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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원사실(玉院事實)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9+KSM-WM.1883.4713-20170630.Y17501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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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일기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일기
작성주체 경주 양동 여주이씨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길
작성시기 1883
형태사항 크기: 29 X 22.5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3책 278면 중 1책 73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길
현소장처: 경주 양동 여주이씨 무첨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길

안내정보

옥원사실(玉院事實)
『옥원사실(玉院事實)』은 경주 양동마을의 여주이씨 무첨당에 소장된 필사본 형태의 적서시비(嫡庶是非) 관련 일기이다. 이 일기는 모두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9세기 이후 옥산서원을 둘러싼 본격적인 적서간 향전의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향전(鄕戰)이 격화되었던 1826~27년, 1852~53년, 1883~ 84년에 걸친 3번의 향전에 대하여 일기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제1책은 1883~1884년까지의 일기이다. 표제를 포함하여 총 73면이다. 제2책은 1826~1827년까지의 일기로 106면으로 되어있다. 제3책은 1852~1853년까지의 일기로 부록으로 「잡록」이 실려 있다. 총 100면으로 되어 있는데 18세기 말의 시비에 대해서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이번에 정리된 일기는 제1책으로 1883년 7월 15일부터 1884년 5월 15일까지의 기사가 실려 있다. 특히 당시에 감영과 경주부에 올린 상서․소지와 뎨김(題音) 등을 등재하고 있어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이 책은 분쟁 당사자의 한쪽인 서원측에서 서류들의 행위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작성된 자료라는 점에서 객관적인 사건의 전말를 추적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18-19세기 경주 옥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사간의 향전」,『고문서연구』16·17집, 이수환, 한국고문서학회, 2000.
「도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사간의 향전-1884년 <서류사변시일기>를 중심으로」,『민족문화논총』12집,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8.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상세정보

『옥원사실(玉院事實)』은 경주 양동마을의 여주이씨 무첨당에 소장된 필사본 형태의 적서시비(嫡庶是非) 관련 일기이다.
개괄
『옥원사실(玉院事實)』은 경주 양동마을의 여주이씨 무첨당에 소장된 필사본 형태의 적서시비(嫡庶是非) 관련 일기이다. 이 일기는 모두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9세기 이후 옥산서원을 둘러싼 본격적인 적서간 향전의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향전(鄕戰)이 격화되었던 1826~27년, 1852~53년, 1883~ 84년에 걸친 3번의 향전에 대하여 일기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제1책은 1883~1884년까지의 일기이다. 표제를 포함하여 총 73면이다. 제2책은 1826~1827년까지의 일기로 106면으로 되어있다. 제3책은 1852~1853년까지의 일기로 부록으로 「잡록」이 실려 있다. 총 100면으로 되어 있는데 18세기 말의 시비에 대해서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이번에 정리된 일기는 제1책으로 1883년 7월 15일부터 1884년 5월 15일까지의 기사가 실려 있다. 특히 당시에 감영과 경주부에 올린 상서․소지와 뎨김(題音) 등을 등재하고 있어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이 책은 분쟁 당사자의 한쪽인 서원측에서 서류들의 행위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작성된 자료라는 점에서 객관적인 사건의 전말를 추적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상세 내용
옥산서원 내 신유(新儒)들에 대한 동천(同薦)과 통임(通任) 문제는 대원군의 전면적인 원사 훼철 때까지 해결되지 못하였다. 경주지역 신유들은 원사 훼철시에도 남은 서악서원과 향교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옥산서원 내의 향전은 향교 장의 한유종(韓有鍾) 등 신유들이 이를 기반ㅇ르ㅗ 1883년 7월 이후 통임을 주장하면서부터 본격화 되었다.
이후 감영과 경주부를 사이에 두고 양측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당시 신유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미 봄에 이재간(李在幹)를 서울에 보내는 등 사전 교섭이 있었다. 이 시기 향전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전의 향전에서는 신유들의 핵심이 옥산의 서파들이었는데 반해, 이때에는 향내 서류와 여강이씨 내 또 다른 서파 즉 신광면 우각리에 거주하던 오의정파(五宜亭派)가 주도하고 있었다.
또한 이때의 향전은 처음부터 감영의 강력한 의지가 서류쪽으로 기울었다. 감영이 신유 편에 서서 통임을 강력히 요구하자 경주부에서도 이를 따를 수 밖에 없었고, 이에 경주부에서는 옥산서원에 하첩(下帖)을 보내어 감영의 명령을 실행할 것을 독촉하였다. 신유들은 이러한 감영과 경주부의 지원하에 당시 '집사분정에 옥이(玉李=서파)를 특차하라'는 감영의 제음을 내세워 곧바로 자체적으로 새로운 임원을 선출하고 나아가 본래 있던 원임의 향알(香謁)을 막고 그들 스스로 분향을 거행하였다. 또한 10월 15일 향사에서는 병설(竝設) 또는 번차(番次)를 주장하는 등 서원 측을 계속 압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에 의해 서원측의 도색(都色), 수노(首奴), 도장무(都掌務)가 착치(捉致)되기도 했다.
신유들의 통임 주장에 대해 옥산서원은 옥산의 서파들에게는 서원내에서의 그들의 공을 인정해서 이미 수집과(首執窠) 1~2과 외에 1~2과(奉香, 奉爐, 判陳設)를 특차(特差)했기 때문에 더 이상 양보할 수 없고, 특히 이번 향전의 핵심인 여타의 신유들을 옥산의 서파들과 동등하게 특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서원측은 한편으로 이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계속해서 원유(院儒)를 감영에 보내고 11월 5일에는 감영 아래에서 도회를 개최하는 등 설득 작업을 펼쳤지만 사태를 반전시키지는 못하였다.
이 향전은 다음해인 1884년 2월에 신광면 우각리에 세거하는 여주이씨 내 또 다른 서파들이 대거 가세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2월 11일에는 이들이 서원이 난입하여 폭력을 행사한 것이 문제가 되어 주동자 3인이 착수(捉囚)되기도 했으나 다음날 바로 방면되었다. 이후에도 서원측에서 계속 이들의 잡아 가두길 요구했으나 끝내 실행되지 못하였다. 본 일기에서 나타난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서간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된 것은 1884년 9월 이능모(李能模)의 상소이다. 이 상소에 대해 비지(批旨)에서 "이같은 폐습은 진실로 해괴하므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고 조처하도록"했다. 여기에 당시 감사였던 조강하(趙康夏)가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마침내 공식적으로 서얼에 대한 소통이 허락되었다.
이러한 옥산서원에서의 서얼들에 대한 원임직 소통은 이때까지 한 지역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던 영남지역 내 각 수원(首院)들에게 영향을 미쳐 이후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등 각 서원마다 심각한 분쟁을 야기하였다. 이처럼 『옥원사실』은 19세기 후반 옥산서원에서 있었던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서시비의 구체적 실상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또한 당시 조정과 지방관아의 입장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어서 영남 남인계 서원과 노론계와의 입장 차이도 확인이 가능하다.
「18-19세기 경주 옥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사간의 향전」,『고문서연구』16·17집, 이수환, 한국고문서학회, 2000.
「도산서원 원임직 소통을 둘러싼 적사간의 향전-1884년 <서류사변시일기>를 중심으로」,『민족문화논총』12집, 이수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8.
1차 작성자 : 하창환, 2차 작성자 : 이수환

원문 텍스트

옥원사실(玉院事實)
玉院事實
相巡。趙參判康夏。
本尹。金參判元性。
▣▣本院新儒之變。由來漸矣。前後顚末備載彼時日錄。而自己未以後。數十年餘牽補以過。保得靜謐矣。不幸數年來。先生庶裔之居覺里進士在榦。敢生狀分悖理之心以生事。本院之說傳播流聞而事甚無據。聽之泄矣。七月十四日都色告目內。杜洞韓掌議有鍾來到院中。曰鄕儒次第追到云云。曾所流播之說。必是作鬧之漸。齋任能任上院。
十五日。晴。
香謁。彼輩所謂鄕儒六七人。乃發通任同周旋之說。以斷不容移易之意。略有酬答而還。
二十一日。晴。
僉議院。將有事。在我措處之道。不可無一番鄕會。乃發文回諭于廣北各處。
二十三日。晴。
旣以院事定日。爲鄕會之擧。則面陳事由於首席。已有規例。且合事。面齋任卽日入府首席本官金元性。
二十四日。晴。
聞新儒呈官題。以待院中。公議向事。狀本未得見。
二十五日。晴。
鄕會于本院。新儒數人亦來會。公議以爲院力近甚凋弊。而又當灾歲浩。提供。億不可如前支下。完文揭壁。自兮切禁焉。
二十九日。或陰或晴。
新儒其有因朔香齊會之說。則齊任之如前獨往。恐非應變之道。故多員齊進。
八月初一日。晴。
香謁臨發。聞韓有鍾自營門直下過院門。而前言曰。營門題關已下本府。會院諸員可留待官下帖云云。答以若如是。則從當有都色輪告矣。何必留待爲也。遂發還。齊任自院入府。儒生一員能晟追後。又起送于府營門趙參判康夏。
初二日。晴。
官下帖及彼輩呈營狀題與關文來到。齊會宗堂。相顧愕然。盖關辭題意之切嚴提飭。有若渠手中奪出者。然職由在榦之春間京行做出。何許機括於營幕邑冊之間。致有今日之禍者。尤極痛惡。渠狀未得見。狀題。疏鬱伸枉。卽朝家一副苦心盛念。用人之際。無有彼此之別。則獨於院宇。執抑不悟。甚非對揚奉承之意。自官另諭院儒。俾卽許通。與共涵泳於棫樸菁莪之化。于以咏先賢薰陶之德。亦足爲興起之助向事。
本官下帖。府尹爲相考事。卽到付巡營甘結內。玉院薦錄之是非靡定迨今。幾百年于玆矣。曷勝歎哉。盖夫疏通一款。列聖朝前後勅敎。不啻截嚴。况復國制一新。用人無方。內而請顯。外而閫鉞。無碍通用。梓歟盛矣。而奚獨校院之任。有何防限。且於此院。尤有異。爲刱設斯人也。後裔斯人也。使斯人而不得升其堂而叅其享。斯人也。含憤積鬱。其將何如。撫古恩今。豈有是哉。實非俎豆先賢樂育人材之意也。踰嶺以前曾所聞而慨歎。今見多士之抱狀來訴。尤不當闔眼襲謬。玆以發甘爲去乎。到卽曉喩院儒。無敢沮戱講會。膠塞院任是矣。如或復蹈前習。起閙作梗。自本府指名論報。以爲大懲之地。宜當向事。
入府兩員。乘昏出來。見官梗槩。官無擔處之意。專事後諉之於營門云。可歎。
初三日。陰。
呈士林文報于官。自我對擧。卽次第事。而營府行經費有難。卒辨不得已收議。自門中諸家。引貸多少數。爲先調用計。彼輩所謂牌旨來傳。而還逐之意。下牌都色。而原牌逐送。彼牌都色付券。望新有司主次將設公矣。舊有司主呈單之意。告于上堂爲可。都色處如此。無據之牌。豈可謂牌而有答無答也。此後更不來納爲可。
初四日。雨。
營關辭意煞有偏聽膚受之歎。思所以面陳院規顚末。及彼狀搆證之端。而冀或悔悟。容久乃赴營下。是夕彼輩所謂會中牌旨來傳。轉爾跳踉。無所顧忌。一至此哉。牌辭都色付汝。所持來之牌。未知出自誰手。而辭甚無據無足擧論。至於有司主之辭單。罔知營府鄭重之令飭。尙欲冒據者。尤是無據。則何待辭單。且享禮迫近更券。新有司主此意。告于鄕中各宅爲可。玉山會中。
初五日。雨漲。
又追送一員。邁久。於營下文報題音出來。文報草云云。
伏以本院。 卽我先師文元公晦齋李先生妥享之所也。遵奉古規。謹守勿失。且將三百年之久矣。前後列聖朝。崇將衛護之典。出尋常萬萬。雖有外間風色。起於不起。營題府敎。不啻嚴申以指。近時。則壬子癸丑間。金府南府公。別有勑斷後。波浪稍定。塵埃不撲。而望朔香煙。請以升享矣。不意前月望香之席。更以許通同周旋等說。微微窺覘有若掀。恐有若苦懇是去乙。民等以三百年院中故事。有退陶先生一定之規。三叅之之觀。移易他不得。轉注他不得底義。懇懇開陳。冀或曉悟。而今伏見營門題音行下帖。本出於萬萬所未窺慮之地。駭惶顫汗。亶不知何由致此也。營家聽聞。未知何處。出入眩惑。未知何人。而偏聽之地。恐涉膚受。至如不得升堂。而不得叅享云者。尤其萬萬無據之一也。原來享禮時。首執事一二窠外。未嘗不與同周旋矣。至於尋常聚集。則或香或會。而隨來隨接。不有間隔矣。至於書院刱建。則有朝家。有方伯。有州家。有鄕道士林。院藏往錄。班班可攷。是可誣也。孰不可誣也。且以朝令言之。癸未事目。只及於仕路。而不及於儒宮。壬子榻前定奪。只及於院傍。庶孫之別給廟內一窠。而一窠之給久矣。則聖敎之不爲不奉矣。後裔之不爲不念矣。幸我城主閤下。益在首席尊。漸勤護之道。不下於多士之心。玆敢齊會。仰禀伏乞。據實論報。以爲勿毁古規。俾保賢院事云云。
題營題。截嚴。惟當奉行向事。
初六日。晴。
南川漲越。鄕儒之可來叅會席者。有難趁期通涉。故門中南行。不得已停退。而騎率五員。爲先船路入府。新儒券任後。文報題。院任不必燥燥向事。
初七日。晴。
門中諸員。或騎或步。就船路齊進。英齋會員百數十餘員。跋涉水國。無有先後。可見秉彛所同。鄕儒二十七員。午料八分。朝夕料一錢二分式。此後會集。皆此例。
初八日。雨。
設鄕席于英齋。議呈鄕狀于本府。狀頭孫永烋李在斗崔昺壽。狀曰。
伏以本鄕之玉山書院。奉先正晦齋李先生文元公。不但鄕之人士之所知所尊奉。而崇衛之地。國以內紳笏冠木之倫之。咸一爲尊尙而不貳地也。爰自刱立初。 揭白鹿之講。鐫退陶之規。以講以薦。精而又精。難而又難。備觀妻外本三叅。以洞主之。以任司之。劃爲規例。遵作儒林家一副。世守死法。三百年于玆矣。間有波盪。不無哄閙之生。於先生庶孫之居在院傍者。而幸賴前後邦君。出義扶衛。雖或有營家之繆。被听聆失照關敎之時。而申爲論報。嚴加沮斷。俾完俎豆。載在院秉至今。爲院儒者。循名拊摩。而歷誦之曰。某侯時如此。某侯時如此。夫窮居守素之儒。固不足有無於時。而林下公共其亦永有辭於千百世矣。斯久重屯。先生庶孫輩歐引若箇鄕新。號爲呈。營中作。何許機括。而得下關題。如渠自意。如渠自言。雖使自渠題爲蔑。有加益也。民等窃壹駭惑。爲營門。苟或叅照事狀之斷。有不然之一二分。則必應無關。下之如始理 是其繆聽偏奸。無人以陳牖之明的甚也。嗚呼世道日汚。風綱日苟。士而尊衛先賢先師之不逮古昔。猶爲主敎之所憂慨。况乃以孫而欲奪祖院。以孫而欲不寧祖享。彼庶而孫者。獨不以孫爲心乎。我國之防閼新儒。民等亦謂之爲新儒。爲抑鬱亦人情也。而其於國俗通然。何就以先生庶孫而言之。其光世勳業。宜若不能無少有差殊於凡他庶孫。而此自周公之盡職。初不爲子孫市勞計。則又不可以此而有說於祖先書院矣。是以退陶老先生。當日講定三叅之規。各無一言於及彼者。豈以其時代數愈近而待之。愈疏而然所。豈不知彼之爲寃。而彼故如是而然耶。又豈大賢君子度情裁義之意。有不及於後人所見而然耶。誠以儒先之奉體貌。有在士林之所名號。有在私不可掩云云。不可施私也。至如食饗會聚。則無間一座而一堂。又享禮時。則廟內周旋。未嘗不與之一二窠以同駿奔。而不知今玆何如入言於營門。以瑩惑營門之聽。而得出營關。如是無觝滯之爲也。大抵李先生庶孫而使先生書院。而不得淨妥鄕會而道會。而呈府而呈營而至于今番。而不知幾度而幾次。院力蕩然。今且秋春供享之支下不遣矣。彼玉李者。心自以爲我雖新矣。而我豈若一例名色鄕新之彼哉彼哉者乎。我豈若一例傍出逝新之彼哉彼哉者乎。而特以糾合同聲。藉以前茅者。一以爲收斂經費之資。一以爲隱藏首惡之名。而其心豈眞欲與之終始哉。彼愚不知計中墮計。以營題爲得得。以府敎爲無何。浮動。風聲出爲響箭。自渠爲會。自渠券任。謂焚香爲自爲。謂享禮爲自爲脅。單首席在之有司。肆然投牌恣撗。唯意是由迫遞城主也。院中体例轉有引嫌。故有司所使之下人。有不得輕加責罰。况城主首席之下。彼惡敢彼惡敢。其意必謂營關有好之無恐。而城主京宰。不嫺儒宮体禮而以爲是也。民等不知他日民等之指名報營。惟在我城主奉行關題之如何。而至如不有院体。不有地主之如此無嚴憚極悖乘之亂民。獨不可以自城主有別般懲治之道乎。年前轍院時。令甲以所在地官。爲所在院主者。豈不以是厲此類地乎。城主爲院長。凡於院中大小大事。必稟城主。總知今於極變存亡之秋。而一院生徒之額手戴望於城主者。固知城主之衛先賢。爲賢院之心。有不下於院中生徒。而猶不能聞變安坐。奔走跋涉。不分潦漲。齊伏公庭者。民等雖肖翹末陋。貌不足以動人。言不足以槩人。而猶是先生之鄕後裔一片死守之心。以爲此世上有時。此書院有矣。此書院有時。此規劃有矣。此規劃有時。民等雖一箇半箇餘有。亦一半有時。移易不得。轉遷不得。今者營關。雖或有堂上千里之遠。而諺曰。一令惟城主。是時是仰。無任支煩懇迫之至。
題聯單覽悉。而營題旣截嚴。官不可擅便向事。
會員皆冒雨發還。而主人家蕩空。非責應之道。故五六員留宿焉。
初九日。陰。
院隸自營下還。見寢卽君書。營意似有回悟底意。未知下梢如何。而稍可寬心。昨日鄕席敦議。議送而去員李能耆。北權宜奭。南李圭一。次第治發。南邊去員自南治送焉。狀頭李能章權宜奭鄭益儉。
初十日。陰。
齊任以享酒看釀次上院。寢卽君自營下還侍見。營梗槩與書意略同。久後都色告目內。本村諸員圍迫有司。沮戱釀酒云云。
十一日。陰。
又文報于官云云。見今享禮斗迫。而齋任以享酒看釀次入院。則彼輩十餘人攔入院中。圍迫齋任。齊聲大言曰。新任自在爾。何敢釀乎云。而恐喝無比。沮戱百端。莫重祭需。將有不及時之慮。玆以仰稟于首席下。特下嚴敎一以懲作閙之無忌。以一安重享之及需。千萬祈懇事。題。院儒之通不通。不在於祭酒之釀不釀。而以此生梗。甚非士子之道向事。今望日節祀。收議停闕。
十二日。雨。
望香之席。必有彼輩作閙之擧。齋會應變之意。回諭南北各里。彼輩所謂新券任辭單。則珏進宮家。得下封還字。而乃以行公之意。投牌都色云。院體官政。寧有是事。歎咄歎咄。新任牌旨。當此携貳之際。不可冒任行公。故日前呈單矣。百官旣有還單。則體面道理。不可無一番行公矣。以此知悉擧行云云。溪亭牌旨(?)。新有司主辭單。自官敦請矣。行公時。依例等待云云。彼輩日昨呈官。而更爲呈營之行云。 官題。今此院任創始通瀜之際。慮不無一二人沮戱之弊。 若爲修好云云。 狀本未得見。
十三日。晴。
齊會宗當日午。杜洞權宜奭。自營下還。營題雖不嚴快。而可見其悔悟之意。鄕中呈營狀。
伏以國有學祀先聖。鄕有院祀先賢。亦興善物正禮俗之一治也。視都知野。則據學知院矣。而其規模節次。夫豈苟然而已哉。本州之玉山書院卽先師文元公晦齋李先生妥虔之所。而院規卽退陶老先生所講定者也。我國書院之設昉於順興之紹修而繼。而有玉山。有陶山。而一省額院。遵式此規。况本院則李龜巖公楨知府時。以薦士節目。稟定溪門者也。先生嘗以"中人庶孼。雖大小科。勿許濫入。" 十二字手自書鴈。特揭於薦士錄首張。而薦法則以己叅外叅妻叅。三叅爲截嚴。行薦。則以赤豆黑豆而心存稱衡。手加輪栍。其難慎也如是。薦畢則又講家禮子傳等書。其鄭重也如是。此其大略也。噫。此院爲何院。此規爲何規。而使此院而不得爲院。使此規而不得爲規。必先生之孫。在宮墻密邇地。而盤據一壑。名世以玉李者也。彼以其名之故。而自懷憾恨。凡於講薦而香享。而沮閙百端。呈府而呈營。而搆誣千變。生等亦苦於應接矣。今者窃伏見鄕狀題音。幷到付關帖。生等讀之未竟。顫汗潑身不知。所謂今不見彼狀。生等不能逐條億辨。而就以閤下題關。而發明之薦錄也。已上陳之矣。至如刱設斯人也。後裔斯人也。不得升其堂而叅其享云云。閤下于誰聽聞。而遽然有是敎也。生等請片言以白之。本院創建在隆慶壬申。而潛溪公之歿在戊辰。則宲(實?)建院前五年也。許草堂書院記曰。府尹李公齊閔采鄕十三之願。告于監司。請建書院。躬卜基址。出庫餘以主費。鄕老儒士亦多出力。其年十月。自朝家劃給田民。又方伯地主往來別星。旁近守令道內鄕內士林出助。院錄今昭昭。彼惡敢厚誣其祖。沽功先院耶。至如升堂云云。則又胡其然也。凡有院中文酒儒會香享禮饋。而食則同列。言則同座。不有間隔。而猶自因事。風生咆哮作力。有勝於本孫原鄕之爲儒者矣。至如參享云云。則生等亦不無別其待之心。而自正廟聖敎後。尤有所異之也。廟內一二窠。未嘗不與之同周旋。則聖敎之不爲不奉矣。後裔之不爲不念矣。然則閤下今日之帖。生等前者固已先令而施行之久矣。 又曰。國制一新。用人無方。校院之任。何獨防限云云。生等又陳之。生等僻在海隅。去王城千里而遠。誠不知有何疏典之一新如何。而至於仕宦。則用人以門地。本自拘狹。惟其才無方。猗歟盛矣。而儒宮段非才能地也。非器局地也。惟門地是觀。使才如管葛。器同殷謝。而有參不足 則非院儒也。使枯談寂寥。死法無味。而叅爲三具。則是院儒也。仕之疏顯。何關於儒之毁規乎。若曰仕以準儒。而儒不準仕以爲罪。則生等抑不知今使爲院儒者。而珠絡其纓。瑁飾其簪。出入院中。曰以準仕乎。則閤下必不之謂無傷矣。而不以罪也。若是則宜與夫前之罪者。不有反乎。儒有儒法。用之于儒。仕有仕法。用之于仕。何得相侵而相視也。且有一言較然者。今閤下所呼使下吏。其中亦必有當吏與不當吏矣。不當吏而必欲使任當吏任。則爲當吏者。必死不許矣。爲是死不許。而又訴之于閤下。則閤下之聽是也。又將曰。國制一新。汝輩何得守舊膠固也云爾乎。雖復云爾。而其爭也不息終。不能歸正于閤下之敎。則閤下又當盡杖當吏。而一進其不當吏而任之乎。孟子曰。擧斯心。加諸彼而已。閤下請度之。又以他院而證之。栗谷之石潭。南溟之德山。彼皆承嫡之孫。而猶不聞混錄而通同任之矣。又不聞自營家處置而區劃之矣。如禮安之陶山。安東之屛山。玄風之道東。其邑其鄕。豈無其儒。而實未有混錄而通任之矣。又有自營家處置而區劃之矣。有一於是。而生等若牢守不許。則謂生等爲固或可。謂生等爲拗亦可。而閤下試思之。何獨於生等之州。生等之院。而使之通。使之不守。而又威之以罪乎。彼亦儒也。生等亦儒也。生等固不是不如彼之儒。而一鄕兩院而彼據西岳。一鄕首善而彼據校宮。餘一玉山。而又欲玉山之。生等是何儒。而必欲無一於所歸乎。嗚乎。彼道流禪釋工伎倡優。各有其徒。各有其法一定。而不易世守。而不失以相法法也。今生等生先生之鄕。而誦先生之言。服先生之敎。升先生之堂。衛先生之道。思以一體貌。而不爲何於先生地。一規劃。而不爲何於先生地。死守三百年。遵行古規。以周旋於數畝宮壇之地。起曠慕於往躅。遺懿範於來學。於事何害。於典何誅。而今有指名論報以爲大懲之敎。生等之言今日而索矣。渠輩自題敎得來。揚揚入院曰。吾事濟矣。吾事濟矣。一邊作會。一邊開席。券出鄕新任。脅單地主下有司。恣撗無憚。焚香曰自爲。享禮曰自爲。是可曰衣冠類乎。是可曰先生裔乎。儒之於儒。以言相詰。猶曰不可。况復爭而奪之。生等旣不能舌競彼。又不能肉薄彼。呈之于官。而官不可。號之于營。而營不聞。則生等於此。復何爲哉。祗當相率。而向院拜辭先師。退伏杜門。以自訟其不能保守賢規。無所依歸以終身也。自爲憂。則誠如此。而猶復爲閤下。不能無私憂。而切切然慨惜之者。閤下黑頭。擁節延譽。一省歌頌載路。而一受偏辭。偶失照勘。使一邦人士。獨抱向隅之歎。則有菀棠陰不瑕。有何於淸光耶。所以然者。生等七十年苦心血爭之餘。牽補到今日。罔非賢生梗之弊。
當指名報營。以此知悉向事。
夕後。上村五六人來見。復申通任之言。牢却而送之。聞所謂彼輩新任權也至也。日里堅臥不到云新任權必煥。
十五日。晴。
香謁後。次第發還。而以八日。更爲齊會之意。敦束于各里諸員。
十六日。或陰或晴。
聞彼輩將以明日會集于溪堂。未知做何機括。而自爲敦事之地。慮或因望香之無事。而各懷懈弛之心。故復申前論于現北山內各里。
十七日。雨。
典祀官今當有事之時。不可以昧事。年少備員而已。入送能琦。
十八日。雨。
老少諸員。冒雨上院。午後設公事席。都執禮李在璜。亞終獻權致馹李敏久。彼輩中孫星煥辛宗海本村六七人來。中前言而不至大段咆哮。諸般酬答。不須盡記。夕後。本村四五人來。言判陳設。不爲叅齊云云。滿座只以安享之說撫摩。好辭而送。
十九日。雨。
到記合二百五十餘員。鄕儒三十餘員。彼邊會者。至近四百人云。而裏面的未知。且不留宿於溪亭而於別廟與洞舍者。豈以自中論議不合而然耶。
二十日。晴。
享禮利行。彼輩又以營題得來之意。往往揚言。或剽誦斷句。而終不出示。還涉怪訝。
二十三日。晴。
官下帖來到云云。孫星煥等意送題音。內搆與排互相。不知止。何意詩禮之鄕。有此觝角之習。而因院儒之來訴。有所題送。而今此狀辭。又此一切反是。未知孰是。盖此院規薦講之不行久矣。所謂入格叅於儒林之席者。未知有何定條也。今於上自朝廷。已行疏鬱之政。則以不講不薦之院規謂之定例者。又未知其可也。先從溪亭門中特差。以爲次次疏通。如或曰不然者。亶出於阻敗違背之風。此則當有所別般措處事云云。前到關辭。如是鄭重。今下題敎。又此申複者爲奉行。斷不可已。依此奉行向事。原狀未得見。
二十四日。晴。
門會于宗堂。此後應變。未知稅駕何地。經司之道不得不料理。乃以昨年門契。久收斂分撥十一等。上自三十兩。下至二錢。式收議排定。
二十五日。晴。
彼之營題至。有不堪承當之意。則對擧辨明。斷不可已。起送邁久議送焉。聞彼輩以營題中。先從溪亭門中特差之意。呈官題曰。日官券任不如。院中公議向事云。
二十八日。晴。
營伻見還而狀題。不惟不摸糊說去。煞有右袒底意。人心之反覆無定。一至此哉。良覺咄歎。呈營狀辭。
伏以今玆生等。又不得不抱狀明籲。而狀無有加之辭焉。前狀卽今狀。則前題必今題矣。而又不能以是而恃。無恐者彼題而窃感焉。天下寧有兩是之不分誰是。而是其所非。而非其所是者哉。孟子曰。 是非之心。人皆有之。又曰。邪辭知其所離。遁辭知其所窮。閤下兩聽之。誰邪誰遁。誰非誰是也。彼狀題敎。到付關帖前。而生等固已聞知於彼人矣。自彼中窃窃然剽喝。日誦而增。營題如是。猶復沮格之。恐之脅之。一倍升騰。一有不可於渠言。則日營題不行。朝令不奉者。亂民也。逆賊也。衝口醜詆。不揀齒髮少年勁悖。環而圍之。扼之毆之。僅塞拳踢。名而其實有浮焉。如此風波之中。幸賴我閤下題敎。享禮僅得享過。而不可以安言矣。噫名爲儒也。而其爭也如是。而求與之辦者。生等固其非矣。院事顚末。生等前者。固已面陳之這這矣。狀白之縷縷矣。閤下言敎之旣有矣。題下之亦有矣。閤下心下。豈不白黑之先置。而以待愚生之煩複者哉。誠以大同融混。疏鬱和光。爲一切酬世方便治務也。其亦盛德事矣。
而閤下曰止則止者也。而閤下以不止之。閤下曰不可則不可者也。而閤下以可之。是猶欲其融混。而反以激乖之。欲其疏鬱。而反以塞抑之。使是非環中。而無所端倪也。格言曰。懸之錘以一諸司命。今閤下其不爲是非之司命乎。彼題有曰。薦講不行久矣。入格叅薦未知何所正條云云。 閤下言下所歸。生等亦豈不知也。薦講不行。又誰之使然也。薦講之行。不得入格之代。以薦講者。以其學禮之有講。而據以爲時措權宜也。以入格言之。叅不足者。元不擧論。此亦老先生出於薦規中選叅一例也。生等亦非謂金科玉條而奉以周旋爲也。然勿論曰講曰格。建院來三百有年遵而行之者。期欲一朝焉而必破壞之者。生等窃以爲閤下之不宜其然也。朝廷以爵祿操爲柄。以貴顯人。而士也何操焉。惟名是尙焉。名之所尙。雖彼勝而此不如。不以此而同乎彼。固士之情也。况此勝而彼不如。而必欲使之一同之。則其爲士者。誰欲行之者哉。朝家之疏。鬱自是盛典之美意。而猶之盛典也。彼鬱而疏者。獨何惠之。此伸而抑者。獨何寃之。士之膠滯。士之病也。區區道素之流。抱空器於一方。閒界容興乎。禮云禮云。不知其爲觀風。必察之地。而亦不知爲傷風。必按之罪也。闐玉之爵而飮酬一失。則反喜爲怒。童子之鷄而市野一定。則化競爲沽。故曰物有不名。爭之者誰有哉。名有不定。守之者誰有哉。今閤下之敎。曰先從溪亭門中特差云云。閤下意下。生等亦豈不知耶。嗚乎此需世大君子盛德至意。欲其曲遂傍達之。無一不獲。而藹然於辭旨之間者也。聖考傳敎又不有之乎。所以奉香奉爐之特其差矣。判陳設之又其差之矣。閤下之又欲差之也。將以何之必欲使差之不行者而行之。則使之息爭而不幾乎。助之爭乎 又曰疏次次通云云。讀之未半。不覺心寒而膽墜矣。溪亭猶或有異。而至於附溪亭而欲溪亭者。皆可溪亭之乎。 又於自同鄕人之於溪亭者。皆可溪亭之乎。以新爲名而無人不通。則年前事目中。亦存階限。果安在哉。閤下一題。而噫彼孫星煥辛宗海韓有宗輩。番番作頭。嘯聚恐喝。無所不至。生等之被他守。不得賢院也。生等亦已知之矣。官家而必使之不守。營家而必使之不守。則營官之下。寧有一丈夫。立於門者哉。勢將自彼而長貳之。自彼而禮祝之。無用乎生等之特差矣。而雖然生等有所受之矣。今不可以自生等私以授與。當徧告鄕隣。徧告道內矣。自閤下奪而與之。猶或爲生等。籍有辭於先師先父歸白他日。而生等區區前日之望閤下於先生之院者。窃喟夫終始而不能保有也。
題前後題關洞見。城府無有餘蘊。又此持難。未必曰亶出於公心。則營亦有處之之道。苟能自反。則庶或有萬一之覺向事。
二十九日。晴。
彼輩略而人來到院中。稱爲設公。而所謂有司本村李芝材鍾壽云。
三十日。晴。
午後。老少齊進院中。到記合八十餘員。夕後。李芝材稱有兒憂而出。餘外人稍稍踵起。可見其自退之意。
九月初一日。晴。
香謁後各歸。覺里在謙出不道之說於稠座中。相顧瞠。齊聲大喝。當場風色甚不住。
初二日。晴。
昨日在謙之言。斷不可置之不問。而已聯名投書於覺里。寧海(?)言僉座。近日從事道不得寒喧。棣事聯重。所望節非爲溯。自別前後擧措。固知荷祖而出祗。看終爲。爲何然。昨於香會之席。在謙族至。以不道罔測之說。公恐於衆中。世爲何說。而肆諸口敢爾也。呈以在京者。有而懷白搆之計。逞赤戮之禍哉。有說則無說。無說則有說。願一相對。聯上庠若而來何如。萬萬留對。不宣。
初九日。晴。
覺里進士能模來言院事。不惟不遜辭謝過。適所以添辱。可痛可痛。
十四日。晴。
齊向院中。各里會合四十餘員。轉爾解弛。沁泄疏爲。慨歎彼輩升騰聲勢。 認是乘虛。而今番則生事必矣。因冒昏委通于江東西各村。
十五日。晴。
鷄鳴後。各里之聞奇追到者。三十餘員。曉頭彼輩圍匝咆哮。極涉危怖。廟直才開廟門。而未及告行之前。李鍾壽以所着道服。袖出儒巾。挺身徑入。自謂已焚香出。雖據理曉責。而所謂不可以口舌爭者也。彼少年等。因自鎖神門。手戞廟直。囚置上村別廟矣。本任將香謁。廟直招致。而不放送傳喝。而因牽執使。不得擧行。竟闕香而罷座。變至于此。寧欲無言惡惡。是日文報于官。
伏以本院閙端。業已仰悉於前後狀帖。而不意今日望香之席。本村李鍾壽稱以朔香前。私券有司及其廟直。擧行之前。不着齊服。挺身徑入。自謂焚香。民等據理曉責。而本任拼依禮。上香之際。自鎖神門。牢執廟直。使不得擧行。而致此闕香者。卽建院後所未有之變也。何念我城主閤下莅在首席乎。日崇衛尊奉之意。實不下於多士之心。則必有所以嚴戢糾正之道。爲敢齊聲。仍懇特下嚴敎。俾存院體。以正士趨。千萬祈懇云云。
題。俱是同祖崇奉之所。則因當禮讓周旋。而如是相持。豈非貽羞士林乎。不勝慨歎。向事。
齋任依例。呈草于堂中與首席。席封還。
十七日。晴。
聞彼輩以焚香事由。亦文報于官。題。覽悉云。
三十日。雨。
午後。數十員冒雨向院。泥濘跋涉。勢難前進。皆停滯于倉里。獨齋任與悔率二員。直抵院門。彼輩聚黨。先據堅鎖院門。拒而不納無已。急通于後行矣。諸員追到。亦無如何。又禁支供。主人毋敢設施。夜深後不枝。已往院村族人家炊飯。饒飢之際。彼輩數十人。突入內庭。狀碎盤皿。使不得供饋。彼輩之跳浪無忌。駭悖至此者。直一亂常之類也。卽夜文報于官。
伏以民等。以明日行香次。冒雨到院。則彼輩充匝面院內。撑鎖院門。攔拒不得入。咆哮作勢。悖喝無忌。至使城主首席之敦諭任司。而不得窺院門一足。民等旣不能如渠輩妄作奉破院門。又不可踰垣突墻隳損體貌。不得已姑爲退。點私次。則彼輩又得禁供饋。又不得已移。使設施於居近族親家。則比其方食。而渠輩又或人。突入內庭。持杖打碎盤皿。粉薤飯羹塗地。自院有鬧。牒報城主。今不知幾度。而如此極變怪。大駭悖。古所不聞。今亦初見。彼輩中作魁者。李種壽李在謙孫星煥辛宗海。捉致法庭。以爲嚴懲。息鬧之地云云。
題。揖讓相敬之地。有此乖當之擧。還豈士子之行乎。聞甚駭歎。從當有査處之道向事。
十月初一日。晴。
闕香諸員。卽入府。呈文報告變。文報左右以直日鄕會龜岡之意。回諭于各門。
初二日。晴。
又文報于官。
伏以民等之昨日呈報。卽本院事變中一大事變。則窃以謂爲今日城主地。以院則洞主也。以官則法司也。合有所洞懲嚴勵之道矣。反伏承從當査處之敎。民等尤不勝痛鬱。所謂士林文報。寧或片言半辭之搆虛餙無。而城主意下。不惟無懲勵之是嚴是急。反此致疑於民等之訴者。無乃使彼輩長其跳浪之習。而遂其怙終之科乎。題敎有曰是豈士子之行云云。城主旣知非士子。則卽可以亂類處之。更何有可査之端乎。盖此而不問。則法無所操用。鬧無以就息。昨報中李孫辛等。期於悉校捉致。嚴加懲勵之地云云。題譯曰呈單有若官民相持者。然還切慨然。
本事當有措處向事。
鄕會于龜岡影堂。通諭于廣南各門中。伏以本院近日新儒之變。卽吾林之一厄會也。前此事槩而已。悉於英齋會席。而今月朔香。又招引徒黨。前期屯據於院堂。堅閉院門。分隊防塞。咆喝之陂辱之。而末乃捧杖碎盤。絶其供億。使舊儒爲名者。不得投跡於亦樂門外一步地。是此有院後。所未有之極變怪也。事到此境。不得不遍告鄕道。爲齊聲苦討之計。而事出不意。遑遽無措靡暇。通告全鄕。趁其日。先自北齊會龜岡。以來月初五日。定會于營下。伏惟僉尊趁期齊會。以爲爛商同事之地。千萬幸甚。
尙在初一日。條通諭道內各校院及壇所文。
伏以本院新儒之變。卽吾林一厄會也。遠邇驚惋。聽聞喧騰。道內僉尊。亦必稔耳。而憂歎之矣。賢院有變。同室相告。則合宜隨變。通告於道內僉尊。而積苦愚慮。猶或以謂無中風浪。自起自滅。則終當無事於通。而所以不通者也。到今事變層生。愈出愈甚。玉李中一二。不逞之徒。瞞訴營府。圖得疏通之題。招聚鄕新幾許輩。迺於八月初。看(?)結黨。攔入於求仁堂。稱以公事。自出有司。圍匝神門。使本任不得行香謁。而渠所謂有司者。無廟直。自開廟門。攘行焚香已。是一變。而又於今朔香禮。招引無賴百餘名。(?前)期屯據於院堂。堅閉院門。分隊防塞。咆喝之。致辱之。而末乃持杖碎盤。絶其供億。使舊儒爲名者。不得投跡於亦樂門外一步地。此是有院後。所未有之極變怪也。噫本院自丙丁以後。六十年之間。不知幾番哄鬧。而當賴道內公議之一聲齊討。前後營府之尊衛至誠。至于今保守不廢。而不幸今日彼輩之氣熖萬倍。無所忌憚。盡圖溪山之中。塵埃撲地。靜謐宮墻之內。歐辱逼人。將使鐵案院規。一任於此輩手分中壞了。而四百年保守重地。終委於蓬蒿荊棘之場者。豈非世道之寒心。而吾黨之痛泣者哉。到此地頭。合做底所當爲者。惟是闔道齊籲於布政司前一事而已。爲以來月初五日。定道會于營下。以爲爛議商確之計。伏願僉尊趁日齊會。先誅生等湔劣不氓之罪。克敦大議。冀挽營聽之地。千萬幸甚。
門中與溪李酉權氏兩門中僉座書際。蓋落落第有瞻耿。伏惟小春僉體作止。崇護仰溯。不任弟等各個茸散。不暇身上言。而近日先院。新儒作變。至於曠香數次。三百年奉守舊規。今且被他壞破盡矣。今以作會營下。文告道內尊門之於此事。何待鄙忱之私暴之。猶復云爾。亦出於世。以相靠地耳。
初三日。晴。
又議送呈門狀。幼學李玉祥李在璜李能立等。
伏以生等先祖玉山書院新儒事變。面稟之狀訴之不一而不二矣。向伏承洞見城府之題敎。感誦大君子包含之盛德。而今不敢恭竢。究竟復事煩瀆者。以變怪之愈往而愈甚也。彼輩氣焰。忽地增倍。攔入求仁堂。圍匝神門。深所出有司者。不着齋服。不須廟直。潛入謁焚香。而又於今朔。招引無賴百餘。前期屯據院堂。而四鎖院門。每門分隊設燎。捧挺以守之。使名爲舊儒者。無敢一迹近側。致逐日官敦運之有司。少不憚忌。又於入路松壇。終日等候。欲蒙少不潔而爲致打之會。暮而罷甚。至夕食而不得供億。生等族親。有一居院村者。不得已於此乎食。而比其方食。又有持杖數十輩。突入內庭。隨手打碎盤盂。薤粉飮食塗藉。又以執此之故。而欲毁其家。掀棟支宇。打成一場廝倒。世上豈有如許極變怪乎。盖自六十年今日。而渠輩之作鬧院中。不或無之。而尙賴前後營府家嚴明尊衛之至。猶有所顧怵而不敢者矣。至於今番。則渠亦曰營官之至爲如此。吾輩之不規也亦如此。曠載一遇。而吾安得不盡吾所欲爲乎。一方呼聚。一方排斂。揚揚以出入也。以左右取而肥吾身者。又不無憑藉。逞行於其間者。而當初玆事之釀出。實不在溪亭。而借溪亭爲主者。以溪亭在院。有肘腋勢也。就以溪亭全門而言之。其宗孫也。其門長也。執義不然。其中稍有識慮者。亦知其原儒之一。不顧而自渠輩擅便。則蓬蒿轉成貶損。祖廟之爲大未安。而潛懷憂歎。頓不與議者。比比之矣。今所以如此者。不過以孫則李鐘壽李在謙。以鄕則辛余海孫星煥三數人爲之魁。而其無賴麤暴。祗知以使酒生豪。袒臂作威。生等卽不與之較。而愈肆以力。營府又不爲之懲。而愈習以亂。至於如此之極者也。生等痛痛迫迫之情。自今日永辭祖廟。而洋洋陟降之靈。其不曰爾逢典翰公。賢孫爲按使而不能保守祖院。使四百年淸香。一朝焉而不得升馨也云爾。則生等九原他日。又無以藉手歸白矣。爲子孫地。不待鄕有儒之次第。爭訴而先此鳴寃。惟閤下。罪生等則罪之。罪彼則罪之。無使閤下觀風地。而使一邦儒風而掃地。盡千萬血懇號訴之至。
題。前題不云乎。眞有是事。則不可以儒者待之。苟無是事。則責有所歸於狀儒。前後兩是甘題。一倂還收後。事之有無査實報來向事。
十二日回到。
初四日。晴。
自官捉致都色與首奴都掌務等。以爲査問事實之擧。
初五日。晴。
官下帖諭于本院士林。
本院。卽多士禮讓之所。一鄕矜式之地。鄕漸有失宜。先導乎敎誨。而况自本院行此駭悖之擧乎。新舊儒之別。官不欲强爲辭說。而今見良洞諸儒呈單。則今朔朝。院有司焚香之行。玉山諸儒。倡聚各姓。鎖門防遏。使不得接踵。故別尋他家而炊飯。則仍又趕逐。有若哄鬧之場云。先賢家章甫之行。固如是乎。今乖當之擧。不可使聞於他人。首倡數人所當捉入。嚴處以懲其習。而爲以先敎後刑之意。第觀自訟自新之路。姑爲叅是在果。不悛前習。更或作鬧。則報營嚴勘。在所不已。咸須知悉云云。
十二日。晴。
議送門狀。回題來到。狀與題在上。
十四日。
到付營題于官。李在斗李能漢李台久等云云。
伏以民等。以先院事變之被他罔測。未有甚於今朔闕香之時。故士林卽爲稟報于城主。民等繼又議送于營門。則營門題敎內云云。玆敢到付城主曾已庭査而帖諭之矣。據實論報。千萬祈懇。
題。營題若是。査報次兩。是各一二儒來待向事。
十五日。晴。
將行香之際。李種壽以拜行與番次之說。咆哮沮戱相指。日晩竟又闕香。卽日文報于官。
民等生於先祖文元之家。學蔑識膚人不足以保守先院。言不足以動人听聞。累致此今日之變。更誰怨。尤民等三四人。與首席城主再敦之有司。聯行到院。則彼邊作頭孫星煥等。不悛前習。前期已聚數十員。匝坐恐喝。已無紀極。而及其行香之際。所謂李種壽咆哮喝言曰。今番焚香。當拜行之起。執齋服勢。將一搋而渠亦一搋。一拜而渠亦一拜。且以後次釀與之意。强使爲拷於此。而今朝事狀從可知矣。如此相持。日已晩矣。過時闕香。而冒坐齊席。枉涉未安。故退出私處。此後事狀。未知如何。而民等之痛泣。情私寧欲溘然。伏念我城主崇衛保護之地。民等尤不勝萬萬悚蹙。而恭竢處分之如何云云。
題。每於焚香之時。有此相持之端。貽羞非細。極爲慨然向事。
噫日前帖諭。旣有更或作鬧。則報營嚴勘之敎。而今此之題。又如是疎緩者。極可咄歎。
十六日。晴。
兩邊質對。控辭槩在報草。而緊辭有或闕漏中。彼輩之不着齋服。不須廟直。徑入勤香等語。見不槩及。官吏之右袒。一至此哉。
十七日。晴。
報草中。彼邊控辭。條舊儒之藉。此爲說及務得歸和八字。本非査庭所言。且藉和二字。太不穩合。故稟官驅庭刪去。
十八日。晴。
士林又文報于官。
伏以民等之連日庭訴極涉煩越。而第有不得不更爲仰陳者。今番査報之事事實實。誠出於城主。奉行營題之至意。而甘題之已爲還收。謄於報辭。而尙未見收。不着齋服。不須廟直。徑入勤香。此是院變中一大事。而旣出於査庭。而見漏於報辭。且以任司言之。李能任則乃是院圈之有司。而累次闕香。不得不辭而隨。則封還之。李種壽則藉營題。自稱有司者。而一例封還之。伏未知城主意下之如何。而營題旣收。則彼之自稱亦無所據。故彼亦自退呈辭。而自城主封還者不幾乎。自城主更差者乎。一院幷任。建院後所未有之事。三百年古規。今不能遵行而奉守之。伏惟城主裁度而進退之。千萬祈懇。
題。同庭對質。査草輪覽後。兩邊俱無一辭以退矣。今又呈單有非査體。且以任單封還。至謂建院所未有之事。隱然若責有所歸。不勝慊歎向事。
報狀正本傳示草本中。彼邊控辭條。果有是事之事字。換以說字。此乃緊歇之大關處。况如許文字。隨手換面。不勝驚愕。招致擧行禮吏金仁洙。詰問端由。則始告以自官塗改云。而告辭之際。辭色俱極凜怖而駭悖。故齊聲大喝。以示其將有大生梗之意。而於報辭一款。更不暇及矣。此吏惶遽中直走誣訴于官。因此而至有傳喝。大未安之敎。官民相持。一盡夜。竟謝過義解而退
報狀依式例云云。前後兩邊甘題。倂卽還收。本事之有無。兩造質査。則舊儒李能新李華久所告內。
今此本院事。卽無前之變。而今年七月日。新儒冒差齋任之後。慮或有鬧端。朔望焚香時。舊儒三十餘人。果爲往叅是乎所。今月朔朝。焚香次前一日。擬欲往叅矣。當日午後雨下如注。擧皆停門。惟獨李能任及良洞李淸道士人李三人。冒雨而往。夜深後自三人行中。專伻急報曰。彼儒堅鎖院門。拒而不納。事甚浪當是如云。故不勝驚怪。爲先通寄於數十里等地諸族。則及其來會者。爲三十餘人。一齊偕往。則院門果爲堅閉。使不得出入。當場事情。莫可奈何。彼儒中李泂壽。梢解事理。又敦族誼者。故送人請邀。則稱託不來不枝。已可饒飢次往訪近院族人家。則彼儒數十人。突入內庭。以杖打盤碎器。使不得供饋。(。)時光景駭怪莫甚。而事至此境。有亂難私自歸正。有此呈府呈營之擧。以至本事査質之境。自顧事面。祗切愧悚。惟竢處分。是如是乎。
稱新儒李泂壽所告內。
今年七月日。伏承營題。有先從溪亭門中。特差院任之敎。故以李鍾壽差出齋任矣。自舊儒中。猶有未愜之論。每於朔望焚香。慮或有鬧端。新儒中數十餘人。追隨以往。而今朔朝。焚香時。得聞傳說。則自良洞族中。謂將生事聚會八歲以上八十以下人。大張聲勢是如。故非但所聞之驚怖。不無焚香之狼狽。所以堅閉院門。使不得攔入。而其新儒來會之數。殆近五六十人。多人供饋不能如意。夕飯無路通變矣。近院族人家。只饋舊儒云。故新儒中。年少數三人。直往詰責。使不得供饋。至於破碎盤皿之擧。雖未目睹。果有是說。本草事字。當日鬧端。不過心斯。而至於呈府呈營。有此質査之境。瞻聆所曁。駭怪莫甚。伏願明快處分。是如爲乎。
所兩邊所告。據實牒報云云。
二十五日。晴。
官下帖來到云云。
兩邊所告據實報營。則題音內。毋論彼此。所謂冠儒服儒者。互相非訕。殆同貿觸光景。以局外觀之。將謂斯何。良庸寒心。從今杜門讀書。飭躬安分。更勿相鬧之意。另加嚴飭向事。
敎是置題內。辭緣奉審。營題若是鄭重。從今以後。兩邊之儒。自訟自新。杜門讀書。飭躬安分。則士子之道於是乎盡矣。若或不悛前習。更爲起鬧。則當有報營嚴處之道。各自遠辜。毋致悔尤。爲宜向事。
經費之向日排斂。更議以逐等四分一式收捧。
二十六日。晴。
向日營題旣有還收。甘題査實報來之敎。故意以謂庶或回悟。必有所嚴。 勘杜戢之道矣。官報回題又如是沁泄。以至毋論彼此互相非訕等語。渾歸於對耦胥失之科者。尤極痛歎。乃以更呈營門收議構草。
伏以生等自遭先院變怪來。聚首憂歎。抱狀靡如于府于營。而皇皇蹙蹙若無所措其躬矣。迺者窃伏見門狀題敎有曰。眞有是事。不可以儒者待之。前後兩題。一倂還收。事之有無從實査報云云。生等於是乎蹶蹶然生有一脉氣。以相告語曰。今者營門。庶幾其回悟偏蔽之萬一。而將必有以更置之矣。將必有以糾正之矣。此其爲一關捩矣。此其爲一機會矣。始知從前兩度題音之略相牴牾。欲其兩閱之叅照無便。罔有遁精於彼此。而然夫然後知大君子用心周曲。有非小人之腹所可測料矣。題到日生等一齊入府。以備供査叅。以彼輩連日庭爭。猶不能盡如渠輩之所爲。而報而日望棠陰。惟題音之立判。頂手以竢矣。今伏見回題。乃以冠服儒同而置之蠻觸之科。無有此進而彼退。又無有此落而彼升。渾然以杜門禔躬作爲之儒者。一例敎喩。生等却立擲坐。相顧錯愕。不知此何爲哉。而又不知如何而爲之此也。閤下其以爲彼亦儒名。何至所爲之如是。而有不實之疑而然乎。抑査之。雖實而事之。處之不過如是而然乎。苟其如是而止。前曰從實査報必。無徒然以有是敎矣。又其疑之。彼之供對而官之所報。必無不實矣。閤下到此。而使生等先院。欲付之何地乎息鬧之無其道理。而猝使之勿。則是鬧也。寧有勿之期乎讀書安分。自有識者觀之。不無着下。分攔於其間。而彼惡知之。但以外面看覷。有同兩可。愈鬧而愈不息。今且曠香三次矣。是閤下之衛生等先院。待生等一門。反不如一退生等。專付彼輩。無使靜謐。宮墻塵埃亂撲。莊肅俎豆。蹂奪撗加。使一區溪山。長爲聖廟畵圖中物。千萬祈懇。悚蹙之至。到營後。物議不諧。停止不呈。
十一月初五日。晴寒。
道會于營下。本孫十員。鄕露谷杜洞楊月山岱杞溪里門。內佳巖普門南山排盤南磵合十一員。道儒合七十餘員。而可叅之鄕見闕尙州靑松淸道義城。可叅之門見闕酉權湖李川金氏。又以本鄕孫氏全闕。道席至有責罰之論。而末幸停止然甚慨歎。
初六日。晴寒。
設道席于布政司外。敦議呈狀。曺司法興李庭鐸河回柳東運道洞安鐘瑞公。事員李中五張來遠李相翊鄭鎭國。圈望狀頭安東幼學金曄洛金曄倚星州幼學鄭大錫昌寧進士金奎華。招出營吏。使之稟達以抱狀入呈之意。則答以添感脫巾。多士難接。且不必面呈云云。無已付狀營吏後。各歸私次。日已入日矣。夕後因下題音。狀草。伏以生等。嶠南一路之以鄒魯見稱於國中者。以有我晦退兩先生也。而慶州之玉山書院。卽晦齋先生妥享之所也。斯文之奉守。多士之依歸。無異於太學之設施規模。而況薦士節目。乃退溪先生講定之規也。作爲鐵券奉守不替者。抵今三百有年矣。不幸晩近以來。遺韻漸遠。士風一變。俎豆靜謐之地。矛盾相抵。衿佩揖讓之所拳踢交加。至於今日之變而極矣。此事之上聞。臬司屢煩題敎。則生等更不必一一。而闔道之死守不變者。卽惟曰以我文元公書院。而奉守我文純公講書之規也。中庶勿許。載在十二字節目。考叅選任。遵行三百年。儒案則凡我兩先生。末學後生。孰敢操縱濶狹於其間。而意彼罔測之變。乃出於先生姓裔之中。詬辱之。拳踢之。侮奪之。曠香已至三次。冒差恬若一例。而且其中彼一邊鄕儒輩之乘便跳踉。又是變上生變上。招聚其黨。防塞院門。脅絶供億。罔有紀極。彼此相蘁之地。雖未知姓孫之或不無過着。而此豈冠儒服儒者之所可爲耶。迺者本鄕章甫我文一省遍告事變。生等所以坌集於棠陰之下。而伏見閤下之於本孫狀題敎曰。眞有是事。則不可以儒者待之。而査報中彼邊供辭曰。雖未目覩。果有是事。去彼邊自恨旣已如是。則閤下之一番懲勵。將有所施而敦儒化。正士趨之風。亦將自此可覩矣。乃敢齊聲仰籲。伏乞閤下細細垂察焉。嶠南列院享禮時。執事一無許通於彼一邊者。此生等之灼知的見。而本院之一二窠許通。實奉正廟朝別給之敎。始一而又二之這便。是公優待之轉入意。而此猶不足。又生侮奪之計。毁破賢規。若是乖張。則不但玉山一壑屈之蓬蒿而已。環嶠南七十州擧。將風靡而波湯。一畝儒宮。無地安靜。多士衣冠。無所依歸矣。然則今日玉山。卽生等之院矣。今日生等。卽慶州之儒矣。此豈獨慶州儒之一呈二呈而號訴而止哉。伏惟閤下。尊衛先賢。扶植元氣。使吾玉山夫子之廟。得免荊棘蓬蒿之患。而退陶先生之規。永爲絃誦。俎豆之美。千萬祈懇之地。
題音。當初事之題也。甘也卽出於疏鬱恢。公非由於便繫私勝。而然則疏也恢也。亦在院儒之何居。而爲一邊者。固當待公議之進退如何。而不(?)之爲已至冒羞自稱。已非冠儒說詩者之所爲。亦足爲貽羞招譏之端則在院儒。不足爲輕重。而至於曠香。曷勝悚然。而因邑報已有嚴飭。且收其前後甘題。則其人亦當自愧自戢。州多士絃誦之地。亦不有譊撓之慮向事。辭旨內。冒羞自稱四字。雖迫斥彼輩所謂有司者。而結尾之沁沁泄泄。從無嚴戢永杜之意。是豈有章甫齊聲懇訴之本意哉。所以合席商確。峻發再呈之議。
初七日。晴。
食後。再呈道狀。狀頭漆谷幼學李相獻仁同幼學張來遠禮安幼學李中五。伏以事係鄭重則鄭重之。義在歸正則歸正之。此生等所以衝寒裹足。環一省齊聲仰籲於棠陰之下。而題敎鄭重。責彼諭此。始也歸之於院議。繼以竦然於曠香。一句一字。無非衛先正。正士趨之至意。生等奉讀。感恨喜覩儒化之復興。而但冒差自稱。雖非院儒輕重。而仕他勿論。則歸正。無日自愧自戢。惟待其人悔悟。而終是不悛。則安靜何時。此雖出於。閤下一時包容盛德。而三百年藏修之所。各有所歸。則一日譊撓。已是多士之不幸。且其施措。頓無顧忌。累奉嚴飭。而氣焰益肆。雖收甘題而藉重。依舊如此跳踉之習。焉有避譏愧戢之望也哉。苟非閤下別般處分。則難以懲勵。故生等不避煩爲敢更籲。伏乞特下嚴關於該邑。使作魁者。知所畏戢。永杜後日譊撓之慮。千萬祈懇之已。題音。向者邑報之題。已有所飭之諭之。彼亦當知所止戢。且收其甘題。則又安有所藉重者乎。今此煩複。亦出於慮後。則其在待士之道。亦安可一向佛然飭諭。杜戢之道。當關飭該府向事。姑未知關辭之如何。而發關二字。慰諭多士。煞有生氣。從此幸見止戢懲勵之道耶。是日道論。以爲本院之致此乖鬧曠香。本鄕士林。不無不謹典守之責。且今此會席。猶此零星於他邑者。道責難免事。合發通以警之云云。通文傳曰。家必自毁而後。人毁之。今日玉山之變。是已於乎環嶠南七十州之末學後生。雖不得摳衣負笈於玉山夫子之門。率皆擩染薰沐於遺風餘。韻之中。而讀夫子之書。服夫子之言。而景仰焉。尊慕焉則僉尊之生長於夫子冠屨之鄕。而擩染薰沐之爲何如。尊慕景仰之又何如。而羹墻寓慕之地。惟有是玉院妥享之地而況薦士節目陶山夫子之所嘗條劃而規定者。則中庶勿許十二字。此吾黨奉守不易之規。而所恃而奉守者。惟貴鄕僉尊之密邇於堂廟之際。周旋於俎豆之列。而奈之何無前罔測之變。遽出於一邊。至於曠香冒奪之地。切惟彼一邊儒士。亦吾晦退兩夫子風韻中人。何獨不知夫退陶節目之爲不可易。又不知夫冒奪本院之爲所不當耶。此必是家之所自毁。而吾林之所恃於奉守者。何居不謹典守之責。貴鄕僉尊之所不當辭而及其本鄕之飛文通告。則生等聞變。奔趨於棠陰之下。以爲呈營歸正之議。而意謂貴鄕僉尊當門席捲奔走。於敦事之地矣。畢竟貴鄕中參會儒士零星於他邑。則切爲貴鄕深慨而勿以。旣往之。不謹自沮。諭之以理。動之以誠。使其自愧自戢。果如營題而更無騷鬧之端。則斯文之幸。而如或不然。一向跳踉。則更通會。家同心幷力。期於歸正。以爲遵守古規之地。千萬幸甚。是日道儒。次第發還本鄕。孫氏永愚始到。
初八日。晴。
一行拜發還。僉議以爲姑留一二員。以待關旨出。道理得當。能烈東久。仍留焉。
初九日。晴。
關旨常不出。留後儒生又呈營。狀頭禮安幼學李中五善山幼學金泌東安東幼學柳東運云云。伏見日前再呈題音有關飭後。府之敎固知大君子衛賢院。正士趨之盛念弘度。出於尋常萬。萬輪閱銘感。頂手以竢。而但生等各在遠地。一歸落落。無從以獲奉關敎辭旨。故姑蹲姑發之行。而更此煩稟尤不任悚惶懇祝之至。題。出言而使多士不。信方愧恧之。不暇向事。
十二日。晴。
以到付營題之意起送一員。能琦入府。
十三日。晴。
官家以十一日政軒灾火。不遑公事。到付狀見退。到付狀狀頭孫永愚崔世五權宜準。伏以本院事變之終不靜帖。今月初五日。道章甫齊會營下。以至再次呈訴。而題敎如是。故兩題爲以粘連到付。伏乞參照後前後甘題。卽爲還收。特下嚴飭。俾無如前擾譊之弊。千萬祈懇之至。
十五日。晴。
齊任將行香禮。彼輩作鬧沮戱無已辭出。闕香卽爲文報于官。起送二員能章久。兼到付日前見退兩度營題。文報草。伏以今望香謁。本有司來到院中。則彼一邊人。復如前多聚。渠中冒差。自稱之有司者。已先在座與本任。幷坐押對。至於將朝捻香之際。本任攝着齋衣。則渠亦謂同入行香是去乙。本任與民齊聲責諭。以兩有司無幷香之禮。曉持日晏。而渠愈以後次迭相爲質。又其不。許則彼乃執據木靴。以爲分用齋具。必爲幷行之擧。本任不可以不具服。苟且行禮不得已。任渠獨入。而同時在座。民等亦一倂辭出私次。豈有如此變怪。痛惡之愈去愈甚於體貌所在之地乎。又況今番道會。兩呈營門。前後題敎。不啻明曉。而頑不省悟。衝口所藉。一次一遞。我城主所嘗辭敎。我亦封還。則我不爲有司。而不爲行香乎。不着齋服乎。官家雖曰勿之營門。雖曰勿之形狀。不當前誓不遞退云。又在傍鄕新之逐次慫愚之一二孫也辛也。輩從以肘勸之謂之子。不獨有司之讓之。良洞有司乎促入行香子爲有司。而一遞一番官家之所定也云云。民等之前後苦心血誠。爲先師靡所不用其極。而畢竟以城主藉重今至萬無回悟之地。惟城主有以裁處之。甚幸。
十六日。晴。
呈文報于官。兼到付兩度營題。而官家終乃謂以政軒火灾。方除務待勘。惶悚之際。公事庶却云。而如前牢却。噫凡他公事民訴隨卽題決。而獨於院事之係關新儒更一向稱託除公事云者。是何政體。尤覺慨咄。僉議以爲二十三日忌祀。當前祭物封上之際。彼輩必有支節。不如預爲牌飭之爲得。乃下牌于都色處。意謂今番香謁。營題旣如是鄭重。合有退遜底道理。而一向冒據如前。則已失士林公共之議。
二十三日。
祭需。不可以冒差自稱之任。使之封上。旣牌之後斷不可受納此意。告于上村各宅爲可。
十九日。晴。
僉議以爲望香。又被他作鬧致闕。前題之下。不得不更呈營門。起送一員能烈赴營。狀頭金相瀅崔琪壽李能容。
二十五日晴。
營行回使見傳回題與關旨。呈營狀草。伏以向者一省縫掖。以本鄕玉山院事。而齊會營下。得蒙兩度題敎。溫情諭曉藹然。以口舌對荊楚。生等伏讀再三。感訟旣悅。有以覷見。夫大人君子。用心委曲。處事精詳。有如是矣。而衛道正士之兩。無遺闕也。意謂此題一下。則雖彼沒覺繆嘵之輩。必當知所以歛退愧戢之不暇矣。今可以訊掃鬧塵。整遫維新矣。今又望香。而彼中冒羞之李鍾壽者。了無一着低下於前時意想。先本任而來坐院中。至於香禮將行。而本任攝着齋衣。則彼亦分據齋靴。曰同爲任司。則當同入行香耳。齋其當一彼一此。今若後香。聽吾迭相。則吾當脫靴以全具矣。今曰營題題。而營題見其別無可怵而恐之者。前之特差。獨非營題。而後之勅諭。特爲營題乎。前則藉重。而後不止戢。生等於是乎穩言斥十複該警。靡不用其極。而愈警諭而愈狃習。直不曰曰。囚曰笞前漫不有。題意之爲如何。歸結之爲如何。還收之爲何者。愧戢之爲何者。視若冷題。隱若有中。有所恃者。又鄕新之一二。逐次者從而唱和之。竟至突入擅香。於惟我營府之前後。待彼者謂以有冠儒之名。而安有儒名而於此體貌之地。不有公議。不有營題。而有此駭悖之習乎。生等旣不可以與同周旋。又不可以與之乖爭。不得已閉辭院門而歸。噫且慟矣。三百年依歸之所至于生等。而一朝焉而無所於歸。生等之生丁不幸。已無加言而其亦不幸。而變起於閤下按節之日而又不幸。而不見正於閤下勘題之下也。生等卽以事狀馳報于本官城主。而適會政軒灾火不遑題錄。故謹此百聯以呈。無任屑越迫蹙之至。題。已題於道儒之狀向事。
二十七日。陰。
自院見傳官下帖。卽到付巡營甘結內。本是新儒之紛挐玉院者。已有禁戢之題勅。而不自屛息去蓋恣橫。致此諸儒之聯狀。決非儒者之所爲。卽係頹風之一端到。卽嚴勅禁斷是矣。如不愧戢。復踵前習。一倂捉囚報來而事敎。是亟甘辭相考施行。爲稱李種壽院任營門之前後甘題。旣已還收。則自歸勿論。有司李能任數朔闕香。屢呈辭單。不可不改差。以有文學可堪人擬望報來是矣。新儒中更或有如前起鬧之弊。則斷當捉囚報營。以此知悉。宜當向事。彼輩呈營狀題。闡幽疏鬱。營未嘗不盡其道矣。這間會折。亦旣安帖。從今恢公之議在院而不在營矣。且兩邊必圖和好。然後事於諧而議可合亟懋。氷釋眼靑。俾共誦說之地向事。蓋此狀在至臘之交。而未知的在何時。故姑記于此。而原狀未得見。
十二月初一日。晴。
自堂中行香後設公圈。任有司進士李邁久。
十五日。晴。
有司行公。彼輩自此而止戢退縮。益緣營關捉囚報來四字之知所畏悖 者也。
甲申
二月初九日。陰。
聞新儒輩將生事于十一日享禮時。僉議以爲參齊。外亦當赴。去觀變議處。午後。諸族發向院中。則覺里先到者。已三十餘人。而與略而鄕新及玉李充滿蹂躪。必有生事之慮。及擧燭設公事席。彼輩圍匝而立。派任書畢後。在謙引見。裂糊推版。而咆哮無紀。彼邊人冒夜追到者。亦不知其數云。
初十日雨。
外齊諸員議以爲彼輩之危怖爻象萬無安享之路。合以發校禁戢之意。文報于官。乃修文報。冒雨馳走焉。文報草。伏以本院之保護如前支。有今日者。莫非我城主閤下莅在首蓆。極力尊衛之力。且伏念營府捉囚之甘題。如是截嚴。今番享禮。意謂無事安行矣。所謂牛覺里一邊儒李在謙。率其渠族中無賴者三十餘人。前期屯聚及其派任之席。攔入咆喝。罔有紀極。而在謙呈身出座裂去派抵。無賴輩從以拳踢之扶曳之。奪據齊房。使巾服齊儒。而終夜冷處。此猶不足而方從外招聚追到。而唱言防享。目今光景。必至闕享。乃已爲?以罔夜馳報。伏乞特賜軫念。亟出將羅。以爲戢亂。安享之地。千萬齊籲祈懇。題。院享正齊之日。有此鬧端。極爲駭然。因此而若至闕享之境。則豈非萬萬未安之甚乎。無論新舊儒。當有其罰。務從和同。以爲安穩將率之地是矣。若終不知戢。則當報營嚴處向事。不惟不發差嚴禁。題辭如是沁泄。而且無論新舊儒。一條語對擧。尤爲痛歎。彼輩之跋涉泥濘四面來集者。又不知幾許。而咆喝難糅。便同一市場。禮享正齊之所。寧有如是萬萬大未安地乎。夕後因攘奪廟門開金牢。囚廟直於典祀廳。作隊輪番守直。廟內氣像甚凜怖。夜未及。分羣突之聲一時四起充滿廟庭。圍匝神門。而各持一杖。齊喊響應。有若擊刺蹂躪之狀。火光明滅中。或冠或巾者。一邊唱嗒一邊奠獻而退。曰我已門享云云。噫噫痛矣。國學禮享之儀文節次。何等重典。而乃敢如是而曰云云者。是亦士以爲名者乎。院欲從事者乎。諸齊儒無有措手之地厠足之隙。竟闕享謝院。而退出私次。豈非痛哭處乎。
十一日或雨或。晴。
自私次修文報告變于官。因走通于各里。期以卽日齊進于府。先行數員已而話。後行呈文報。使不得驅庭之卽回題出矣。文報草。伏以今番享禮時。彼輩作梗之端。略陳其由於前日牒報。而果至正齊日。所謂李在謙李能挺與孫星煥辛宗海等。率其無賴生面者。招招四集奪據齊房。至使巾服齊儒。而不得食息齊所。民等披腔露悃。以警以誘之舌弊脣强。而咆哮肆悖。愈去愈甚。夜未及分。忽地羣起。脅飭廟直。攘奪開重。不沐不浴。或冠或巾。圍匝廟門。各執一杖。蹂躪敺擊。呼漢齊任。使旣齊齊儒。而措手無及。厠足無隙。竟至闕享。噫噫痛矣。集亦名爲儒者。而尊重體貌之地。寧有如是無據萬萬駭悖之擧乎。爲?敢具由告變爲去乎。惟首席城主如何勘處之。如何論報之。痛迫祈懇之至。題。享禮時。致此鬧端。誠萬萬駭悖。作頭之人。不可以儒者待之。爲先捉囚嚴處事。
十二日。晴。
發牌捉致李在謙孫星煥辛宗海。將羅出來。
十三日。晴。
三人就捉幷下獄。通告鄕中各門中又斯文百六。本院新儒之變。愈往愈肆。以至今番享之致闕而極矣。三百年揖讓遵奉之所。一朝焉而被他悖難閉門。永辭而歸。吾林之羞憤痛惋當何如哉。一邊文報于官。又將議送于營。未知營府處置之如何。而節。伏念生長先生之鄕。服襲先生之道者。無先生之院。而將安所矜式而依歸乎。望須念尊。齊聲其討。無自歸於(崖)視之科。千萬幸甚。十一日玉院會中。此條宜在上。
十四日或晴或雨。
下牌于都色處卽見沙谷進士宅汝矣。處下牌辭。則事面不得不然。而以士林言之。享禮旣闕之後。香謁與否。更何暇言也。以待日後。正歸之地爲可。僉議以爲院變。旣至此極。作魁之角玉兩里。不可如前敍族。當從今絶之。乃聯書于玉。據牌於角。先絶溪亭書。寒喧。不暇書院事如此。固知僉筭之夙定。而旣而思。惟無或有一分惕蹴不安於心者乎。鄙等連日實不無私與憂歎者。以爲僉尊之與他有異也。今無及矣於等。不肖孱劣。不能保守三百年尊衛祖院。而僉尊則一朝焉而一任其一二人眩幻出後。坐奪了七十年覦覬不得地。於僉尊固多于前功矣。顧僉尊好與夫同志同名之立。立人奉而守之。混而同之。一泉石一樹木而無有毁傷。無有墜廢。以無負先潛溪公之苦心血誠。諒不如是也今而後。族等無顔入廟。無喙說院。而猶有一言奉規者。世上固多。不如僉尊人。又僉尊而效尤之。則僉尊又當。何以應之。到此地方思鄙等牢守古規之有以也。慨惜慨惜。同祖地而貶損祖院者。不可以敍以族誼。從此請辭絶角里牌。汝矣上典宅前後做錯當有一番此擧。不至今日。而猶是一家之義重庭回顧惜。庶幾其或迷轍改轅善後有道。而愈往而愈狃。愈肆而愈悖至於今番聚黨。無賴袒號絶貳奪據禮享。乃爲溪亭之所無爲。於建院來三百年。如此然後。非此中絶之。使此中而不絶不已也。此後段從其自絶。而永永相絶。不復以族誼同言好有往來。以此告悉事。
十六日。晴。
治送英可于營下。以爲議送計。
二十五日。晴。
今人還見英可在營下書。以營家之喉慎廢公事。回題尙稽悶。且彼輩亦付狀。而一人出後幕府云。而所謂彼狀謄伴以送。彼狀中節節爽實不卞不得?狀疊呈之意。僉議已定。
二十六日。晴。
狀本與答英可書委伻。急走于營下。彼邊呈營狀草李能珽李秉壽孫永昌云云。伏以庭設夏鞀而積屈者。寃野咏召棠而受誣者寃。今生等幸値聖明之世。共泳旬宣之化。而獨緣玉院一事。久屈而抱其寃。被誣而獲其戾。故不避煩瀆。更控苦衷。伏乞哀憐而垂察焉。盖此院事顚末。旣在明燭。不必架屋疊杗。而第以今日事論之。去參呈營之後。更訴于本府。則題敎內據古規。更置。二有司實是和同之道。而新舊之別自在其中矣。院議靳持。誠未可曉向事敎是。故生等向於享祀之夕。與同志若箇人。晉造院儒之席。苦苦哀乞曰。吾儕亦讀書士也。幸忝末執事之列。以寓慕賢之誠。則情願畢矣。良李斷斷不許。故更懇曰。末執事猶爲難重。則願叅直日之名。小泄幽鬱之情。良李此亦不許。故生等窮無所歸。更言于院儒曰。吾儕從未叅執謁之名。旣爲來此。則淨着巾服隨在院儒之後。瞻拜院庭亦何如矣。良李猶加威喝曰。雖闕享。都不听許云。故生等勢無奈何。咸歸於西上房。而少頃聞知。則院儒亦盡出矣。生等疑訝未定。久俟其歸。而院儒則終無形影。享禮則已爲時晩。故生等舊然相議曰。緣底彼我相持。書院闕享。豈非大未安處乎。玉李則爲本孫也。諸生則爲後學也。本孫與後學者。與周旋於俎豆之列者。似無碍於斯文義理。故果與將事告成。而舊儒則只有一有司矣。今良李激出彌天鯨浪。做成無地蜃樓誣呈本府捉囚三儒。更訴營門。期圖擠陷。其計巧矣。其情甚矣。生等苟或造黨作勢。驅出院儒。而以此聲討。則固不敢辭。而只以新儒行祀爲罪。案則亦有說焉。文元公不昧之靈。只歆舊儒之薦豆。而不享新儒之誠禮耶。且於其時舊儒獻執濟濟在位。而生等妄自姿行。則責當有歸。而舊儒則合謀。故避生等。旣在院庭。見其曉色。已晩享禮。將闕可不爲薦裸耶。彼良李始也故縱。終焉執咎。欲爲一網打盡之計。生等之受誣增寃。詎有其涯乎。生等欲爲哀懇則目之。曰作亂。欲爲和同則目之曰。專奪如之何則。曰巽順。曰恭謹乎。彼良李徒以鄕闇恥與之。則不遵朝家之著。今不顧營邑之題飭。百計粧撰。一事擯斥。而又釀當日故避之謀。抱作今日頃軋之柄。生等之一腔血寃。如水益深而火益熱矣。生等亦讀書提躬齒於士子之列。而豈可昧義理後分數。只以作拏爲能事乎。其必無而受誣也審矣。雖然旣彼其誣不可以不辨。故摭實齊籲於二天棠陰之下。伏乞另軫監燭。特不題飭使之和同保合。無至營邑紛拏之弊云云。題未得見。辨破彼輩搆誣狀草。伏以生等以書院事而不勝憤枉。今又抱狀籲營。而巧値使臺。持守嚴吁留狀。白吏廳亦旣積日。而荒歲營邸烟費。實難多人留待。不得已先從一二歸。以爲辦備更上地。而第其付狀時。適見彼輩所謂狀同在(車+丑)中者一通。生等不覺心骨顫寒。彼亦自知罪抱罔難逭。情迹雖揜之所以先之於生等之訴。而巧爲是一切反其辭耳。彼若無訴。則已若其爲訴。其亦不如此不得矣。君子可欺以其方難。罔以非其道。彼其所言。雖三尺之童不可以瞞過一時。況以我閤下明見一省。而夫豈有一分聽信之慮理。而猶慮夫前者煬因之。後者蔽之。閤下之明。方有煬之者矣。生等又不得不明明以卞之。彼狀曰。同志若箇人適院云云。而與渠輩同座者。豈不爲渠同志之人。而曾謂同志若箇而多至六七十乎。彼狀曰。末執事猶爲持重云云。而非但末執事而已。雖香爵之列。而溪亭則與之久矣。若其他牛角李。凡爲鄕新者。豈可一例同之乎。彼狀曰。院儒盡出終無形影云云。而名爲原儒而齊宿將享者。豈有一儒出院門無形影之理。而彼旣攔據齋房。無地容扉。則勢不容。別就夾齋。不與彼者混矣。彼狀曰享禮時晩云云。而嶺俗以鷄鳴行晨祀。故學宮亦如。而其日夜未及深。渠輩突然圍匝神門。潛偸冒據於籩豆香祝。旣靜旣戒之地。而獻官及齊儒攝衣之。猶旦不暇。豈可直樣攔入。與渠輩廝倒叫哄於咫尺。靜肅之地乎。又豈可安然團坐於齊宿乎。體貌所在不得不移避。則豈有半箇原儒摻見渠中。而又況名爲有司者乎。有司則今之抱狀李邁久也。生等苦心血悃。欲其不曠祖院之。千百其方而呈府呈營之不三不四。而苦不知止者。寧有故避之理。而爲此萬不近千不似之言。造飾奸詐。以敢眩視遠惟明之地乎。此不須生等。爲節其時院隸在。彼輩在。生等在。請招致幾箇各人。立之閤下之庭。以貌面爲辭聽之。一言有不如。生等所許請。反其罪。而生等之生等無所使焉。蓋渠輩一生伎倆以極矜憐之狀。其或見怜於人。而諛辭諞說左右攢而入之。是其在上者。不能無疑於以人聽人。而不免有論査之敎也。嗚呼。彼輩豈直爲斯文之亂。徒賢廟之潛跡而止哉。抑亦爲閤下之無赦罪人。而使閤下而不得爲閤下也。計此狀入鑒。未知前狀之已或題決。而雖復快判。而痛下之。寧知彼輩之爲譎一至於此乎。無任云云。到營後。謂以前狀之未及題下。而又此荐呈不無瀆居之嫌。不呈而還。
二十八日。晴。
營伻見還。見英可書。狀題尙無下落。極相紆且旬望。孤意尤所關心。以更送一員議定。
二十九日。晴。
本尹自永川衙。轉到院中。一宿旋發。旣在同主位。而及此空院明朝香禮滿宵。而今日經還者。體貌似不穩便無寧。此行差先差後之爲。免窘跲耳。
三月初一日。
治送一員能章于營下。
初八日。晴。
營題始到。而辭意又如前沁泄。可歎。狀草。狀頭孫晉念權宜升李道久。伏以生等以玉山書院事。而前後於閤下訴。不厭其支蔓而煩瀆。而事有不正而不已。罪有不勘而不已。則不正不勘之前。其于一府按臬之下。而不蔓不得。而不瀆不得矣。噫書院之保有。前日罔非我閤下出誠費。辭凍之以威。暄之以諭之力。而自下捉囚論報題關。儒林增氣。斯文重衛。以爲夫大君子一言泰山喬嶽。而彼輩情驗計窮。無變之。敢爾復釀矣。今月丁享。而正齊前日。獻官及齋儒先後到院。則有所謂牛角李在謙者。肩其魁鄕新之爲孫星煥辛宗海者。而致聚麤悍丁。少無慮而許名。幷溪亭李。分據齋樓六七房。只餘獻官。齊宿一所。而以外齊儒。更無着跟地。不得已就下別處。及其設席爬任。而環匝數重咆喝。萬狀爾漢而公呼之。拳踢而指空之。甚至排擘執事版。而仍爲鑕。囚廟直於廟內典祀廳。夜未及分。猝然奔突之。聲起自一邊。勢若風雨。而廟內火光明滅。各執捧杖。圍匝神門。生等措手不無給。蒼黃驚起。而旣不可與渠輩哮哄扯捽。於咫尺靜肅之地。又不可蹲。仍苟坐於齊宿之所。相率憤惋。退伏私次而進。後聞之則渠所謂行祀者。不沐不浴。或巾或冠。不着祭服。香爵無序。而潛偸冒行於旣陳設備香祝之後。名爲以儒。而豈有如許亂廟之徒乎。彼其狃習。愈數愈濫。自爲有司之不足。而香謁之。自爲香謁之不足而終至。於國學享禮何等莫重。而聚黨阻攔自爲。則自爲之。官飭之不畏。營關之不有。至於此枉。生等今日書院保守。猶屬第二日憂。而書院之終也保守不得。生等亦知之矣。曠載一逢如閤下。而衛道扶名。出言正色之堂堂又如閤下。而不糾正之。則嗣閤下而按節南爲者。能復幾箇。鉅公能使之保守。得閤下所未爲之書院乎。雖然書院寧不保守。彼作爲無前之極變。祖爲千古斯文亂罪之徒。寧或一日而徒然以亟之哉。盖其俑端於角李。而藉窟於玉李。而角則在謙者。出而簸扇之。玉則珏壽者。內而周章之。鄕則孫星煥辛宗海者。唱和而羽翼之。是四魁者。前後注錯之。相爲腹背者也。彼玉李也猶云聖敎之有藉。世爭之有年。而角李也陰附於玉。而反爲玉之所不敢爲。孫也辛也。則又以鄕新而角之。尤不如而樂爲之。黨而與而榮也。此而不懲。懲而不嚴。則斯文切掃矣。元氣燼掃矣。名網紛紊矣。法敎苛弛矣。閤下於此又將如前日。關諭而止乎。生等窃以爲此輩之作變儒宮。如是之無顧忌憚縮。不但爲儒宮士林之憂。實在上君子鎭世道主名敎之憂也。夫禮以正俗。而禮失而何俗之可正乎。名以立紀。而名爽而何紀之可立乎。孔子曰。必也正名。孟子曰。謹庠序之敎。聖賢夫豈苟然而已哉。生等其日跣走府五十里。款門告變。則本官城主。特爲發令。捉拿李在謙孫星煥辛宗海三人。以相討營敎地。而姑且見囚。然曾無寸鋩剚刺。而增排斂討食飮。反復勝於在渠家荒年調濟。所謂囹圄爲補{衣+卜}堂耳。生等之於此書院。望之閤下者。尤有以也。而自閤下雖或有己處之道。若不有別敢懲戢。以快條其一遭駭浪。而永爲後時之憑式。則雖復今日。而安明日而復然矣。此月而息。彼月而又然矣。此則前關之已事也。生等敢曰。如何如何。惟閤下處分。無任痛迫祈懇之至。題。已有前飭。必自本邑。另懲向事。
十二日晴。
起送相久炳久。到付營題。到付狀草。狀頭鄭益儉李相久權宜準等。伏以本院事變。以至前月享禮之致闕。而莫此極焉。故卽爲文報于城主。仍又議送于營門。則營門題敎曰。已有前飭。必自本邑另懲。蓋營門之前後嚴飭。以有本邑之自在。而本邑之另加懲勵。自是營飭之奉行。爲以粘連到付。伏乞叅照後依營飭另懲。千萬祈懇之至。題。享禮時作鬧。萬萬骸歎。故已爲另懲向事。噫一夜捉囚。而仍卽保放。使之偃然在家者。是可謂懲之另云耶。
二十日。陰。
門會于宗堂。更呈營門之意。收議酌定。
二十五日。晴。
治送邁久台久于營下。
四月初二日。大風雨晩晴。
營門回題。見到辭意。差降慰解。然査報字。還爲生事。可歎狀草。狀頭鄭宇載權宜恒李寅久等。伏以抱狀叫營者。必其不得伸枉於本州者。而今生等得伸於閤下不止一二。而叫枉於閤下又不止一再。則生等雖不敢畢言。而以閤下之明。夫豈不有以默揣而心量之者哉。前題且勿言。闕享後所呈題敎內有曰。已有前飭。必自本邑另懲云云。生等愚騃無識。雖不解公會文字之用下如何。而意謂另懲云者。別有加意裁處之義。必自云者以爲。當然合做底矣。到付官題直曰享禮時作鬧。萬萬骸歎。故已爲另懲云。而更無有別般。據營題奉行施爲其曰另懲。直不過李在謙孫星煥辛宗海若箇人。幾日保囚而已。生等實未知當日閤下題敎之意。果然止於斯而已。而本邑奉行之道。又果然止於斯而已乎。旣謂作鬧爲之萬萬骸歎。則閤下彼狀題敎中。孰是孰非。官豈不知。而又不有査決如何乎。生等終始不敢一言有何於本官城主地哉。誠以爲程叔子所云。此理最好之義。而今又復如此事無究勘。彼輩之懲勵。旣無其日。生等之伸枉。又無其期。則生等痛迫之情。自不得忍默如前。而其爲悚蹙。實無以自逭矣。於乎。彼輩之前後眩誣。生等亦覺多煩。今不必一一追辨。而閤下其亦以人聽人。而猶或有疑於生等之言。則院隸在彼輩在。生等在。閤下請招致各箇幾人。立之閤下之庭。而辭聽而貌面之一言。而有爽一事而有左。雖以其罪反之生等。死無所辭。而就使渠輩所爲。一如生等所訴。閤下其將又如前題。而一諉之本官城主。則閤下之庭生等之訴。將閒月無之矣。惟閤下爲世道。爲先賢。爲儒林思量。而裁處之如何地耳。生等不勝痛迫祈懇之至。題。此事言亦支離矣。而亦有嚴懲刑配之題甘。而尙此不悛。致使儒狀。又來其果不足深究而然是喩。所謂作鬧諸人。一倂捉致嚴査報來事。
初四日。晴。
以到付營題。數十餘員。各自備資。而齊進焉。
初五日。晴。
到付。狀頭鄭宇載權宜恒李在熺等。伏以本院之仲春闕享事變。承有必自本邑另懲之營飭。而城主題敎。已爲另懲云。而更無依營題別般處置。民等痛迫之情。不可以是謂已懲而但已。故更復呈營。而營題有曰。此事言亦支離矣。而亦有嚴懲刑配之題甘。而尙此不悛致。使儒狀。又來其果不足深究。而然是喩。所謂作鬧諸人。一倂捉致。嚴査報來云云。爲敢粘連到付。伏乞叅照後依營題處分之地云云。題當。依營題。作鬧諸人。幷捉致査報向事。
初七日。晴。
自官使兩邊對質。官言。彼此之各自以言語爭詰。徒涉紛聒。各其草錄。其當日事實以呈云云。卽自官庭草呈報狀草。爲牒報事。卽到付本府玉山書院儒生鄭宇載權宜恒李在熺等。呈議送辭緣由。伏以抱狀叫營者。必其不得伸枉於本府者。而今生等之得伸叫枉於閤者。不止一再。則前題且勿言。闕享後所呈題敎內有曰。已有前飭。必自本邑另懲云。到付官題卽曰。享禮時。作鬧萬萬骸歎。故已爲另懲云。而更無別般據營題。奉行施爲。其曰另懲。直不過李在謙辛宗海孫星煥若箇人。幾日保囚而已。則事無究勘。彼輩之懲勵。生等之伸枉。殆無期日。彼輩之前後眩誣。生等亦覺多煩。今不必一一追辨。而院隸在彼輩在生等。在捉致各箇幾人。立之營庭辭听聽。而貌面之一。有差爽於生等所訴。雖以其罪反之。死無所辭。特以爲世道。爲先賢。爲儒林。思量而裁處之事。呈議送使。題音內。此事言。亦支離矣。而亦有嚴懲刑配之題甘。而尙此不悛致。使儒狀。又來其果不足深究。而然是喩。所謂作鬧諸人。一倂捉致。嚴査報事向事敎是等。以新儒李在謙辛宗海孫星煥等。卽爲捉來。與舊儒等一體査問。兩邊之說徒相煩聒。終欠詳悉。故各其所懷。使之同庭書陳是乎。則舊儒李能章李在鐘李能任等。所告內。入齊日。獻官諸執事。開座設公時。李在謙等。爲言一執事許給云云。皆言院錄自在。取士有薦。此其不當云。至於辦陳設。書彼邊中二人矣。在謙突言。今番必大生梗。因裂執事就旣爬之任付。之一邊。風浪仍坐齊矣。彼邊自何私家聚黨百餘人。乘昏攔入於齊席講堂邊兩齊房。皆圍坐無寸地。正齊夜陳設後。有司李邁久及大祝。覘視陳設之際。彼邊一少年。攘奪廟門開重唱言爾漢何漢云也。仍卽無賴百餘人。擁坐廟內典祀廳。或冠或巾。不沐不浴。夜未及期。原定獻官。諸坐一旁未暇。巾櫛之際。一邊唱笏之聲。旣之行祀。齊直輩視之。則所謂獻官。不着齊服。門外難入之人。各執一杖。如是。則獻官諸執事。旣至彼邊突入冒行之境。故勢不得不出私處。而痛迫之極。卽爲奔訴。則題敎有曰。享禮時。作鬧萬萬駭歎。作頭三人。卽爲捉囚云。前後事實闕享景色。發已洞燭。惟願明査。處決是如是乎。稱新儒李在謙孫星煥辛宗海等。所告內。今春享禮時。執事分定席。民等三人。叅末席懇乞一執事。則院儒曰。執事記已成。不可間書。一向牢拒。更懇曰。吾儕旣在院庭。使一少年。正着巾服。隨執事之後。參拜先生之庭。未知何如云。則院儒高聲大叱曰。雖闕享。終不許給云。故鄕人辛宗海孫星煥仍爲退去。本孫李在謙。退在北上房矣。院儒三三。偶語兩兩附耳矣。及其祀享之時。招李在謙語曰。君等期欲叅享乎。答曰。願送一人瞻拜云。則院儒稍稍退去。無一人影響於院內。曉色將近。民等旣在子孫之列。不可闕享。故招玉山角里本孫。與居近鄕人數三儒。利成享祀先生。如在之靈只歆舊儒之薦。而不享血孫之薦耶。今以此事。爲陷人之話柄。尙日退去之席陷穽。於今日。如以享祖之孫。歸之於辭類。雖死何恨。惟竢明決處分是如爲臥乎。所叅看兩邊所陳。則舊儒以院享時。習黨作鬧。竟致闕享。爲辭。新儒以願叅執事。牢拒不矜。仍爲退去。故與玉李及數三鄕員。趂曉將事爲言。而撌以院規享儀。有涉乖當。故李在謙等三人。倂爲拘囚。緣由査報爲臥乎事。
十七日。陰。
報狀回題見傳。題曰。此報只陳兩邊所供初。無決折。其將何以明辨是非乎。本府。則必當有揣知者矣。詳査曲直。更爲報來向事。
十九日。晴。
僉議以爲。官家更報之擧。未知何如。而義不得晏然坐視。入送二員華久東久于府。彼輩呈官狀。本未得見。而大旨。以和同蒙放之意懇籲云。狀題曰。報旣據實。惟在營門處分是在果。浹月滯囚。亦所當念。姑爲保放向事。前報有更報之題。而姑未更報。而報旣據實云者。是果着題也。可歎。
二十日。雨。
呈士林稟目。伏以事變之歸正。惟在是非之決折。而自有一定之見。則元無兩是之理。今此本院事變轉至春享致闕而極矣。向日牒報。亶爲孰是孰非之嚴査決處者。而尾結曰。揆以院規享儀。有涉乖。當城主下意。亦知有所在矣。卽伏承營門回敎。有曰。只陳兩邊所供而初。無決折。將何以明辨是非乎。本府。則必當有揣知者。詳査曲直。更爲報來云云。民等窃以爲城主奉行之地。仍卽決折是非。已爲修報矣。乃見囚已放還。報且停緩。事變之 勘案。無期賢院之曠香有月。民等痛迫之情。一日差緩。一日較深。蓋此是非曲直。城主心下。已有所一副權衡者。而是者是之。則非者自在。是非乃決折。而事變可歸正。是民等則曲。彼邊之是。彼邊則曲。民等之亟圖更報。俾有以從速勘斷之地云云。題曰。據實修報之後。惟在營門處分向事。
二十二日。晴。
更報草。如牒報事。本府玉山書院儒生等。呈議送使。題音據。舊儒李能章李在鐘李能任新儒李在謙辛宗海孫星煥等。同庭査問。緣由報使。回題內。此報只陳兩邊所供初。無決折。其將何以明辨是非乎。本府。則必當有揣知者。詳査曲直。更爲報來向事敎是置有。亦兩邊曲直。自在於各其供招中是乎。所今此更査。別無異辭。而院席作鬧。享事失儀。俱涉乖。當有難全恕。故李在謙等三人。仍囚更報。惟竢處分云云。
五月初二日。晴。
官下帖。來到府尹。爲相考事。本院舊儒李能章。新儒李在謙。等兩邊曲直。自在各招。而院席作鬧。享事失儀。俱涉乖。當有難全恕。李在謙等三人。捉囚緣由報。巡營回道內前後題決。不啻截嚴。而所謂冠儒服儒者。放倒廉恥。恣行麤悖。若是之甚。惹鬧院宇士習可懲。不遵營飭民習可痛。以士以民。俱係當懲。幷各嚴懲放送是遣如。或不念舊慈。復肆前習。嚴刑遠配。在所不已。以此亦爲嚴飭向事。院宇作鬧。本非士子之行。享事失儀。終欠誠愼之意。以題以飭。終不知戢。或是或非。轉甚起釁。苟罪民習。誠覺駭憚。期欲痛懲是在如中。今到營題。又此申複。從爲以往。飭躬安分。務從自新是矣。如或不悛舊習。更有惹鬧者報營。刑配斷不可已。咸須知悉爲㫆。且以齊任言之。旣掌禮讓之節。不可一日曠闕。而尙未成差者。豈不慨歎。齊任以舊儒。不日設公。圈望報來向事。
初三日。晴。
送能章能新入府。爲探營題後嚴懲梗槩。
初四日。晴。
又呈士林文報云云。伏以本院事變之延抱。至今幸賴。我。城主明燭是非。據實報營。以承回題之。論討鄭重。口舌伐斧鉞。而城主又此下帖之申複。至有圈任報來之敎。民等於是乎始知。斯文之未全喪。吾道之未盡墜。而又感大君子。尊衛賢院之一副美意也。雖然民等窃。有訝惑不解。不得不有此稟質。城主幸垂察焉。明卞開迷焉。城主平日之於本院事。每以營決歸重。而就以言之營決言之。痛懲嚴懲字。未知營門下意之如何。而民等素知。公家處決。雖以一懲字言之例。有刑撻。重薄間。不得不有。而今聞李在謙等。不有重歇間施爲。而已爲放送。民等之遇迷所執。未知城主措處之如何而撌。以院規言之。儒林體貌。雖有此示文字之。有所引嫌於本院。不有削割之前。亦未敢入院設公。況此無前變怪之出。於建院三百年之後乎。爲敢齊籲仰稟。特下處分。以正院體之地云云。題。依營題。已爲嚴懲勘放。今於院規。有何所碍乎。卽爲設公。圈望以報向事。
初九日。雨。
自龜岡影堂會中發論。因望香設公。圈任之意。下牌都色。使之輪告鄕中。
十五日。晴。
鄕會院中。香謁後設公。圈任進士金奎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