴後 獻官以下諸生 入廟將事 退坐正堂 行飮福後 齋任單子 自官還單
食後 眞安入見官家有所說話 而卽言十世無嫡之說 官曰 且取汝族譜來 寧無庶字乎 雖百世何可無嫡庶分義 且以孼凌嫡 國有定律云云 彼乃少沮而退 鄕新儒又齊進 仰訴官前 官又書納居前李在珽鄭五弼數三人名 則在珽曰 書名將以何用 官曰 汝旣爲魁首 日後若有作梗 當捉治 答曰 未敢爲魁 而於此事 不居人後云 其無嚴若是 眞安又來言於兩獻官曰 今日獻官皆朝官 當奉朝令 有區處而後去 將有侵辱之擧 此際官行 將向溪亭 邀兩獻官 偕步向洗心臺路 諸儒亦一齊出院門下來 彼輩隨官後 上溪亭 聞彼輩又入訴於溪亭 而亦被敺出云 大抵彼輩今番擧措 若非官家臨院 則必欲成羣作梗 自行享禮 故聲言恐動 沮戲官行 無所不至 而官旣出臨之後 雖不敢姿意跳踉 然前後無嚴之習如右 日後之憂 可勝旣耶 漸覺痛歎
同月十五日
香謁 新儒無一人入院者 揆以此輩之享禮時 恐喝多士觀之 亦一怪事也
三月初一日
香謁 新儒又無入院者 此輩之兩次闕焉 尤爲訝惑
同月十五日
香謁
四月初一日
香謁 鄕新一人及上村人三四人 入院 夕後出去
同月十五日
香謁
五月初一日
香謁
同月十五日
香謁
六月初一日
香謁
同月十五日
香謁
七月初一日
香謁
同月初七
丁亥薦講之未克峻事 于今三十餘年 非但齋任圈望之極難 春秋享禮時 執事無以抄出 故不得已更議始事 輪告鄕內各門中 以十五日定院會
同月十五日
香謁
是日鄕員本孫之來會院中 多至五六十 食後招致上村人路東路西 開座仁堂 畢
陳擧事顚末 彼邊之牢確防塞 一向如前
京畿忠淸全羅 三道儒生 通玉山書院文[癸丑 五月二十三日]
伏以斯文之氣數漸降 儒宮之鬧端層生 至於貴院近日事變而極矣 鄙等學諛識淺 跧伏遠方 其尊衛之誠 雖不及僉尊 而在同室義諦之地 豈可閉戶泯默以蹈自外之科哉 惟我文元先生 卽東方之考亭 而其妥靈之所 必有可敬可嚴之美規學令存矣 窃嘗聞本院薦士節目 乃退陶李先生所講定 而件件條列 無非謹嚴 最觀三參俱備者 薦入院錄 則彼元參不足之新儒作鬧 誠未可曉也 其將毁劃院規而然耶 抑或僉尊有所失而致此擾耶 轉聞雖不可準 而昨秋享禮之餕夕過行 今春香謁之擅行捻儀 實儒林之一大變怪 夫列聖朝崇獎之典 昭如日星 老先生薦講之規 堅如金石 則慢不顧忌 敢意攘奪神宮靜謐之所 事變疊出 衿珮禮法之場 拳踢交加 而僉尊坐裏許 何不狀告法司 文通遠近 圖所以齊聲共討也 凡在縫掖之列者 孰不是先生後人 而況國有名敎 院有防限 則其懲治杜弊之道 寧敢有少忽者哉 且新儒之年前疏擧中 特請貴院儒案許通事 而未蒙兪允 此不但僉尊之恪謹遵奉 環東土爲人臣子者 孰不欽仰萬萬 而以新儒言之 旣知院規之移易 他不得至於上達天聽 處分未下 則退修省諐 以竢日後公議 是固臣分道理 而不此之爲 益肆跳踉 妄生取奪之計 分義所在焉 敢若是 其爲懲戢之方姑未聞 如何究竟 而本院薦講 從以廢不行久矣 則吾黨之責僉尊 亦不得辭其歸矣 鄙等方以冲齋權先生請廡疏事 三道齊會 公議峻發 玆用聯名奉告 伏願僉尊陳籲法司 亟整院規 使我文元之院守我退陶之規 則鄙等同聲之義 亦當側耳以俟矣 僉尊諒察 幸甚
會員 進士百員 幼學百員
同月十六日
禮安院長單刺來到
十九日
鄕員本孫數十會院中 設公圈望院長 府尹南性敎 定儒生封上望紙 官家累遜安受
八月初一日
香謁後 刊任問候於院長 此盖院體所在故也
初七日
以薦講敦事之意 構營狀 定送儒生一員
院儒幼學李彛祥李在誾李能元等 呈營狀 一百二十八員
巡相曺錫雨
伏以生等 卽本院儒生也 本院卽晦齋先生主享之所也 生等生長乎先生之鄕 出入乎先生之院 其所以服襲尊奉之道 唯有衛護書院 遵守禮法底一事而已 而一自三十年來 被他院傍居先生庶孫之挾私沮戲 由來古規 幾乎廢閣 而院任無以圈望 享祀無以如禮 此非但一方士林之憂歎而已 夫以本院之國學重所 而弊到於此 則顧其矯弊之道 亦非法司之所當勘處者乎 請究其弊源而詳陳之 伏願細垂察焉 盖本院薦士一款 迺我退溪老先生所講定者也 而其薦目條列備觀 己參外參妻參云也 三參無犯於庶孽然後 方許入薦 入薦之後 又以小學家禮等書考講之然後 書之院錄 而乃圈院任及享禮執事者 已成三百年 遵守金石之典矣 往在丁亥年間 先生庶孫 妄生同薦之計 沮戲百般 變怪層生 幸蒙營家衛護遵奉之力 而題敎之 關飭之 賴以完薦 而彼輩作鬧後 復如前 故薦而未講 至此之久也 大抵先生庶孫之於本院 雖有別於凡他新儒 而參以院規 己參旣爲庶類 則欲通院薦 乃是行不得事也 且本院之於先生庶孫 所以別處者 每當享禮時 執事一窠特許之 而因此濫生妄計 期欲打破大賢之規 作鬧先生之院 是豈子孫尊先之道乎 苟以憑凌橫習 打壞院規 則是無薦講也 無院儒也 院而無儒 則朝暮蓬蒿 勢所難免 而見今秋丁 漸迫享禮 執事諸儒 事當依古例 抄出於院案中 以爲備官之道 而丁亥以前院儒 則年旣耄耋 故無以將事 丁亥以後薦儒 則薦而未講 故無以差員 勢將剋日取士 考講前薦 而彼所作梗 先期乖張伏乞特賜一言揮廓 使院規克遵享禮利行焉 復有說焉 本院創建在於萬曆年間 而始自建院蒙額 凡所以爲此院贍護崇奉之道哉 莫非前後 按道守土 諸名公賜也 歷歷往蹟 昭載院乘 夸耀後人 屆我閤下 乃以法家名碩 按節南服 闔道士林 所以蔚然想望於澄淸之前者 誠不下於往昔諸名公矣 況今院儒如上所陳 享儀茫無區處 在今日明斷嚴處之道 恐不待區區煩絮 而必有所黙算而夬施者 故生等不勝惶恐祈恳之至 謹冒昧以陳
題曰 其爲有別於凡他新儒狀辭亦云 而以其自處也如是 故又其所望也如是 然而揆以三參之訓 則院中之欲爲嚴防 又安得不如是乎 院體莫重 而薦講之許久廢閣 萬不成說 須所參互左右 裁度義理 處之以曲當 俾更無相梗之弊事
初八日
丁亥薦開講事 輪告鄕中
右回諭事 向者院會時 僉議將以今十三日考講 去丁亥年入薦諸員 盖以享禮執事 與院任之更無備望故也 玆以指日回告 望須濟濟來會
初十日
營題來到 卽爲到府
院儒幼學李在璜李能完李憙久等 到府狀
右謹言 民等呈營門狀 題到付是在果 參商敎是後 依題敎施行敎是乎旀 仍伏念享禮入齋 迫在今十三日 而院中久未薦講 故參齋諸執事 尙無依舊例 前期抄定 則入齋之日無齋儒 恐失官備具備之道 玆敢尾禀爲去乎 伏乞更加參商 行下敎是事
題曰 營題中參互裁度 處之以曲當之道 惟在於士林與本宗之商確善處 宜當事
十二日
玉山書院齋任書目
本院享禮亞終獻官及諸執事未備 急告事狀
題曰 依今春享時已例 似好向事 南性敎
十三日

鄕人及本孫 一齊上院 會員多至百餘人 上村人來參者 亦至五六十 留食院中 支供則依春享例 設架家於院村 是日昏 官家到院 院中僉議 將以明日設講 仍抄執事 故爲先圈出獻官於官前 亞獻參奉李博祥 終獻幼學李彛祥 遂與會中諸生 祗延祭需於亦樂門外後谷就旁所
十四日
食後 官家傳喝於在外本孫長所曰 今日當有別般議論 必爲入院參會云云 於是開座堂中 院長出座 諸儒簇立 而彼邊亦混雜參會 院長曰 今番 則齋儒無以備數 且營門題敎 必爲開講 官必依營題施行 情參義理處 曲當之敎 官亦不無料量 僉意以爲如何也 座中斂膝而對曰 玉李之從前設計 必欲同薦 蓋其同薦云者 將以破薦無講之意 此則會員斷斷無毁規云云 官家又曰 薦規不可毁劃 至於執事一窠 亦無許通之意否 未及酬答 彼輩齊聲大呼曰 民等之前後血爭 專爲同薦而不在執事 咆哮恐喝 凜怖無比 官家又曰 吾意則必欲許之以執事中一窠 和同彼此 使院中復設薦講矣 汝輩如此 豈可施爲 莫如依前 苟備執事 以安享禮 仍書執事板而罷座
十八日
彼邊四五人 來乞門中 蓋其意微有執事中許諾 則不無和同 然門議亦難重 不許
二十日
設大門會於宗堂 半日爛議 以首執事中一窠 濶挾決定 自會中送牌龜院 必以晦前定鄕會日子 通告鄕內各宅
二十一日
刊任呈單 院長亦爲呈單
二十九日
依回文齊會龜院 到記合多至七八十員 朝後開座 發論玉院區處之道 鄕人 則皆以刊任許通云 而本孫 則猶爲持難 必以首執事中一窠言之 一座議論 無不肯從 仍爲罷座 鄕人及本孫四五十 自龜院直上玉院 午飯後 送都色於溪亭 傳喝下來 日晡時 彼輩數十下來矣 遂與開座仁堂 先發和同之論 繼以執事一窠 許通與之爛議 彼輩之言 終無意於此等事 又以同薦云云 故不得已罷座
九月初一日
香謁 自士林行之 食後 滯雨留連
二日

朝後罷歸
己未三月十九日
入格薦後 溪亭呈本府題音[原狀未見 本尹 金在田]
近有朝家大處分 亦有巡營美題音 官何嘗全然不知 皮裏陽秋亦可曰 我獨無之乎 但今番入格薦事再參享事 罷齋後 齋任及貴門諸章甫 皆言薦中無人 更不得出齋任 無齋任 則勢將院門永閉 春秋享禮 亦難如禮設行 於是乎帶心憂惧 責以徒有設弊 繼無捄条 則乃言捄条 不越乎薦之一字 而薦院大則如此此 小則如此此 不佞窅然自失 此非如我膚淺之見 所可擔當 大則尤不敢議到 小則不得不奉以周旋 乃行入格薦 入格薦 原無通瀜同薦之例 我國凡百事 無不尋例 而至若莫重斯文上關係處 以何樣力量根識 擺脫古例 乃敢循私意出別見 創行通瀜同薦之擧乎 所以膠守而已 先生本孫者 猶當幸其姑守先院 若干年無弊將事者 四當八停矣 奚暇攙入他說 帶得不平底意 而如是張皇也 竊爲令君子不取也
再呈本府題音
何等根識 擺脫一副當 成規展 渠皮裏陽秋耶 亦謂入格薦 出於目前苟且之計 而此猶幾年保守先院之道 則爲子孫者 欣幸不暇 感服不暇 可修百年 未盡之好誼 不此之爲 徒懷挾雜之意 屢聒不止 此豈道理乎 朝家雖有處分 而此等事 果皆通同無碍乎 營門雖有美題 而此等事 亦皆瀜恊有濟乎 到處未遑之事 獨於今日如是迫督者 抑獨何意此而不已 官亦有正士 趨壱民志之道 以此知悉 宜當
龍仁忠烈書院士林 答永川臨皐書院通文 
貴邑之臨皐 卽我老先生桑梓首刱之院 鄙鄕之忠烈 先生衣履尊奉之地也 列聖朝褒尙培養之典 諸先正施設遵奉之規 始末同条 遠近無間 忠院之於臨院 卽一而二 二而一也 凡我士友之出入是院者 講明乎義理 傳襲乎禮讓 於北於南 互相觀感而興起 則庶可無負於國朝建學之意也 近年臨院之新儒分任 已是太學所無之例 而其末弊 轉至招類突入 誣辱士林 擅改官薦 甚闕院香 悖擧惡習 無所不到云 恐或非僉君子之養患自貽者耶 又怕狂辱之 或及幷與遺規而廢墜 則此狀趐貴鄕今日之羞 遠近章甫 其將瞻依於何地耶 鄙等亦在老先生之遺院 不可自外於臨院之事 故聞卽禀議于院長閤下 兹以發文通告 伏願僉執事齊聲合議 亟呈營邑 嚴懲新儒之悖習 圖存舊院之遺規 幸甚
壬子六月二十一日
忠烈書院 齋任 李應明 李鼎魯 沈在謙 尹顯佑 元世胤 徐昶淳 鄭燠日 金泌 進士 李用儀 前縣監 鄭宅鉉 正言 鄭燠翼 進士 姜桓  幼學 李知愚 李用翼 府使 鄭文升 進士 閔舜鎬 幼學 鄭東基 鄭羽采 李羲典 李錫在 郡守 李學愚 幼學 洪在準 進士 李圾 進士 李羲道 幼學 鄭仁基 鄭敏基 鄭泰鉉 沈在復 李[土+敬] 金涑 鄭佑鉉
忠烈士林禀目院長
壬子六月十三日
伏以永川臨皐書院 卽我老先生梓鄕首刱之院也 近以新儒中悖流之作挐 廢墜之患 將至罔測 在永之旁裔 不勝憤惋 千里遼程 委通告急 誠是古無之變恠 儒生管見 不敢擅便回答原通 茲以恭俟回敎 而大抵本院之於臨院 一體無異 故自前隨事周旋 互爲脣齒 則況今興替所關 尤不可越視受侮於南中鄒魯之鄕矣 遐土氣習 與畿湖有異 不可無聲勢相資之益 以嚴辭回通之意 下帖于本院 伴送于回通 則丈席一言之重 足爲悖流之懲戢 亦有光於本院同聲相助之地也 且臨皐諸儒 方劃議呈營 以要一書先容 而事關斯文 丈席或有雅分於嶺營 俯賜尊札 扶植士氣 嚴正悖習之意敢禀
禀目題
示諭謹悉 臨院悖儒之造妖捏恠 將至於廢墜院規 前頭憂虞 不知攸屆 爲斯院 不勝憤惋 所謂悖儒 不可任其所爲 亟訴營邑 圖所以鋤草去根 俾不得更肆猖獗 恐非可已 幸以此意回通臨院 齊聲痛斥 爲千里相應之地 不勝其厚望也 賤疾近添風眩 罔克竿牘委托 而豈無因便轉囑之路耶 不宣
壬子六月十三日
院長 洪直弼
癸巳十二月二十九日
箚對時 判書蔡 奏曰 殿下 昨於嶺儒疏 下曠蕩之典 而臣意則不然 臣熟知嶺南之事 鄕案以先正李退溪 登祭酒後始參 臣雖經兵戶判 若下嶺南 則參否未可知 臣亦難爲之 況使渠輩通錄 則必有大弊端 嶺南爲國家根本之地 而有此下敎 則難以鎭定 且殿下如此區區之事 何必費念也
上曰 然乎云云 朝廷自朝廷 鄕案自鄕案 吁嗟暮年興懷 當知大體而已 前批答勿施
新儒營題
八月十一日 原狀未見
惟在士林公議而已 此非營邑之所可左右事分除良 其於措辭之際 亦多有不可言之說 彼果有失是隱叱 亦不可登於文字 益勉自修 第俟公議向事
丙辰八月日
佳巖崔氏門中 付東院牌旨 
本院數百年尊奉之所 何等重大 而十有年來 揖遜降而成鬪鬨之風 香烟歇而爲蕪沒之場 令人見之 自不覺興言感懍 則尙曰外本裔之偏執前見 少無一分情禮之公心者哉 其在吾林之地 不幸亦劇矣 然而是非之端 久則定 定則安 此必有之理也 以今言之 可謂定矣 烏可以已定之論 膠擾於不安之處耶 茲以今十八日 將赴本院 克敦久缺之典 此意輪告于各門 以爲一一齊會之地 爲可
同時 佳岩崔氏 抵龜院通文
生等 生在晦老鄕中 忍令愚翁妥食之境 有院而無院乎 蓋人於是非之際 彼人曰我是 此人曰我是 則是皆自是其是 未見其非者矣 若使傍人觀之 則一是一非之間 豈必待智者而後可卞哉 然而事有不一 是或有本是之是 而一切恃我之是 直涉於大有所不安處 則是是也 庸可曰盡善之是耶 而況本未必是之是 想或心悟而外完其是者耶 生等 乃是非中傍人 請畧擧之 大抵兩家此事 亶由於一梁麗大小雙墨 而以李氏言之 固不當恃我之是 而激成其非 以至於大不安之處矣 以孫氏言之 雖或誤認爲是 固當於妄鑿之誅 甘受甘悟 而不至於執拗之劇矣 誠觀今日之東院 江濤未熄 秋煙瑣草 尋常行路之彷徨不去 歔欷歎息曰 此晦齋先生舅氏之境 而是果孰使之然哉云爾 則是之爲大不安處 矧在子孫之地 向不無致之之由 而堪耐了此等景色者耶 第伏念當初是非 自有不言中歸宿處 而目今言之 認是不緊之爭繳也 其在章甫中 被髮纓冠之義 斷不以昔之未能 終嘿於不安之地 而自安於袖手之觀也 韓子有言曰 知而不以告之者 不仁也 告以不以實者 不信也 生等旣在是鄕 竊嘗知之稔見之實矣 夫豈曰彼將不信而自歸於不仁之科也耶 兹以先布腔由 擬以做齊心香 與僉君子灑掃周旋於敦敎堂上 伏惟僉尊 其亦以是語之兩家君子 幸甚
自龜院還逐原通後 龍院都色答私通
來通納于佳巖各宅 則分付內儒林之論 本非自己上驟發 而備質于公共之科 則不可安可安等處 爛商明白 可受 則自公共中受之 可擲 則自公共中擲之 未爲不可 而一二員之鶻圇於擲之之端 而爲是之擲者 似非公議中明見 此意告于堂上
無忝堂會中 抵東院牌旨
今聞南邊諸員 來會本院 將爲收刷計 甚好意也 但本院鬧端 實由於樑文一款 而樑文中淵源二字 有背於陶山狀文 故癸巳釐正者此也 近年鄕道論 前後嚴斤者亦此也 又有本院年前道院長之見駁於陶院事 則見今本院收刷 莫先於樑文之釐正 此意告于公事員 主前消詳回告之地 爲可
東院會中答牌[院長崔濟民 有司權致昇]
良同下牌中 梁麗之規正一款 竊不欲話柄之徒事懸錘也 蓋義理在天 公案在人 天不變 則義理不變 人不滅 則公案不滅 炳炳若白日之皆得以仰之者也 以貴中之洪見 非不及此 而奈之何轉成膠瑟 不知有更張之得其時 宜反以一梁木之嘿嘿掛搭 指爲是非中鐵券 必欲痛快於在己之偏勝 在人之義理公案 都歸於黑窣窣之地耶 此中之見 本無岐義 義者人心之所以裁制也 今日裁制之道 於廣明正大處 坐在裏許 而本院數百年久祝之所 固不當永爲缺典 此彼則雖千言萬言 把昨年外消息 以是意告于堂上 爲可
設公爬任後 有門中抵佳巖聯札
伏惟秋中 僉體動止萬重 區區慰仰 人之做措 各有攸執 而誠不料貴門近日之做措也 其所以力爲此擧者 必以東院開門爲第一義諦 而東院之門 若如是而開 則不待貴門而其開已久矣 夫欲改此源之門 鄙門當十倍於貴門 而至今鄭重未遑者 誠以退陶之狀本 不爲誣賢院之開閉 不可苟而遲之歲月 以待士林釐正之日故也 梁文果改正否 士論果歸一否 無一於此 而猝然爲此者 雖曲爲辯說 恐無以爲貴門自解也 將宿之火 以扇而噓之 旣平之 彼以戶而激之者 亦未必爲孫氏地也 而至如通辭中 是非二字 則鄙門竊不勝慨然 夫這處本無是非 正所謂天下本自無事 人自撓之者也 以其大未安 所不敢之說把作儒林間是非者 已不落腔窠 而轉又以是非二字 隱然歸之於鄙等之何嘗有是非之有 有一部狀文 在淵源二字 斷不當因仍掩置 則鄙等之死守爭執 只是這箇義理而已 雖不爲貴門而變 而俄者東院會牌中 天不變人不滅 則公案自在者 正道着此意 旣知此義 則何以有此擧也 這箇義理 非徒爲鄙等之固守處 實一道士林與一鄕僉君子之嚴壽嚴斥者 而今乃無故自擔 假一時調停之論 變了數十年苦心共守之義理 豈非訝惑處耶 嗚呼 尊賢衛道之心 人孰無之 而若乃誠心衛護 則居在新安婺原者 抑有自別焉者 故於貴門僉尊 正不能無望 而當此百恠層出之際 亦有依恃而不懼者矣 今此一番擧措 出於平日尋常意慮之外 儒林公議 姑置勿說 在鄙等私分 有不敢終嘿者 仍伏念吾鄕先父老 所以齊聲苦心於勘正此事 則僉尊亦豈無悚然于中者乎 貴門業已擔着此事 擔着之事 必爲歸正之地 千萬
崔氏答書
向時鄙論之一種芭籬 令人氣颯如秋 迺者遣示慇懃 優施警策 苟非大方忠厚 如知言之善 烏能轉?如是耶 況伏審僉體一例冲穆 尤不覺拔例控祝 蓋鄙等之爲東院擧者 非以力之謂 苟之謂也 貴中所執之令下道理 而何嘗有一分越俎之嫌哉 陶狀之不可誣者 不但貴中指見之實矣 愚翁尸祝之不可缺者 不但鄙中自立之論也 至若以鄙等通辭中是非字 指爲無是非處 別生是非樣 深致慨恨于隱然之科 則正所謂罪未必無辭 而罪苟不明辭 何能違鄙等 雖啄不盈尺於自解之道 似不至沒沒頭影也 夫四端中 智之端爲是非 而夙昔義理之爭 係是吾林中一大關棙 則智與不智之間 其爲爭端者 果是爲甚箇言也 尊示之這處 本無是非 而鄙等何嘗有是非之有云云者 認以這處義理之炳朗如日 直無可對之非 而自我所執而言也 抑未料以這處義理所執之由 而畢竟爭端處 分以言之之爲一是非也 然則今日蒼卒間 本自無事 人自撓之之諭 正指誰也 義理行事 有若埋途隱然之下 恐不免仰唾墜面 以貴中之見 爲此含胡之說者 旋不勝慨然于中者矣 且於做措上言之本院之鄭重未遑 誠如未諭 而鄙等之於此 亦不無可惑者焉 旣曰 梁文果改定 士論果歸一否乎 而又曰 將宿之火 旣平之波 何謂也 義理之上 其果有岐貳之言耶 僉尊試思之 自有此事之後 鄕道古衿紳之論 森於斧越者 職由於梁欀之文 則鄙門通辭中 不言歸宿 東院會牌中 天人之義理公案 斷斷不容他 而貴中之惟以旣宿旣平 平定後一梁膠固執論 屋上加屋 不知爲噓之處自在之扇 激之處自在之名 則未諭中途之歲月 以待釐正之日云爾者 雖曰無限光陰 而其將有宿後已 竊伏念當於義理 乃儒林之公共義理也 卽今是非 乃兩家之自主張是非也 鄙等豈無一於此而卒然爲此者耶 豈無故 自擔假爲之調停者耶 豈甚事 有戾於老先生狀本者耶 義者事之宜也 爲愚翁數百年尸祝父兄之所 而得其做措之時宜則合矣 豈爲愚翁之裔而設祖於其間者耶 大公正中之地 卽當大公正中而已 元不有依倚不恃之勢 而愛朱子者 愛朱姓人 則慕賢之所同也 豈直以新安婺原之謂 有別般可恃之私耶 誰昔鄙等之論 卽道內之論 則其肯曰 以子孫之攻而孤負祝氏之家賢耶 鄙等實無使人可變之力 而斷當以事宜上 自其不變者而視之也 亦何必復事分析於這處地位 而乃若擔夯之責 則惟在兩家消摩情勝處耳
九月初一日
崔濟民 崔元復 崔濟健 崔濟燮 崔濟敦 崔晏翼 崔世震 崔世器 崔光壽 崔台壽 崔鉉升 崔鉉九 二十九人
門中再送聯札
九月望日
就向日東院事 以鄙等膚淺之見 姑未知貴門此擧之如何 必審諦恭俟措處 而??不容自外義理 在所相確 此鄙等之所以有日前往復也 及承尊諭 仰悉僉尊於本原義理 大煞今曉 陶狀之不可誣 乃所守也 道論之嚴辭斥 乃所知也 義理公案之在於人者 無彼此之異 而第其遣辭之際 不能無偏駁 含糊底意 此則殊欠於平氣以聽之道 而鄙等亦何必分疏哉 只就僉尊之所守所知者 不嫌煩複 而大抵天下事 有本有末 本在所先 末在所後 而未有遺其本而理其末者也 彼本院梁麗中淵源二字 乃吾林死守頭臚 而癸巳勘定 尤是死守中死守者也 不索本孫 執迷妄鑿之失 而致曠幾許年 則此豈但僉尊之所憂歎也 ?抑鄙等之切欲披瀝而不得焉者也 迺者僉尊向今之擧 爲本院區處之道 則鄙等亦私以爲梁?自此可釐正矣 院事自此可整頓矣 矯首累日盛論是俟 而及聞其所以區處之道 則不過苟且彌縫而已 至於本?肯緊 則都付嘿嘿之一木 而不少槪於規正之科 鄙等竊不勝訝惑者 蓋此門之閉却許久 亶由於梁文之未正 則梁文未正之前 猶是未開之門也 苟如僉尊之言 以爲是非鉄案之不在於是 則癸巳鄕父老 何以有鑿出已搭之梁 而又未聞當付士論 一言以爲兩家是非而置之窣之地也 僉尊之坐許光明 豈不覬得此箇義理而然哉 第恐於釐正收刷 把?兩件物事收刷處 看得較重 而不知釐正梁文 乃所以爲收刷院事之本也 其可乎哉 然而說着面前 雖先後之差 而?到手裏 要當擔倣乃已 鄙等之恃而無恐者 以謂此門旣開 則此梁斷不容不改 而將見退陶不刊之筆 癸巳已勘之案 待他? 着得有歸正之日 而鄙等鹵劣 亦隨僉尊之後 與同周旋於東院肅淸之地 則豈非吾林幸也 斯文幸耶 事係公共義 當審愼以要須十回及復講至未當之地 故玆敢再煩崇聽 幸垂諒更敎
佳巖答書  
十月三日
崔濟健 崔元復 崔濟爽 崔濟倫 崔濟敎 崔世應 崔世泰 崔世彬 崔世光 崔世直 崔泰壽 崔正壽
一再警敎 認得忠恕字 遠道甚邇 感戢良多 伊後月改 伏惟僉體萬重 鄙等嘗拈取于朱子規風中義曰天下之事 未必不根於古 本於經 蓋事之根本 有恁地上委宿處 則在今而不爽於古矣 處紛而不失於經矣 就今日東院事觀之 鄙等以鄕古晩出 雖極棗鈍 猶知苟且逡巡之岐於古道 牽今彌縫之乖 於經理 復何必偏於心駁?義含含胡胡之爲之者哉 肆惟鄙辭中 義理之爲義理 公案之爲公案 坐許光明之爲光明者 決非口耳間 霎去霎來底說?也 槩審尊諭其在於彼於此 直前無可疑等境界 亦當曰知之知矣而然於本末先後四箇語 似不無知一 未知二之戒焉 ?等豈裹在方寸 自外相確不外之哉 夫鄕先生沒而可祭於社 則祭者尸祝之謂也 鄕先生可祭之實 爲尸祝之本 設爲尸祝之所者? 庙貌以建之 而梁麗乃庙貌中物 則尸祝爲庙貌梁麗之本 若曰可祭之實 在梁文中語 而梁文爲尸祝之本云爾 則此亦不然尸祝者 實之所以答也 爲敬之基 而敬主乎內矣 梁文者 實之所以寓也 爲情之文而情在外矣 且或有之梁麗而無其文者歟 旣曰 尸祝之故而爲梁麗 則可矣 以梁麗之故而有尸祝 則匪直不可而止耳 上所謂本末者 當以何如看到 而先後之序 又從以放倒了無着跟?也 鄒訓曰權然後知輕中 繼之以心爲甚 噫 尸祝梁麗者 權衡輕重 星星可析 而以百世不易之重典 至幾許乎 輸着於梁麗之重 則?曰 本孫之執滯謬妄 而若令扣道者言之 向之梁麗者 雖不無尸祝中重之重 而惟彼本原肯棨之不待容付 而旣不免執滯謬妄中大脫煞矣 況吾林義理公共之筆 其大如杠政不趐一箇梁之 默默脫煞者乎 尊諭以中世之事爲證案 則如鄙等之膚淺者 固不足張皇鋪說 而抑有一設人之 苟欲據經而考古 亦莫如體心之爲貴也 奧在中世 其時梁文 改則改矣 設?不幸 有今日支蔓之端 以諸父老滿腔血奉祝之心 似不必專主於執拗之一綿 以廢其所未安不可廢之重典也 伊時士林 想亦?父老重尸祝之心 而不必斷跡於驗奔之列矣 何哉 第念愚翁可祭之實單 不在晦齋上一條句語 一條語妄着 却在洋洋如在?外至之端 則尸祝自尸祝也 詎忍了一條外 幷與其可祭之實 而爲之廢如是之極也哉 此鄙等深究於輕重之原 分疏於緩急之際 要出根古本經之歸宿 一款合湊乎僉尊之憂歎中憂歎 而其所以體之 乃所以度之也 然而處事之方 庸或曰到底手裏改 未必强把着置之 此邊亦未必强把着置之彼邊 而有若大忙中挺身自做者然哉 日月有往來之消息 嚴霜有暖和底氣像 以?敵善?之地 其將曰披隱乃盡僉尊不此之諒 而一直推而擔之於有背之上 實非鄙等之速誚於不勝任三字 正所謂欲其入而閉之門也 欲其解而轉?結矣 鄙等區區之見 如是斷之 伏未知僉尊以爲如何
門中三次聯札
向承惠覆 備審冬寒 僉履萬護 仰慰區量 鄙等各保何煩 就悉尊諭 辭旨諄複 不以煩屑爲誅 而引以置之酬論之科 吾人講究責勉之義 固不當如是也 第其中本末中世兩款語 於鄙意 切有所不敢承唯者 然而鄙等 自有此東以來 毎以乖激爲惧 平反爲義 其於可以卞可以無卞者 則一切付之於傷煩之戒 而不平論利 惟以大義歸正 爲究境法 所以至今恭俟者此耳 夫義理所同 秉執?不差 則其於義理之不得不卞 秉執之不得不嚴支 惟當一着勇往 要做得令做乃爾 似不容遲徊因循 待他時月也 復有?一說焉 粤自吾道東而南 而文獻統緖 卓越乎諸家道德源流 直溯乎閩洛 故吾南在吾東 獨以鄒魯見稱者 蓋有取爾 而若吾州則又所謂大國也 三姓遺墟 世族幾家尊祖象賢之處 晨星相望隆師親友之際 佳文共守 夫何十餘年來 義理塗喪 風習分張 吾林有識者 寒心久矣 雖然 鄙等區區 猶以爲士君子 愛與之義 貴乎盡言 鄕隣古親信之道 期於踐言 故鄙等之於僉尊謹奉咫尺之書 極言謁論 至再至三 而慮或鄙等之不能使公爲吾 一如僉尊之不能爲公 則過此以往在我處 義不過有各尊所尊 一南一北 一事而已 惟願左右周察 私中有公共 始商量緩處取 然則此不但斯文一時之幸也 亦吾鄕百世莫大之幸也       
崔氏答書     
丙辰十二月二十日
崔濟健 崔世信 崔世應 崔台壽 崔聃壽
伏惟僉體連重 鄙等旣三復惠書矣 愛玩奉持 不趐白圭 而但其中下語之際 恐不無玷了處也 蓋道之所尊 人無彼此 地無區限 私則不公 公則不私而已 然則僉尊之所尊 乃鄙等之所尊 鄙等之所尊 乃僉尊之所尊 匪直鄙等僉尊之所尊 乃一道之所尊 匪直一道之所尊 乃一國之所尊 何嘗有怎麽矛盾之端哉 苟非其道 雖在門墻 亦當日揮之也已 豈止分而二之 南自南北自北 而我尊尊之一副 當這箇地位 有若一家一人之任主張 私與私奪之爲耶 僉尊恕思之 鄙等之 一再腔辭 更不必床疊 然 而惟彼樑墨之窣窣沮 不得吾林之明白正論云云者 其果爲未盡這言 缺典之擧 實是鄙等 莫貸之咎歟 不爾僉尊之意 何以曰我之所尊 爾惡敢尊也 爾之所尊  我不必尊也 兩致載於一尊字上 而拈出較之之端 於元無爲較之地 如是之率爾也 鄙等 雖昧劣無似 亦豈曰不自知而然哉 爲是之事 亶出於合之之道 而今於僉尊 反不免各之之力 則始認了兩家之頓然無好樣究竟法 而楚雖失矣 齊亦不爲得也  鄙等眞箇爲齊楚間 區區之一小滕耶 斷當於義理上 牢着脚跟 而至使强做得一款 亦可謂獨魯不下 僉尊之下稍一事 雖破烕於乖激爲惧 平反爲義之義 更安敢承當也 惟願各爲攸爲 消磨勝心 則鄙等其將曰 斯言之玷 尙或如磨 而矧復尊之之禮 以和爲貴 和者從容不迫之謂也 僉尊以是諒之 如何
渠林全役廉隅 徒事媢疾 沮遏傍先 非止一再 今又割名龍山 必欲阻事景山而計 莫之遂反以執言於東江 逞毒於景山之會員 正所謂室怒色市沙含射影者也 其在景山本孫之地 縟儀方張 羣猜近出 則何不預爲操束 而俎豆一擧戈戟曰 起嫁禍於執禮 將事之員 晏然若岸上之傍親 尤不勝介然 然而渠李之不念傍先者 烏可知道內之士夫乎 且琴湖李之乘時鼓簧 復蹈前轍 構捏擠滔 自是素來技癢 所以絶交已久 不必爲惡聲之出 而至於渠林 則進賜主 雖用含忍之道 姑置勿問之科 而子姪之道 不可無一言詰責 將此牌旨 示于渠林下里 爲可
溪上抵玉院通文 李淸州獨通
戊午八月日
伏以彙寧朝暮人也 凡係自家身心 常恐拘撿不得 況可與知吾黨事乎 第所謂屛廬是非 乃吾黨存亡之會也 我不敢自處 恝然前者 蓋嘗苦口調解 而自媿憃愚 實無所致力 窃恐一朝溘然遂成千古之恨 不得已更申前論 非欲仰聽僉尊之可否而已也 於乎 是非人所同然 有或偏私 是拘執持太重 則非公是非也 彙寧 竊嘗聞僉尊之言曰 吾輩之所依歸廬院 是已夫子在座 顔曾後先 百年象設 不啻崇嚴而靜謐 今此所爭 起於此廟之內 四十年上下擾攘於言語文字之間 甚非事體道理之所敢安 僉尊於此 旣已自知其未安 又曰 吾輩俱是淵源故家也 平日之相愛 如兄弟 和樂如至親 而一自可是非 分明天理滅而人心喪 黨同伐異 兄弟不如路人 遠交近攻 至親遂至睽離 甚非所以體先志而保太和也 僉尊於此 亦已自知其不是 然則僉尊之於彙寧 所言固不以爲不可也 於乎 吾黨是一家也 爭亦一家事也 旣知其未安 又知其不是 由是而平心公聽 使私意漸消 客氣漸退 則區區妄料 竊企其有爛漫靜貼之日矣 向者高山志之出 而終不能擺却是非 近聞屛山志繼出 而將是非顚末 擬成一通文字 噫 其甚矣 此果百世傳守大義理所存 而各自徧輯 久久講習 將與天壤共弊而後已耶 苟如是也 安在乎知其未安不是也 於此亦不敢閉戶囚舌 幸望其所不諧者而已 且以向來奉審時庙貌言之 上雨而下濕 瓦弊而席破 砌石頹欹 榱木朽傾 濂溪之祠 不可謂無恙 而況後十許年之久 白鹿院之隳損必多 會待是非底定 院務克擧    則隨意葺治 是次第事也 今焉更何望也 於乎 後來是非 何與乎 高山之爲志而實啓 屛山志繼發之漸就 以屛山言之 就彼而釐削可也 因此而襲謬 又何也 互相激發 整頓無期 則吾黨固無奈也 於尊道祠 何哉 況以近月所聞 廬院之堂齋樓屋 將節次修擧 而獨於尊道祠 不敢動一椽而補一罅 豈僉尊之意謂 可以無是祠而有此院耶 實坐此是非 莫之奈何 則其憂惧悚恐 不但止於是非之轉輾乖張而已 凡我幾箇襟紳 居在同省 知此祠之不久顚踣 而不思所以救之耶 於乎 昌平之祠 重建於百歲之久 武夷之廟 增修於八世之後 慕道之誠 今古何間 雖以僉尊之局於偏私 而恐不當並與此相持也 伏願道內僉君子 以今秋某月日發文 齊會于廬江書院 因其所己知 而洞諭以大未安大不是底 期有以保合焉 則誠大幸也 遂聚前後是非文字 無論久近 又無論旣刊與方刊 可以消壞者消壞 可以釐改者釐改 然後合席泒任 卜日排物 爲廟宇重修之地 斷不可已 僉須俯諒 千萬幸甚
載寧李氏門中抵東院通文
右通諭事 伏以一道儒紳之會 卽禮讓相尙之地也 設有論議矛盾之端 各自勅勵務從和合 向後方可以盡道理服衆心 迺者 景山腏享之日 鄙族一人 趁期赴會 一則爲先輩景慕也 一則爲知舊慶同也 至於兩家是非袖手而已 夫豈有一毫偏私於其間哉 竊昕當日參觀之言 則捲席擧措 已極駭悖 及後更設一座 而鄙族人 晩後聞知往入參 未見其氣燄之可畏 談鋒之將逼 乃出易地之說 其意若曰爻象如此 雖使當事之本家 易地而處之 不可晏然坐二?云爾 非推彼助瀾之意也 此果爲害事耶 逼語耶 至若東江事 則鄙門私自悶㭗慨歎者 而今乃以易地之說 把作欛柄於一道稠廣之中 挻身突入 毆捽持曳於?弓之外 麁拳悖舌 此猶不足 終至於破裂衣冠之境 蓋自儒林會集以來 卽未有之極變也 且使鄙族人 果有逼語害事之失 固不當如是作變 況元無所失 而以尋常一言爲失言執頉 而其爲子孫者 出此無前之變 正所謂家必自毁而後人毁之也 東院之閉不閉 道中更何有議處乎 其爲子孫者 亦何面向說先事於道中人耶 且意寧邑雖曰海隅 猶爲士夫之鄕 鄙族雖甚寒素 亦在衣冠之列矣 自聞世變心膽顫掉 有不可終黙者 玆以發通仰聞 伏願僉尊俯賜質? 甚幸
李相郁 李相垕 李相侃 李相華 李躋榮 李心燦 李鉉德 李壽華 等 合二十員
同時有抵龜岡都色牌旨
翊洞抵東江書院牌
丁巳閏月日
及見於孫姓無賴之輩 爲可
廼者 景山道會中 孫姓之作變 汝亦見而聞之否 此中家庭公私 以門中儒生赴會矣 卽見氣燄 則雖有鄭重之論 難以于涉 胡含口重足於簇立之後 而及其罷會之後 出易地之說 而將奉身退 出矣 彼無賴輩 以易地之說執頉 而聚群成黨 突入會中 口以詬辱 手以毆打 足以持蹴 至於破裂衣冠 當日作變 雖樵牧之輩 其逆理亂常 似不當如是 而況其會集皆士林也 或縉紳也 彼無賴輩 亦人類也 借使易地二字 謂語逼淵源 以理談辨可也 彼輩有何腐心刻骨於此中 而出此樵牧所不爲之變於一道稠廣之中也 自有儒林會集後 卽未有之極恠變也 所意東江之孫 豈有若是無賴者耶 必也天地乖戾之氣 鍾於東江之後也 易地二字 果是語逼耶 又是悖慢耶 噫嘻痛矣 彼輩所爲 曾不料如是之?惡也 今見彼無賴輩所爲 則東江之于今閉棄 非東江之故 而乃是彼輩之罪也 以其今日彼輩所爲言 則凡爲儒林者 孰肯爲議處東江者乎 閉之者亦彼輩也 毁之者亦彼輩 則東江之閉 豈不悲哉 且人之大倫 莫大於父子 彼無賴輩 或有父者耶 或有爲人子者耶 倘或有父而有爲人子者 則辱人之親 其果若是乎 傷人之親 其果如是乎 ?彼無賴輩?………又爲獲罪於天下爲人子者 自今以後 則尤以弃禮義無道之類 置之度外 如以此牌輪 示於本鄕各宅?
丙辰八月日
道狀營題 會所大邱硏經書院 
臨川悖擧 以儒罰懲之足矣 近來士風 不能自立 尤何以治人乎 於是乎輒使官府治其罪 故不得已有醴儒推捉之擧 權久相之自來鳴寃 權仁夏之替子訟屈 猶是參恕事 忌張大罰 務貴稱停 故恕其半而罪其半 亦可以聲其罪於一道營門 愛護溪李之意 多士尊奉淵源之道 於斯至矣 迄可休矣 必欲盡罪四權而後已 無或疾之已甚耶 雖有加於此之事 衆犯之中 且罪一人 即所以盡罪同事之人也 今則以一事而罪二人 已極過? 以風聞所傳 必欲盡罪四人 非獨士論之乖激 亦係刑政之失至決 不爲多士之所脅持姿意濫刑 且以催久相事言之 執?鳴鼓 口呼罰名 多士之所不見 指天誓地 證以祖先 僉尊之所目摯 不以目前之實境爲正 必以風聞之所傳爲主 期欲刑配 斷斷不已 人心士習 渝薄 誠爲慨歎 其在尊師門正士趨之道 一番道訴 容或無恠以面以題 如此洞諭之後 則復起鬧 營門當先正臨川會捉 望醴儒之失李晩恩閟堙同人之罪向事
硏經會所通文 
伏以臨川事變 僉尊想已稔悉矣 因不必更事覼縷 而第有所不得不家誦而戶說者 噫 一自屛廬 分受以來 雖或有一箇義理 建天地而不悖 質鬼神而無疑者 擧皆覗覘先後 較量勝負 ?之以私意 縱之猜嫌 指鹿之手 鑠金之口 乖說詆毁磨滅 義理之不得爲義理者 于今四十年 于玆生等 尋常痛歎 竊欲糾正沿革而未遂者久矣 今於近日之事變 果是渠輩之一番陽九會也 以其祖之院 而爲辱人之? ?以其祖之孫 而辱其祖先師之胄 噫噫痛矣 是其變乎 常于此必有稱之者 而金溪之從心曳心 萬口同然 湖李之情 迄一牌自現 於乎 臨川是何等肅淸之地 而無難斥之以 ??中鳴鼓之 何等凶悖之擧 而乃反稱之以一聲雷 噫 渠輩 亦一世先生風化中生育者也 編於士類之列 稱以儒冠之流者 亦有世代年所 則雖以護党之積習成痼 醜正之本態難掩 安可自陷於忘祖忝先之科 而以臨川之變 謂之薄物細故 而從情對擧而後已乎 春秋不云乎 邪正之分 誅討之異 自有筆鉞一書而難逭 噫 吾道其衰乎 春秋其亡乎 吾黨之變 何一至此極 生等不勝憂情 玆以道會之席 用罰金溪湖上付之後錄 至於李晩慤? 雖有本家宗會之席 有永絶宗門之罰 陶山道會之日 有難置人類之目 而渠之罪犯 不可以此而止 故今於道會之席 又有用罰 而特書某年某月日事變顚末 某也慫惥 某也作變 某也自引 爲一編斷例 藏于陶山 使後之秉義之君子 有所裁度而是非焉 此亦一?春秋義也 惟彼挾雜樂禍之徒 何敢更爲側齒於陶山 而從事于事林哉 惟僉尊諒察 幸甚
公事員朴海運 進士金泰謨 製通鄭昌成李以謨 寫通李能魯崔潾 曹司孫相燮鄭健和 
同時
虎溪書院 抵硏經道會中 通文
伏以士而尊賢爲道之所存也 故苟其明度斷淑人心者 從而尊之 乃是天理之常也 是以不論在此在彼 惟視道之所存 而尊親之不敢以非己之私 而悔慢之若有所偏立而卽爲忘道之人也 吾嶺自晦退兩先生 倡明斯道 門人之賢者 繼以紹述之 而斯文之付授也 非一二家後學之尊慕 亦無差殊 夫豈有彼此人人之可分哉 此吾嶺 數百年純於一道而無岐貳者也 復何挽近以來 私意橫生 橫嫌大起 文字之古 爭一言之輕重 較一字之緊歇 扶摘於無心 譏誚乎理外 甚至侵及所存 罔有紀極 又挾之以勢利 爀之以氣熖 無復一分尊畏敬謹之意 則豈非吾黨之所痛切慨惋而不能已者乎 蓋自屛虎分朋 積習成來 則亦非一日之故矣 然猶於勢利 無甚機關 而向來葛翁出寃幸賴 當或明心爲之消釋 則吾嶺人事 孰不感服 此蓋相公恢張公議 私非市恩於嶺中也 爲吾黨者 亦當以相公之心爲心 以叔向之不見祈 奠處之分 施之爲有光 受之爲無愧也 夫何一種嗜利無恥之類者 作因緣潛刺之階 以渠納謟媒進之階 謂是全嶺之公議 搖首帖耳 以欺京中稍持本心者 痛心疾首 羞與列焉者也 蓋其情此可惡 亦非誠心於爲相公也 所以士林之會 自成區別久矣 臨川之會 本非所關 人情所惡 不約而同 然至於已甚 則亦非當日之意也 乃若醴儒之擧措 出於有激而然 未必其?況 其及萊令 則乃其誆攘之甚者也 夫萊令之失 在於不能遠嫌 而名位已懸 則非出於顧望 年德已邵 則非覬於?日 而又其地處 乃吾黨之所共愛惜 孰不憤惋而惜乎 士林之公議未發 而子弟之私憤 遽激怒 甲移乙削 絶按藉己 不厭人心 而屛人投機走集 有如赴壑 名以道會 投通近遠 侵辱所存之地 無復顧忌 噫噫痛矣 渠輩亦衣冠之族耳 使其有一分尊信老先牲之心 安敢於尙德祠前 侮慢傳統之賢 若是之無嚴乎 是其忌克所在 實惟屛銘 而惟其不敢致狼於老先生 則凡於尊鶴爺之尊 觸處忿疾 妬婦惡女之肆其惡 而是渠輩之都沒識見之致 亦何足??乎 夫聖師之稱顔子好學也 再云今也則無 而未聞曾子之不爲傳道之賢也 朱子之序大學也云 曾氏之傳 獨得其宗? 夫豈兩序之所存 各有輕重哉 而嶺儒請屛山院額也 疏本出於龜窩 而曰獨得陶山所傳 又豈有厓老偏尊?正嫡 而他賢不與哉 蓋後先輩稱述也 在於同德而地 不嫌於各致其尊 而私不碍過故也 今者見一字之尊鶴爺也 ? 䚂然辭色 噴薄吃喝 無所不至 何其吾輩之爲異心也 況屛銘乃所授乎 鶴爺有不可諱者 今欲言屛銘 而曰?承有何未安於諸賢乎 且夫題板之以字數爲尊賢之等見 則何書生等未知前聞也 渠輩旣曰 知其有等 則愚?題謙菴位板也 故爲僭擬而不顧 何也 常享之以異說爲擅改者 生等 亦始聞之矣 果異則文節公享鄕賢 ?忘窩翁?享祝?奉丹溪書院也 又請於蒼雪翁有二說 何也 今以僣擬忘尊賢之等也 屛人之勇於攻斥人 而?於自中之已例也 誠可悶也 於乎 臨川復享 誠有風波不靜 恨生等爲之怵惕靡寧 亦有此輩之故耳 使其積怒之端 則一道衿紳之齋遬駿奔 亦豈遽出此輩麁暴之下哉 而今反執爲言端 以爲改卜吉日也 則或豈有已安之位 而改卜日改奉安之理乎 其爲欺弄不其大乎 或道雖云彼盜而曾未見向鶴爺 而肆口至此者 豈其有所恃乎 一何氣豪意健之甚也 生等於鄕會之席 不欲太存形迹 歸以獻官之望 而無難迫逐以此 而知此輩之必有今日也 其心以大禮之順 成 爲心內不快事 而醴儒之繼?擧 其設心造意 豈專爲萊令而發於共憤乎 生等又竊有所恠者 自近年以來 屛儒保合之說 有若出於眞心 又於鄕會冒恥忘慮也 頗似自立意 其或能創? 而礭然於本源之地 不能無俱棄前過 包荒共濟之望令焉 憑籍萊令 執以爲言 隱然有歸附一邊之意? 其復令已絶之家累諸當任之人 使夫爲衆所棄者 擧皆趐首暗喜 此是前此形迹 更爲欲掩覆 而有所覬幸推謟附也 是以其忘先趨利之 豈顧於鶴爺乎 生等不欲與此輩 較潔悖通而後 一不何問 而不幸臨院攸鼓之變 出於本孫不得不相會 規正旣正之後 不能不布告於道內僉君子 伏惟僉君子 俯諒而回敎之 幸甚
 硏經會席 此通來到 會員又相會 大邱鄕校 施罰李晩慤 蘇明 金溪 李晩慤 忘祖背宗 永棄人類 蘇明凶牌現迹 罰有餘罪 金溪忘師忝先 自取削罰
山雲抵景山牌
丁巳閏五月初九日
月前本院腏享時 進賜主委參會席 寔在於共尊彛好之誠 而適有鄕麟之鬪 入祠之禮  竟未得行之於定日 當日道儒之觀 此擧措者 就閉戶緘口 亦可也 而事係鄭重意在調停 故道儒 之開諭孫氏 繼發於本孫 無異同出說 而都在於景山之安奉 則有何碍於李氏之瞻聆也 罷會之夕   進賜主迤向他處 旣謁玉山次 拜東江以寓景仰之忱 而彼渠林下里之投牌詬辱 無倫背理 未知緣何事故 而有此悖擧也 揆以顚末 少無體貌之失 而謾受橫逆之來 彼李之凶險 我固知之矣 見人景慕 而便生猜疾之心者 尤不近理 顧念愚老 即我東之先賢也 晦翁之舅氏也 其名位問學 昭載史乘 非直爲吾黨之宗師也 抑亦爲渠林之外先 則爲渠李者 當世講戚好 有過相規 謹守古家遺風 可也 今反怒於甲而移於乙 蠢蠢習氣 自發於悖辭之外 僻在海隅 如坐井底多見 其不知量也 大抵屛牌之辭 不欲碌碌更提 而至如寒冷哺啜等語 似是自道之言 又有公共之論 先賢後裔 已過十世 則其間之爲薰門煖族者 凡有幾人 尤可笑歎 且進賜主之入於玉山也 自有玉山之供宿于東江也 又有江院之饋 二院饋供 俱非不義之食 而一任歸之於徒哺世之慕賢 而尋院者 將安所宿食乎 噫 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