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연대를 알수 없는 선산향교(善山鄕校) 향안(鄕案)
자료의 내용
작성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연대가 기입되어 있지 않은 선산향교 〈鄕案〉이다. 향안에는 총 67명의 관직 및 직임과 성명, 향안 작성시의 생사여부만을 기록하고 있다. 향안 등재자의 절반 이상이 선산향교가 소장하고 있는 나머지 3건의 향안에도 입록된 이들로써 본 향안의 작성은 적어도 1606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선 향안 자료에는 별다른 부기사항이 없고, 다만 향안을 새롭게 성책한 내용만을 기입하고 있고, 본 향안에는 이름 아래에 향안 작성 시의 생사 여부를 기입하고 있는데, 입록된 이들 중 약 70% 가량의 인물들이 향안 작성시에 이미 고인이 되어 작성시기가 앞선 향안보다 시기적으로 뒤인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본 향안의 경우에는 앞부분이 몇 장 탈락된 미완의 문기인데, 이 또한 어떠한 사정이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여타의 3건의 향안에 입록된 琴, 高, 權, 宋, 許氏가 아예 빠져 있는 것이 이 같은 앞부분 탈락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겠다. 즉 본 향안에 입록된 인물들과 그들의 생사여부를 통해서 1605년의 향안 등재자 중 생존자가 5명 뿐이며 연대미상의 본 향안의 생존자도 25명으로 나타나고 있고, 입록자 가운데 현재 《사마방목》 등에 남아 있는 이들의 생몰년을 살펴보면 본 향안은 1605년에 향안이 작성된 이후 적어도 30~50년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겠다.
본 향안에 입록된 인물 총 67명의 성씨는 金씨가 23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李 13명, 朴 6명, 崔·田 각 4명, 鄭 3명, 黃·孔·柳·康·文 각 2명, 許·盧·韓·尹 각 1명 순이다. 특히 강, 문, 한, 전, 윤씨의 향안 입록은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전쟁과 상당한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사료된다. 즉 전란의 장기화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핍박으로 양반계층의 활발한 이동이 있었으며, 이로 인한 혼인권의 양상 또한 많이 달라진 결과로 보인다. 기성세력의 出居, 약화와 새로운 세력의 入居, 성장이 이처럼 향안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들 세력도 병자호란을 겪었겠지만 영남이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비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바는 적기 때문에 결국 이들에 의해서 향교도 운영되었으며 이들의 자제가 향교교육의 대상으로 儒案, 校生案에 등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향안등재자의 관직 및 직임의 내역을 보면 幼學이 47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進士·同知 각 3명, 僉知 2명, 郡守·持平·司果·監察·敎官·監牧·監役·都事·博士 각 1명으로 다른 향안과 마찬가지로 중복되는 인물들의 관직역임자의 분포가 거의 같고, 전체 인원 중에 유학이 약 70%를 차지하는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관직의 분포가 보다 다양화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선산의 지역적 특색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향안에 입록되어 있는 持平 崔晛이 간행한 『一善誌』에 따르면, 선산의 성씨 중에 오직 김씨만 심히 성대하다고 나타나 있다. 또한 곽, 문, 심, 진, 조씨는 현재 선산부에 없으며 임, 최씨는 매우 미미하다고 하고 백씨는 김씨와 더불어 吏族이 많다고 하였다. 즉 향안에 입록된 인물의 경우 본관이 선산인 김씨를 제외하고는 거의 타 고을에서 이주해온 사족가문 출신이라는 것이다. 조선중기까지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率壻婚의 전통에 따라 妻鄕 또는 外鄕으로의 정착, 麗末鮮初의 정치적 갈등에 따른 卜居 등이 원인이 되어 타 고을 출신의 재지사족들이 선산부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특히 선산부의 ‘嶺南人才 半在一善’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일찍이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그만큼 타 지역 출신의 재지사족도 보다 활발하게 선산부에 정착할 수 있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향안의 가장 마지막에는 ‘癸亥更善’라고 기재되어 있다. 다른 향안과 선산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一善鄕約節目〉에서도 확인된다. 계해년이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일선향약절목〉이 1834년 작성된 것을 감안한다면, 19세기 중반 이후에 선산향교 소장 다른 자료와 정리하는 과정에서 기입된 것으로 보인다.
향안이란 조선조의 지방자치기구인 留鄕所를 운영하던 향중 양반 士類의 명부로 일종의 鄕紳錄으로 향록유안, 鄕座目, 鄕目, 鄕籍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조는 관료제 국가로서 엄연히 신분이 존재하는 사회로서 주거 이전의 자유도 엄격히 제한받았고 그런 이유로 지도층으로서의 진출은 科擧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經國大典』에 평민 이상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고는 하지만 族譜를 만들어 四代祖 家系로 신분을 구별지었던 까닭에 평민이 양반으로의 진출이란 실로 불가능하였다. 그들 양반은 대대로 관리가 되어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고 국왕을 정점으로 한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조선초 성리학을 국가 지도이념으로 채택하면서 나라가 안정되자 재야 학자들이 과거에 응시, 조정에 들어왔다. 고향에 田土를 두고 권력층에 자리잡은 양반들은 서울에 집중적으로 안착하여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면서도 자기 고을 출신 士族들의 이름과 본관, 관직 및 직임 등을 기록하여 鄕案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낙향하여 향안을 중심으로 鄕廳을 장악하여 자기 고을의 守令을 견제하면서도 보좌하여 풍속을 교정하였으며 鄕吏를 규찰하였을 뿐 아니라 政令을 시달하는 등 향촌사회의 여론을 이끌어 나갔다. 즉 조선사회에서는 향안에 입록되어야만 향청의 座首, 別監에 선출될 자격이 있었고 양반의 대우를 받으면서 지배신분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조상 전래의 세거지에 토착하여 문벌과 경제적으로도 강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향안을 통해서 그 연결고리를 견고하게 이어져 나갔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작성연대를 기입하지 않은 선산향교 소장 향안이지만, 입록된 이들의 연면과 여타의 향안과의 비교를 통해 17세기 중반 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자료이다. 선산향교에 소장되어 있는 3건의 향안이 모두 17세기 초반에 작성된 것이었던 것에 반해 본 문서는 그보다 약 30~50년 후에 작성되어진 것으로 선산지역의 재지사족들의 관직 및 직임 변동, 주도세력으로서의 성관의 변천 등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향안 입록자들의 성관분포의 변동이 선산지역의 사회변화의 양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양란 이후 재편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尹熙勉,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姜大敏,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1차 작성자 : 윤정식